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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15화 (215/407)

〈 215화 〉 #90 추적

"…가겠다."

자색의 흑호에 대한 불안이 남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항저우에서 놈들이 있었을 거란 실마리가 생긴 이상, 가는 게 옳다.

그 넓은 땅에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광휘가 허투루 죽는 것보다는 뭐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누군가 남아서 자색의 흑호를 살폈으면 한다."

"……."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곧 약간의 의문을 담아 늑대에게 되물어왔다.

"너 인마, 설마 고놈이 움직일 거라 생각하냐?"

"모르니까.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근데 그래봤자 그거 답 없다. 너도 알지?"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다.

질병과 역병이 틀어막는 것조차 불가능해 부유섬을 띄우고 스퀘어를 설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면, 자색의 흑호는 인류가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손을 놓아버린 대적할 수 없는 불합리함. 폭력의 집합체.

그 스스로 백두산 등지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을 뿐, 그가 원했다면 질병과 역병보다 더 큰 재앙이 되었으리라.

"보고만 있으면 된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늑대가 바라는 건 오직 감시뿐이었다. 만에 하나 놈이 움직인다면 자신에게 빠르게 알리는 것.

"너 설마 그놈 막을 수 있냐?"

묘한 눈초리로 물어오는 것에 늑대는 생각했다.

진화한 이후, 단 한 번도 힘의 편린을 보인 적 없다. 창선의 시험에서조차 극히 일부를 드러냈을 뿐. 자신의 한계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막연히 추측만 하고 있을 뿐 확신하진 못하고 있다.

두 재앙을 먹고 본능을 극복해 진화에 이른 지금의 자신과 자색의 흑호―― 그래도 여전히 대적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자신일뿐이다.

아직 성장의 한계점은 오지 않았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레벨을 올릴 수만 있다면 놈과 정면에서 맞붙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 늘 그래왔던 불리한 사투가 아닌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으리라.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출발은 당장 내일로 정해졌다. 혼자만이라면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번에 꼬리를 잡아 처리할 수 있다면 뒤를 신경 쓸 일도 없을 거다. 변절자들만 처리한다면 남은 건 재앙을 막고 놈들을 먹어 치워 끝내 종말을 막을 뿐.

……자색의 흑호를 쓰러뜨리면 그다음엔 십중팔구 그녀가 움직이게 될 테니까. 다른 일에 신경을 쏟을 여유는 없다. 이번에 놈들을 뿌리 뽑진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혀야만 한다.

늑대는 바다 너머를 가만 바라보았다. 수백 킬로 너머의 광경은 지금의 늑대의 눈으로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 너머에 놈들이 있으리라.

그날, 늑대는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그들이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뀨우우."

준비됐냐는 듯한 페리의 울음에 늑대는 끄덕였고, 어느새 푸르스름한 풍경이 들어차 있었다.

***

어제 그런 말을 해버린 건 조금 성급했던 걸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다. 환영의 나비께서 자리를 비우신다며 조금이나마 일러 주셨으니까.

"……."

이단의 탕아들― 그가 증오하는 변절자들이자 꿈속에서 자신을 마녀로 만들었던 이들. 정확한 위치까지는 일러주지 않으셨지만,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백소율의 손바닥 위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짙은 자색 마력이 일렁였다. 누구라도 좋다. 환각을 보여주고 환상을 심어 아무튼 실토하게 만든다면… 그러다 이내 마력을 거뒀다.

깊은 한숨에 흰 입김이 섞여 나왔다.

그건 그가 바라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걸 바라고 있으리라.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질색이다. 어쩌면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선생님이라면 그걸 싫다고 뿌리치고 멋대로 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선생님인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할 텐데 자신까지 귀찮게 들러 붙고 싶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짜릿한 전율이 이는 듯 했지만, 이번엔 그냥 얌전히 기다리자.

"뀨우웅?"

마침 잠에서 깬 감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더 자라고 속삭이며 백소율은 늘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

"3팀에서 차출되는 건."

홍유리의 지시에 따라 우택은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불러나갔다. 그 끝에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이은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전과는 다르다. B클래스 헌터는 무수한 헌터 중에서도 한 줌밖에 없으며 어딜 가도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 새삼 자신이 B클래스 헌터가 됐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B클래스 이상을 이렇게 끌어모으는 거지?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클랜장 님이 계신 곳에서 알게 될 겁니다. 목적지는 항저우.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하세요. 차질 있으신 분들은 지금 말하시고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우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지금 호명된 인원들은 1시간 후에 회의실로 집합하세요."

준비할 것들을 생각해두는 사이 1시간이 지나 모인 자리에서 이은하는 3팀의 인원뿐만 아니라 1, 2팀의 여명의 헌터 전원이 모였음을 알게 됐다. 거기에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환영의 나비님이라 생각되는 분까지.

"전부 모인 모양이군. 시작하지."

이은하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브리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휘의 실종으로 인한 고원의 협력 요청. 그리고 이단의 탕아들이란 변절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 말인즉,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홍유리 팀장이 선도해 흔적을 찾아 우선 목표인 광휘를 수색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전이 있을 수 있으며…"

물론 이런 일도 있다고 들어는 봤지만, 정말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게 망설여졌다. 그런 상황이 오면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한다. 해야 하는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고원은 상하이로 저희는 항저우로 가게 됩니다. 여기엔 환영의 나비께서도 동행할 예정이며…"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다 회의가 끝났다. 부팀장님이 어깨를 쳐 줄 때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뭐 해? 준비 다 했어?"

