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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0화 (220/407)

〈 220화 〉 #93 자색의 흑호

날카로운 이빨이 바닥을 씹는다. 벌써 세 번째. 감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매번 위험했을 순간이었다.

"이, 이이익!"

환영에 속고 점멸로 피해 몇 번이나 놓친 만큼 짜증이 치밀어 오른 모양. 씩씩거리는 괴인을 상대로 백소율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늘 당한 건 괴인이었으니 일견 우위에 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감마는 이미 지쳐 헥헥거리고 있고 자신은 약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서로 정신 고갈이 찾아오고 있으니 이 구도가 오래가진 않으리라.

마법은 이미 완성했다. 보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란 걸 백소율은 잘 알고 있었다.

"므억게, 해조오오!"

어눌한 말과 함께 괴인이 다시 달려든 순간, 백소율은 하기로 맘먹었다. 더 확실한 기회를 노리고 싶지만 이젠 기회라는 것 자체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손끝에서 유려하게 뻗은 자색 마력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얽혔다. 환영을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 적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

그 상상을 보다 현실에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환영의 계파, 자색 마법사의 극의. 백소율에겐 뛰어난 상상력 같은 건 없다. 아니, 필요가 없다. 상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잘 간직하고 있으니까.

배 속의 턱이 벌어져 마치 아귀처럼 달려드는 괴인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 백소율은 입고 있는 옷을 찢으며 목청껏 외쳤다.

"Proiecție oglindă falsă iluzie―!"

그에게서 받은 선물. 찬바람에 검은 털이 흩날리며 마력에 녹아들어 형상을 갖춰간다. 거짓에 불과한 환영일지라도 현실감을 부여한다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 괴인의 발이 멈췄다.

다만, 달리던 추진력은 그대로 남아있다. 빗길의 차가 미끄러지는 것처럼 충돌하기 직전. 피할 수 없다―― 백소율은 피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건 감마에게 맡겼으니까. 거리가 벌어진 순간, 괴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니,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신이 선사한 환영 속에서 지금쯤 그를 만나고 있을 테니까. 생각했던 것 이상의 효과, 완벽히 드러난 틈. 백소율은 망설이지 않고 보류했던 마법의 마지막 영창을 외쳤다.

"Iată moartea ta―!"

그것은 진홍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마법. 순식간에 모여든 빛이 환영에 빠진 괴인을 향해 쏘아졌다. 모여든 빛은 새하얗게 폭사해 어두운 밤을 밝혔다.

스승에게서 배운 3절의 마법은 제자의 손을 빌어 본연의 위력을 발했다. 쓰러뜨릴 수 없을 거라 여긴 괴인이 새하얀 폭발 속에서 산산조각 나 있었으니까.

"―――!"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이 폭음에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감춰진다. 다리는 남았지만 그 위로는 폭발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됐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리만 남은 괴인의 엉망이 된 상처로부터 싹이 트는 것처럼 살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러고도 아직 죽지 않았다. 뇌와 심장이 전부 날아갔을 텐데 재생하고 있다. 애초에 괴인에게 장기나 신경같은 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 두말할 것 없는 키메라. 백소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

반쯤 토막 난 검을 보며 강훈은 혀를 찼다. 이미 피투성이에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지만 강태호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급소만은 피하고 무기의 우위라는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려 한다.

앞으로 몇 번이나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한 번? 아니면 두 번?

균열이 일어난 자신의 검을 보고 그 눈이 빛나고 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저 끈질긴 근성이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었지…

회상하듯 검을 휘두른 강훈은 부서진 갑옷을 쓸었다. 창염이 타오름과 동시에 깔끔하게 복구된다. 이 갑옷처럼 검도 고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진 않는다.

"거 칼 좀 좋은 거 들고 오지 그러셨소?"

억지로 히죽이는 말에 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그렇게 하마."

노골적으로 자신의 검을 탐하는 시선에 강태호는 쓰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극한의 냉기를 가진 창염에 얼어붙어 삭신이 쑤신다. 피가 얼어붙은 착각이 드는 와중 엉뚱하게도 옷이라도 두껍게 입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벌, 역시 네버랜드에서 좀 더 잘했어야 하는 건데.

등 뒤로 불타오르는 서울을 보며 강태호는 끌끌 혀를 찼다. 맘 같아선 얼른 끝내고 도우러 가고는 싶은데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대체 얼마나 많이 온 거요?"

가벼이 묻는 말에 강훈은 답하지 않았다. 투구 사이로 빛나는 안광이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자고 그리 말하고 있다.

이 양반, 체력도 안 닳길래 시간이라도 끌어보려고 했더니 다 뽀록 났구만.

그런 생각을 하며 강태호는 검을 들고 달렸다. 기량에서 모자란 자신이 선공까지 내줬다간 더 불리해질 테니.

