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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19화 (219/407)

〈 219화 〉 #92 침공 (2)

눈앞의 괴인을 상대로 백소율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괴인은 강하다. 분명 이단의 탕아들 그 간부이리라.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을 쫓으러 간 고원과 여명 그리고 알파가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서울을 침공한 것.

"너어어, 맛있어, 보인드아?!"

백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최대한 작은 소리로 주문을 짜냈을 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 사이 목숨만 간신히 건진 헌터가 가까스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직면한 죽음의 공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영창하면서 백소율은 주변을 살폈다. 고작 헌터 여섯. 원래는 더 많았지만 그새 도망친 모양. 참 빠르기도 하지. 남은 헌터들이 고맙게 느껴지긴 했으나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기껏해야 C클래스 헌터들이 아닐까.

한숨 쉰 백소율은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가세요."

"뭐?"

뜬금없는 말에 헌터들은 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반문했다.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다른 곳으로 가세요."

정신 나간 소리라고 일축하기도 전에 자색 마력이 벽이 되어 그들을 밀어냈다. 괴인이 정면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백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괴인의 배가 벌어지고 흉흉한 이빨이 드러나 그녀를 씹었지만, 그 실상은 허상을 삼킨 것에 불과했다.

자색 마력, 퍼플 스퀘어의 근간은 환상이었으니. 신체 능력은 감히 괴인에 비할 수초차 없지만 마력 하나만큼은 괴인을 넘어서 있다.

"―――!"

밀려난 헌터들이 자색 벽을 두드리며 소리치지만, 백소율은 무시로 일관했다. 저들이 있어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환상에 속은 괴인이 날카로운 이빨이 건물 벽에 부딪치자 마치 두부라도 된다는 양 벽을 씹어먹었다. 배 속에 아공간이라도 있는 걸까? 괴인의 몸보다 훨씬 큰 벽인데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면 벽이 있었단 사실을 의심했으리라.

"흐아니, 었네… 뜨오오?"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감돈 순간, 재빨리 몸을 날린 백소율은 괴인으로부터 뻗은 촉수를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마치 문어의 그것처럼 꾸물거리는 촉수가 바닥을 쓸듯이 뒤따라오자 백소율은 빠르게 달렸다.

반사적으로 마력의 벽을 만들어 펼쳤으나, 순식간에 뚫려버린다. 물론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냥 생각하던 이상.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촉수에서 가시가 튀어나오자 백소율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피하기 힘들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감마의 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먼 곳으로 피해있었다.

"점멸?"

몇 번이고 느껴봤던 힘. 페리가 종종 사용하던 스킬이었다. 그걸 페리가 아닌 감마가 사용한 것. 아니, 같은 요정용인 만큼 그리 이상할 건 아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이렇게 컸는지…

덕분에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겼다. 촉수를 사용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잠깐 실수했다간 그대로 죽음이다. 괴인의 힘으로 공격당하면 절대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지만 지금처럼 감마가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백소율은 감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힘들어하면서도 날개를 펄럭이는 감마. 쉬게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 도움이 절실하다. 다시 백소율의 손끝으로 자색 마력이 모여들었다. 환영으로 괴인의 눈과 귀를 속이며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Alb pur Stelele sunt sa explodeze."

퍼플 스퀘어의 것이 아니라 서리 계곡에서 배웠던 불의 마법을.

***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백록을 보고 늑대는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었다. 백록과 오래된 용이 그라고 칭했던 존재. 십중팔구 자색의 흑호이리라.

놈이 움직였다… 하필이면 탕아들이 침공한 지금? 아니, 그래서이리라.

"뭐 하는 거야! 얼마 안 남았잖아!"

답답하다는 듯이 홍유리가 자신을 치는 손길에 늑대는 촉수로 백록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이 맞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달리는 와중에 늑대는 백록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여왕은? 환계엔 여왕이 있을 텐데."

"모르겠네. 환계가, 환계가 이상해!"

