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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11화 (211/407)

〈 211화 〉 #87 마찰

"뭘 질질 짜고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취기가 가신 선홍색 눈동자가 창문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쯤 남은 초록색 술병을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면서 그렇게.

"선생님……?"

"차였으면 인생 끝이야? 왜 또 신파극 찍고 지랄이야?"

그 말과 함께 홍유리가 코웃음 쳤다.

"왜? 억울하면 바짓가랑이…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져 보지 그랬어."

그 뻔뻔한 말을 아랫입술을 깨물어 어떻게든 참았다. 이미 잡아봤다. 잡아봤는데도 기어코 그 손을 쳐낸 거였다.

"소율아. 백소율."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백소율은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기차 떠났어. 울어도 안 돌아와."

"……떠난 게 아니라 가로챈 거잖아요."

자신을 노려보는 백소율의 눈빛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내 거니까."

"……."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그 말과 함께 홍유리는 조소하며 병 속의 액체를 들이켰다. 보란 듯이 약 올리는 말에 백소율은 어느새 자신이 주먹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그런 말 대신 백소율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다 흘려버린 눈물이 더 흐를 것만 같아서, 근데 그러면 너무 억울할 것만 같아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그냥, 변덕."

세로로 갈라진 샛노란 동공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자신감에 찬 미소와 함께 홍유리는 명백한 비웃음을 띠었다.

"난 절대 안 질 자신 있어."

"……."

"자신 있으면 뺏어봐. 기회는 줄 테니까."

"……."

"아, 그럴 깜냥도 없나? 그럼 그냥 질질 짜고 있던가."

명백한 도발. 비웃는 입꼬리를 보고 백소율의 눈에 서서히 독기가 들어차기 시작하자 홍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베란다를 나섰다.

***

알파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기껏 거절했는데 왜 그랬냐는 눈빛으로.

"나도 알거든?"

"……."

"질질 짜는 꼴 보고 그런 거 아냐. 그냥, 그냥…… 아 씨발."

홍유리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까 백소율이 그랬듯이.

"…좆같네."

초록색 병을 마시려던 홍유리는 입맛을 다시며 병을 내려놓았다. 병 안에 차 있는 건 그냥 맹물이었으니까.

"왜 그랬나."

알파의 붉은 눈이 답하라고 말하고 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텐데도 답을 들어야겠다는 뜻. 홍유리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알파가 매듭지어놓은 걸 굳이 끼어들어 헝클어버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기회는 줘야 되는 거잖아."

"……."

"걔도 나 도와줬잖아. 안 그랬음 너랑 아직 말도 못 했을 텐데."

알파와 사투를 벌였던 그 날 이후, 늘 자신을 도왔던 건 백소율이었다. 계속 옆에 있어 준 건 그녀였다. 밤에 술에 꼴았을 때 늘 도와줬던 것도. 쓰러진 자신을 몇 번이고 도와줬던 것도. 심지어는 알파와 화해하는 것마저도.

백소율이 없었다면 지금의 관계는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지랄. 나도 등신이네."

아까 누군가를 조소하던 웃음은 자조로 바뀌었다. 그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았다. 한번도 불평한 적 없는 제자가 그런 눈빛으로 노려봐왔다.

그렇게 원망스러웠을까. 나중에는 한 대 때릴 생각이었는지 주먹까지 쥐던데. 하기야 그럴 만한 일을 하기는 했다. 자신에게 가로채였다고 느끼는 건 당연하리라.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무시하고 모른 채 지나쳤으면 편했을 것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결국엔 납득하고 떨어져 나갔을 텐데. 가슴앓이는 했겠지만 그게 끝이었을 테고. 다른 누구도 아닌 알파가 끊어낸 거였으니까.

자신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 알파를 빼앗긴다고 생각만 해도 암담하고 눈앞이 컴컴해진다. 이제 알파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만 같은데.

그게 지금 백소율이 느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

……그래. 그래서였다. 그래서 말해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기 싫어서 자신 있으면 뺏어보라고. 기회는 주겠다고 개소리를 해버렸다.

홍유리는 슬그머니 알파를 쳐다보았다.

기회 따위 주지 말라고. 매몰차게 대하라고 하면 알파는 분명 그렇게 해주리라. 자신과 의리를 지킬 테니까. 하지만 차마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 그거야말로 정말 백소율을 기만하는 행위였으니까.

"……씨발."

머리는 어지럽고 가슴은 복잡하다.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검은 감정의 속삭임을 억지로 무시해야만 했다. 여전히 알파는 자신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

아침이 밝아 이별할 때가 찾아왔음에도 백소율과 홍유리는 끝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냉전에 아넬라는 홀로 식사를 마쳤다.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 두 숟갈 떠먹다 수저를 놓았지만 망할 숙취만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먹지 않았으리라.

이리저리 눈치 보던 아넬라는 멋쩍게 웃었다.

