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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18화 (218/407)

〈 218화 〉 #92 침공

처참히 부서진 기계 앞, 완전히 분해된 뛰지 않는 심장의 앞에서 홍유리의 눈동자가 양옆으로 떨렸다.

"……이게 시발 진짜라고? 미친 거 아냐?!"

믿기 어렵다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게 볼 것도 아니다. 놈들의 의도대로라면 훌륭하게 말려든 셈이니. 아니, 고원만이 아니라 여명마저 꿰어냈으니 그 이상이리라.

서울 침공― 게워내는 위장과 뛰지 않는 심장을 비롯한 꼬리들 전부가 미끼였다는 뜻이다. 무리해서 광휘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정보를 숨기기 위해서.

문제는 그 과정에서 고원을 꾀어낼 셈이었을 텐데 놈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지고 말았다는 것. 고원과 여명이 둘 다 자리 비운 지금 서울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클랜들로 놈들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설마하니 침묵하는 입과 저거노트까지 없어진 마당에 서울을 침공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홍유리는 입술을 씹었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토막 난 광휘의 시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촉수를 뻗어 홍유리를 끌어당긴 늑대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검을 쳐 내리자 칼날에 묻은 붉은 피가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바닥에 튀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강태준은 담담하게 광휘의 잃어버린 사지를 쳐다보았다.

꼬리를 자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런 놈들이 더 많을 거라는 점인데…

"환영의 나비 님."

1팀에 소속돼있을 환영의 나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강태준은 몸을 돌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광휘가 왜 죽었는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환영의 나비의 손 위, 자색 마력에 감싸인 광휘의 신체 일부에 강태준과 함께 있던 두 궁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쯤 마랑이 놈들을 잡았을 테니…?"

별안간 울린 핸드폰 알림에 강태준은 수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홍유리에게서 받은 문자에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알았습니다. 그 이유."

***

서울에서 머지 않은 곳. 창염을 두른 갑주의 괴인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그리도 지키려 했던 곳인데 이제는 정반대에 서서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이게 옳다고 강훈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 걸 막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녀가 말한 대로다. 어떻게 굴러가던 결과는 최악으로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차악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원과 마랑은 자리를 비웠고 예상외의 소득으로 여명마저 빠져버렸으니 이 이상의 기회는 없으리라.

"많이 기다렸수?"

뜬금없이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강훈은 당황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조금 늦었구나."

갑주를 입은 자신보다 커다란 거한이 걸어오는 것에 강훈은 검을 늘어뜨렸다. 패태검을 수리한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검을 들고 왔다는 것에 이채를 띠면서.

"거, 딴 일 하느라 조금 늦었수다. 댁이 이해하쇼."

붉게 담금질 된 듯한 검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지만 저런 걸 어디서 구했을까. 저만한 몬스터가 토벌된 적이 있었나?

"새삥으로 뽑았는데 어떻수? 때깔 죽이지?"

히죽거리며 자랑하는 말에 강훈은 순순히 끄덕였다.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으나 검사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귀물로 보인다.

"근데 혼자요?"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혼자다. 다른 이들은 서울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비어있는 서울에 자신이 잠깐 빠진다고 문제 될 건 없으리라. 여기서 자식의 목을 베고 뒤따라가면 될 일이다.

"시벌. 조졌구만."

그 여유로운 모습에 강태호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미 넘어간 놈들이 있는 모양. 이제 말은 필요 없다. 둘은 서로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

클랜장의 호출에 따라 조를 나눴던 여명의 일원들이 황급히 모여들었다. 고원에게도 연락하기는 했지만, 시간을 맞추기란 어려우리라.

헌터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멍청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여기 오질 말았어야 한다. 아니,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는 게 맞으리라.

놈들을 소탕하려 왔더니, 그게 미끼였고 빈집을 털러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알파는…요?"

창백한 안색으로 변한 이은하가 떠듬떠듬 묻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면 알파가 미리 향했다는 것. 놈들이 얼마나 있건 간에 사태는 수습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침공은 이미 시작됐다고 보는 게 옳을 터. 침공당하는 곳에 항공편이 뜰 리 만무하다. 돌아갈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강태준의 시선이 하연에게 향했다.

"수배는 했나?"

"아뇨. 민간에서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

"대신, 무상으로 빌려주겠다는 곳은 있더군요."

"무상으로? 어디지?"

"전쟁의 신전입니다. 알파에게 진 빚을 갚겠다더군요."

"……잘 됐군."

빚이란 건 유럽을 멸망시킨 역병과 질병을 말함이리라. 알파의 소속이 여명에 속해있다고 생각한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돌아갈 방법은 생긴 듯하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 사태를 수습해야만 한다. 서울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

우려하던 침공. 그 시작은 살덩이들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그것이 침공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곳곳에서 일어난 살덩이들이 길을 막고, 꾸멀꾸멀 움직이며 건물과 부딪쳐 도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화재가 일어났다.