이상 현상. 백록은 환계가 붕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지점 이후로는 마치 암흑이 들어찬 것처럼 보이지 않고 거기에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는 것처럼 넘어갈 수 없다고. 고개 저으며 한탄하는 그에게 평소의 침착함은 남아있지 않다.

환계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던전이 나타나기 훨씬 전, 어쩌면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백록이 인간의 말을 기억했다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 지났을 리 없으니.

……거기서 늑대는 어떤 모순을 느꼈지만, 의문은 나중에 해소하면 된다. 급한 건 당장 눈앞의 일. 머리 한구석으로 의문을 밀어두었다.

"자색의 흑호는."

"환수들은 도망치고 있네. 하지만……"

정말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백록조차 간신히 목숨만 건져 현계로 도망쳐온 거나 다름없는데 그보다 발 느린 다른 환수들이라면 몰살당하는 게 당연하리라.

분명 놈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진퇴양난의 상황이란 건 분명하다. 서울은 침공당해 불타오르고 환계에는 자색의 흑호라는 유례없는 괴물이 날뛰고 있으니까.

그 모든 걸 혼자 막을 순 없다. 선택해야 한다. 서울을 택하면 환계가 무너지리라. 환계를 택하면 서울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가만 놔둘 수는 없다…….

이젠 머지않은 길. 다급한 홍유리의 표정과 상처 입은 백록이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며 늑대는 선택의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

굉음이 울린다.

검과 검이 충돌하는 와중 강태호는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주변은 진작 초토화돼 무너져내렸을 테니.

손목에 뻐근한 감각이 남기는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다. 겁화의 불과 공허의 아지랑이로 만들어진 각룡의 뿔은 부러지지 않고 꺾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

강훈은 자신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계속 몇 번이나 맞받아치다가는 검이 먼저 부러지고 말리라.

저건 차라리 검보다는 둔기에 더 가깝다. 그래. 패태검이 부러진 저번과는 달리 제대로 준비해뒀다는 거겠지. 곱씹던 강훈은 이 싸움을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무소처럼 돌진하는 강태호를 피하고 그가 허리를 비틀어 횡으로 휘두르는 검을 맞받아쳤다.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견디고 발을 들어 올려 걷어차 쓰러뜨렸다.

앞으로 고꾸라진 강태호는 앞으로 굴러 자세를 잡았고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검을 몸을 날려 피했다. 가벼운 일격에 땅이 갈라졌지만 되려 기회로 삼아 검을 휘두르자 양자의 검이 서로 맞부딪쳤다.

끄드득―

검의 우위는 바뀌었더라도 기량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뿐이지 승산은 적다.

하지만 제아무리 칠영웅의 검성이었던 그라고 한들 무기가 부러지면 승기는 자신에게 있다. 문제는 검을 부러뜨리기 전까지 자신이 쓰러지지 않는 것. 걷어차여 얼얼한 늑골을 애써 무시하며 강태호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

전쟁의 신전의 도움으로 얻어 탄 치누크 안에서 이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어둡고 구름이 껴 잘 보이진 않지만 이미 서울은 침공당하고 있으리라. 벌써 붕괴한 건 아니겠지? 지금쯤 알파는 도착했을까? 집에 남아있을 동생이 걱정된다. 잘 도망쳤을까? 제발 별일 없으면 좋을 텐데…….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클랜원들 전부가 같은 마음인 듯했다.

탕아들의 반격. 유례없는 침공. 간다고 막을 수나 있을까? 애초에 그들이 꾀어내려 했던 건 자신들이 아니라 고원이었지 않나? 의문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강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침공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 짓는 말에 모두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기지국이 부서지기라도 했는지 서울의 소식을 알아보기란 힘겹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강태준은 자신의 눈으로 머나먼 곳을 보았다.

검성이라는 이름. 그에 걸맞은 예민한 감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불타는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놈들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른다. 이번엔 분명 강훈 또한 왔을 터. 불타는 서울과 함께 여명마저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우리가 도착하면 달라질 거다."

또한, 전국 각지의 클랜이 모여들고 있으리라. 삭월, 옥연, 거암, 은자, 신전, 외봉, 광명회 그리고 여기에 환영의 나비까지 있으니.