"……음. 소율 양. 이만 돌아갈까요?"

"네. 알겠어요."

아넬라의 권유에 백소율은 의자를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작별 인사도 없이 나가는가 싶더니, 잠깐 몸을 돌렸다.

늑대에게 늘 아련함을 품고 있던 눈동자에 더 깊은 감정이 들어차 있었다. 깊고 깊어서 마치 무저갱을 보는 듯한 그런 눈이었다.

"소율 양?"

"조만간 다시 뵐게요. 사랑해요."

뜬금없는 고백에 아넬라가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백소율은 보란 듯이 늑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지할 틈조차 없는 돌발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돌아갔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 드릴게요."

그 말은 홍유리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곧, 백소율은 늑대를 도로 놓아버리고 멀어져갔다. 기어이 대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말한 제대로는 이런 게 아니었다며 아넬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백소율의 졸업식은 끝을 맞이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최악의 형태로.

***

홍유리의 기분이 언짢아, 아니 드물게 침울해 보이자 이은하는 슬그머니 옥상을 찾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지만, 알파는 고개만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파마저 고개를 젓는데 그냥 죽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이게 폭풍전야겠구나 싶었다.

'근데 어제 소율이 졸업식 아니었나?'

좋은 날이었을 텐데 왜? 나도 쉬는 날이면 갔을 텐데 아쉽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이은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름 단서는 많았지만, 설마 홍유리와 백소율이 싸웠을 거라는 생각지도 못할 가능성을 차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페리는?"

늑대는 잠깐 고개를 들었고 제법 높은 곳에서 페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 따위 모른다는 듯 해맑게.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이은하는 결국 늑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

늑대는 가만히 생각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독기를 품은 모습과는 달리 백소율은 생각 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지금 그녀의 감정이 어떠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녀가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환영의 나비에게 마법을 배워야 할 테고, 설사 정말로 앙심을 품었다 한들 홍유리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겨우 이걸로 끝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아침에 보았던 그녀의 눈은 강한 집착을 품고 있었으니까. 홍유리의 행동은 분명 틀렸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한 오답이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다.

동정심에 주었을 기회는 바로 그 동정심을 숨기느라 홍유리의 성격과 더불어 조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조소는 포기하려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받아들였을 백소율을 움직이게 하고 말았다.

마찰이 생겨버렸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사그라질 것 같지는 않다.

……확실한 건 포기하지는 않으리란 것.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자꾸 최악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면 역시 탕아들을 미리 치워두는 게 나으리라.

백소율이 마녀가 될지 모른다는, 일어날 리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끊어내야 할 테니까.

일단, 그러기 위해선 고원이 연락해오는 걸 기다려야 한다.

"나… 시험 보기로 했어."

옆에 앉은 이은하가 말하기 시작하자 늑대는 시선을 돌렸다.

"B클래스 승격 시험. 응시해보려고."

다소 뜬금없는 말에 늑대는 잠깐 그녀를 훑어보았다.

…문제없다. A클래스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리더라도 B클래스 정도라면 충분히 붙고도 남을 테니까.

응시해보려고 가 아니라 진작 붙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이제 어지간한 꼬리 정도는 혼자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지리산에서 같이 싸웠던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무난하게 성장해가는 이은하는 걱정되지 않는다. 환계에서의 일은 그녀를 성장시킬 충분한 원동력이 돼 주었으니.

그래도 불안해하는 모습에 정수리를 툭툭 건드리듯 쓰다듬어주자 마치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

"왜 그랬어요?"

"……."

"뭐라고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원래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 아넬라가 힐끔거리며 묻자 백소율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부러워서요."

"부러워서요?"

"네. 그렇잖아요? 선생님은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전부 가지고 있다―― 백소율이 말하는 건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옆에 있을 수 있잖아요. 항상, 언제나. 저는 그거 하나면 되는데. 다른 건 전부 필요 없는데."

그래도 자신은 발목을 잡고 만다. 그의 옆에 있어도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싫어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참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건 전부 변명이다.

백소율은 새하얗게 웃었다.

아, 나는 정말 바보 같았구나 하고서.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한 이상, 이유가 어찌 됐든 알파가 자신을 밀어낸 이상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백소율은 자조하며 키득거렸다.

"이젠 알아요. 선생님이 옳아요."

어젯밤에 들었던 말.

자신 있으면 뺏어보라고. 그럴 깜냥도 없느냐고.

밤새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도출된 결론은 그 말이 정말 옳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낸 게 아니었으니까. 분명 떠밀리고 만 것일 테니까. 그러면, 그러면 포기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그의 마음이었으니까.

선생님이 옳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뺏어버리면 된다. 선생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물론 알파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쉽지는 않겠지만 기회를 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러니까…"

이제 기다리는 건 질색이다. 백소율은 알파에게 받은 선물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치 그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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