난데없는 밤의 공습에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를 시끄럽게 울렸고 혼란은 가중되어갔다.

클럔과 군부대가 움직였지만 사태를 수습하기란 역부족. 화력을 집중하고 심지어 주포를 맞아도 살덩이는 움직였으며 헌터들의 공격으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시민들의 대피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영화처럼 폭격 허가가 쉽게 내려질 리 없다.

물론 뛰어난 헌터가 여명과 고원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마저 처참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냥당하고 있었다.

살덩이와 싸우던 헌터는 별안간 뻗어진 촉수에 발목이 붙잡혀 바닥에 처박혔다.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빠르게 무언가에 짓눌렸다.

압도적인 중량에 깔린 헌터가 황급히 몸을 돌렸을 땐, 거대한 입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다만, 머리에 난 이빨이 아니라 수백 킬로는 나갈 것 같은 뚱뚱한 체형의 사내의 배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입이 쩍 벌어졌을 뿐.

단번에 헌터의 머리를 씹어 삼키고는 입의 크기에 걸맞은 기다란 혀가 마치 이거론 부족하다는 듯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흐래도."

달린 머리가 아니라 배에 달린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아직, 므않이, 있드아……"

괴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피난민의 행렬이 있었다. 찢어진 거대한 입꼬리가 끌어올려 졌다.

***

환계의 중국. 홍유리를 태운 늑대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발판을 밟으며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

이제 그리 멀지 않다. 초조함에 손톱을 깨문 홍유리를 달래듯 페리가 안심하라고 토닥였다. 그런다고 동요가 가라앉을 리 없지만, 홍유리는 애써 심호흡하며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머잖아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불 꺼진 서울의 곳곳이 불타오르는 게 보이자 홍유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씹새끼들이……!"

대전의 밤, 아카데미 습격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한술 더 떠서 서울을 침공했다고? 광휘를 죽이고 그걸 미끼로 고원을 꾀어내서?

아득바득 이를 갈던 홍유리는 별안간 늑대가 멈춰 서자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가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보다 빠르게 그 앞을 붉은 사슴이 가로막았으니까.

붉은 사슴? 아니, 아니다.

"……백록?"

붉은 사슴이 아니라 붉게 물든 사슴이었다. 피 칠갑을 한 백록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와…주게."

홍유리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늑대의 귓가엔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네… 도와주게…!"

***

소녀는 천천히 환계를 거닐었다. 그 오랜 시간을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모조품, 가짜 세계. 온갖 환수들이 모인 이곳의 풍경은 그녀가 보기에도 환상적이었다.

응. 잘 만들었네.

환계란 이름은 정말 잘도 지었다. 자신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요정들과 작은 용들을 보며 소녀는 웃음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볼 걸 그랬다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삽시간에 이해하고 요정어를 깨우칠 때쯤 하늘이 아니, 바다가 열렸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그 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아름다운 환계였던 장소는 칠흑으로 가득한, 언젠가 늑대가 보았던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환계의 진실. 덧씌워지지 않은 본연의 모습이었다.

곧 요정도 환수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소녀는 생긋 웃어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잃어버린 신님?"

***

피난 행렬엔 백소율 또한 껴 있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갓 졸업했을 뿐인 그녀에게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불바다가 되어가는 서울을 바라보던 백소율은 이제 대피소까진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았다. 헌터들이 호위하고 있긴 하지만 살덩이가 다가오면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 살덩이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싸우고 있었으니까.

"……!"

살덩이를 피해 가는 길. 백소율은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몸을 돌렸다. 거기에 비만의 남성… 아니, 단순히 살이 찐 게 아니라 진득한 피 냄새가 느껴진다. 육중한 몸을 뒤뚱거리며 달려오는데도 그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살의와는 조금 다른, 마치 굶주린 듯 눈을 부라린 괴인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배를 쩍 벌렸다.

"멈, 멈춰!"

헌터의 목소리에 돌아본 시민들이 기겁하며 행렬이 흩어진다. 창을 들이민 헌터가 막아보려 했으나, 기다란 혀가 창대를 뱀처럼 타고 오르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대체 그 기다란 창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무기 잃은 헌터가 당황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그 입이 벌어졌다.

괴인은 헌터를 집어삼키고 먹어 치웠다고 여겼지만, 정작 헌터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넋 나간 채 주저앉은 헌터가 백소율의 옆에 주저앉아 있었으니까.

어느새 그녀의 손끝엔 자색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배 속의 입에 들어온 게 아무것도 없자 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어어, 맛있어보, 인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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