그제야 회의가 끝났음을 알아채고 퍼뜩 회의실을 나왔다.

내일을 준비하면서도 이은하의 머리는 계속 멍한 채 그대로였다. 싸우고 죽이는 건 같을지 몰라도 사람과 몬스터는 느낌이 전혀 달랐으니까.

이은하는 조금 멍하게 하루를 보냈다.

***

날이 밝았을 때, 여명의 많은 인원이 공항으로부터 출발하기 시작했다. 환계에서 직접 발로 뛰는 게 더 나을 거리지만, 늑대는 함께하기로 했다.

비가시화를 이용해 비행기에 올라타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항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쯤 고원도 마찬가지로 상하이에 도착해 있으리라. 광휘가 사라진 항저우에 온 게 아니라 상하이로 갔다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테고.

"마지막으로 연락한 장소는 서호 인근이다.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홍유리."

"해보겠습니다."

그 확답에 강태준이 끄덕였다.

"출발하지."

머잖아 도착한 서호.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지만, 헌터들은 나름의 변장으로 무리 없이 그들 사이에 섞이듯 스며들었다.

변장. 그 역할엔 환영의 나비의 공이 컸는데, 각자가 어지간해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이 돼 있었다. 이 정도라면 작정하고 찾는 게 아니라면 들키지 않으리라.

그맇게 서호 일대를 조를 나눠 수색하기는 했지만, 기댈 수 있는 거라곤 추적의 마안뿐이었다. 여명의 어지간한 궁수들조차 유동 인구가 이렇게 많은데 흔적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

이해는 한다지만, 광휘라는 이름값이 수색을 시작하는 데 일주일이란 시간을 소요케 하고 말았다. 정말 홍유리라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뭘 그렇게 봐?"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하는 말에 늑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딱 한 마리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이전 한국에서 그랬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문제는 바로 그 첫 단추. 거기엔 홍유리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단서가 없으니까. 여기가 마지막으로 광휘와 연락이 닿은 장소였으니까. 분명 모종의 흔적이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둘레가 족히 10km를 넘는 호수에서 흔적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길면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 예측은 오산이었다. 서호 일대를 몇 바퀴인가 돌았을 때, 홍유리가 멈춰 섰으니까.

어쩐지 모를 위화감에 두리번거리던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 주변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서. 단순히 걷거나 뛰었다기엔 깊게 팬 흙바닥. 작정하고 발을 굴러도 일반인이 이만한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고개 든 홍유리의 눈에 보인 건 꺾일 것처럼 휘어진 나뭇가지. 그 순간, 홍유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시 위에서 아래로. 뚫어지라 바닥을 보더니 조심스레 바닥을 훑은 홍유리는 흙더미 속에서 웬 나뭇조각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일견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조각이었으나, 인공적인 흔적이 엿보인다. 확실하게 각이 져 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 홍유리는 이것이 얼마 전 섬을 정리할 때 보았던 광휘의 활의 파편 일부임을 알 수 있었다.

"찾았다……!"

몇 번인가 허탕친 끝에 드디어. 홍유리는 곧바로 무전을 들어 올려 소식을 전했다.

***

"…정말 실종됐다는 거군."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활의 파편이 있었다는 건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놀랍군."

"홍유리. 쫓을 수 있겠나?"

환영의 나비의 감탄과 강태준의 물음.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있었지만,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를 찾아 그 뒤를 쫓는 건 어렵지 않다. 이 파편이 주인인 광휘에게로 인도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이 흔적이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흔적이 상당히 희미하다는 점이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소요됐으니만큼 계속 움직였다면 쫓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미 출발했어요."

"출발했다고?"

홍유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늑대는 바람을 타고 달렸다.

파편이 광휘의 것이라면 그 뒤를 쫓는 건 어렵지 않다. 홍유리처럼 마안은 없더라도 후각이 있었으니까. 한번 맡아본 냄새라면 각인해 잊지 않는다.

홍유리는 훌륭하게 단서를 찾아줬다. 첫 단추를 끼웠으니, 그 뒤를 잇기만하면 된다.

여명의 클랜원들이 완전히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적당히 흔적을 남기며 달린 늑대는 몇 시간이 지나 광저우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는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 있었던 혈흔과 더 많은 파편. 늑대는 그것이 격전의 흔적임을 알았다. 언뜻 보이는 발자국은 가면 갈수록 깊어졌고 혈흔과 흘린 땀은 많이 남아있었다. 광휘의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제법 많았다. 변절자들로부터 몇 날 며칠을 도망친 것이리라.

……그래. 여기까지는 도착했다.

문제는 이다음. 후각과 혜견으로 냄새와 흔적을 쫓아 왔으나 이후부터는 쫓는 게 쉽지 않다. 그 흔적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었으니까. 마치 광휘를 조각내 여럿이서 나눠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도대체 무엇을 알게 됐길래 그렇게 숨어 움직이지 않던 놈들이 움직인 것인지 아니 그 이전에 광휘가 살아있기는 한 건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늑대는 그중 가장 강렬한 혈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 의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차피 전부 쓸어버릴 테니까.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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