"침공을 막고 놈들을 뿌리 뽑는다. 이견 있나?"

클랜장의 말에 멍하니 올려다보던 이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변절자들이 강하다 한들 기습일 뿐이다. 되려 이 기회에 놈들을 아주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여명의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할 일을 알려주겠다."

***

서울에 도착한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개 같은 꼬라지도 정도가 있지. 무너진 건물만 수십 개. 징그러운 살동이는 또 뭐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맘 같아선 대마법이라도 쏴 재끼고 싶은데 그랬다간 도시 전체가 불타버릴 테니 본말전도다. 짜증 나긴 하지만 직접 발로 뛰면서 하나하나 처치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

"―――!"

거대한 붉은 사슬이 꾸멀거리며 다가오는 살덩이를 얽매고 그것이 건물 벽에 부딪치자 홍유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마찬가지로 규격 외의 크기를 가진 붉은 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창이라기엔 너무 커다란, 차라리 로켓이나 기둥에 가까운 크기. 하지만 이 정도는 돼야 속이 시원하지.

홍유리는 몸부림치는 살덩이를 향해 창을 던졌다. 그 단단한 살덩이를 가볍게 파고들어 안밖으로 불태우기 시작하자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곧, 새까맣게 불에 탄 살덩이가 재로 화해 부딪친 건물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이딴 살덩이들보다 일단 간부니 뭐니 하는 것들부터 족쳐야 한다. 그중에 강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새끼들은 다 족칠 수 있을 거 같은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냉정하게 스스로를 판단한 것. 넓게 마력을 퍼뜨린 홍유리는 잠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아직 도시엔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남아있는 모양. 대피소까지 가려던 홍유리는 별안간 새하얀 빛이 번쩍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분명 자신의 마법. 쓸 수 있는 사람은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백소율이 교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단 그리로 갈까 하던 홍유리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발을 멈췄다.

"진홍? 여명은 다 자리 비운 거 아니었나?"

"마랑. 없음. 진홍. 혼자."

떠듬거리는 말소리에 고개 돌린 홍유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와 로브를 두른 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처리해야지."

당연하다는 듯 떠드는 말에 홍유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시를 개판으로 만들고 깝죽거리는 것도 꼴같잖은데 뭐라고? 처리? 이것들이 미쳤나.

"지랄하고 있네."

그녀로부터 그 이명에 걸맞은 진홍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목 뒤의 비늘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진다.

"와줘서 고맙다 씹새들아."

홍유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용혈이 들끓고 대마력이 솟구치며 넘실거리던 마력이 폭발하듯 퍼져 모든 것을 뒤덮었다.

"덕분에 일일이 안 찾아도 되니까!"

***

푸르스름한 환계― 아니, 그렇지 않다. 붉게 물들어 피와 살이 난무하고 환계의 많은 곳이 검게 변해 암흑처럼 변해 있었다. 지나갈 수 없게 변해버린 곳을 늑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건 없다. 지금의 자신조차 저 너머를 꿰뚫어 보는 건 무리.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여왕을 막을 수 있는 건 그와 대등한 초월적인 존재여야 할 터. 떠오르는 건 둘이었지만, 서울에 탕아들이 침공하고 자색의 흑호가 움직인 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 없다. 만상의 주인, 그녀가 환계에 발을 디딘 것이리라.

여왕과 만상의 주인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감히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순 없다. 이미 많은 공간이 검게 물들어있다.

서울과 환계― 고민했지만, 늑대의 선택은 후자였다.

잠깐 떨리던 홍유리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환계를 지키는 게 우선이다.

이 세계가 붕괴해 그 방대한 마력이 현계로 스며든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서울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계가 붕괴함에 따라 환계의 던전이 현계에 나타날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에는……

……아니, 생각하지 말자. 지금 당장은 놈을 막는 게 더 급하니까.

"이쪽이네!"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놈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격하고 서로가 서로를 인지했다.

낮게 우는 소리는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검은 호랑이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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