힘껏 휘두르는 검풍에 지형이 바뀐다. 수 미터 바깥의 나무들이 폭풍이라도 만난 것 마냥 전부 쓸려나갔다. 이것마저도 처음에 비하면 그 기세가 줄어든 것. 가능하면 충돌을 피해야 한다 생각한 강훈은 몸을 낮추고 자신의 대검을 그었다.

가슴께에 핏물이 튄다. 그 피가 땅에 흩뿌려지기도 전에 창염의 냉기에 얼어붙어 붉은 얼음꽃이 피어오르자 강태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강훈의 견갑이 깨지고 그 충격으로 땅이 움푹 파인다.

검을 되돌린 강태호는 양손으로 쥐어 힘껏 휘둘렀으나, 이미 강훈이 견갑이 부서진 채 어깨로 밀어내 건물 세 채를 꿰뚫고 가까스로 멈췄다. 흙먼지 속에서 가까스로 일어나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던졌다.

주먹을 쥔 강훈이 날아오는 그것을 깨부쉈다. 부서진 건물의 벽을 마치 돌멩이라도 던지는 것처럼 투척한 것. 주먹과 벽이 닿았는데 벽이 산산이 부서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의 너머엔 강태호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머리 높이 검을 들어 올리고 찍어내리는 동작은 기초에 충실하다. 평소 뺀질거리는 성격과는 달리 검공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동작. 수천수만 번의 셀 수 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도달한 경지. 팔이 후들거리는데도 검 끝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전부가 노력의 성과임을 알고 있기에 강훈은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넋을 잃었다. 그 때문에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대단하구나."

냉기를 지닌 듯 낮은 목소리가 자신을 칭찬하자 강태호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체력은 둘째치고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극한의 창염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번 마력을 갑주처럼 둘러야 했으니.

돌아본 강훈의 검은 반으로 쪼개져있었다. 방금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검의 수명이 다한 모양.

그러나, 강태호는 이를 악물고 흐려져가는 의식을 어떻게든 붙잡아야만 했다. 아까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그의 손이 닿았었기 때문에.

악귀, 원령들이 타고 넘어와 정신을 어그러뜨리려 한다. 그 속삭임을 무시하는 게 쉽지 않다. 신경이 갉아먹히는 것처럼 예민하게 곤두선다. 그래도 집중을 잃진 않았다.

강훈의 검은 짧아져 있다. 드디어 길은 열렸다. 문제는 지금의 자신이 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

강태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걸을 수 있냐 없냐가 아니라 걸어야만 한다. 악귀 원령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강태호는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마치 장벽처럼 퍼진 진홍의 마력에 둘러싸인 두 간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음했다.

진홍이 이 정도였나?

변혁을 맞았단 건 알고 있다. 그걸 감안하고서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는데… 고작 그런 게 아니다. 이건 거의 스퀘어 마스터의 수준이 아닌가?

서서히 좁혀져오는 불의 장벽 속에서 두 간부는 등을 맞댔다. 일일이 찾을 수고를 덜었다고 했던가. 그 말은 허세도 뭣도 아닌 담백한 진실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는 둘을 보며 홍유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주문들이 나풀거리며 선율처럼 노래하듯 흘러나왔다.

용종이 돼 얻은 건 단순히 용의 피만이 아니다. 마력에 대한 지배와 이해가 달라졌으니. 거기에 더해 영약과 환계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대마력과 용혈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후계자는 도로시였으나, 지금의 홍유리는 도로시의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왜 여태 이렇게밖에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용종으로서 그녀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마법을 새롭게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마력의 색이 짙어질수록 두 간부는 지금 빠져나가지 않으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정답이지만 그 판단이 조금 더 빨랐어야 했다.

간부에 걸맞은 방대한 마력이 흘러나왔지만 일대를 잠식한 붉은 마력에 비하자면 초라해 보일 뿐이다. 갈라진 샛노란 용의 눈이 비웃음을 띤다. 고작 이거냐고.

불타는 벽을 눈앞에 두고 간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뚫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임과 함께 불의 벽을 향해 뛰어든다.

일단 탈출하고 간격을 좁힐 수만 있다면 결국 마법사에 불과한 진홍은 쓰러뜨릴 수 있다는 그런 심산.

다만, 한 가지 그들이 착각한 게 있다면.

"Multiplexare cu lanț de flacără!"

그동안 홍유리가 가만있을 리 없다는 거였다. 수십 갈래 불타는 사슬이 대기를 뜨겁게 달구고 불의 장벽 너머에서 뻗어오자 모자 쓴 남자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쇄도하던 사슬이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공간?'

커다란 아공간을 열어 사슬을 집어삼킨 것. 이채를 띤 홍유리는 아직 능력을 드러내지 않은 로브의 괴인을 노려보았다. 아까 주고받던 말로 미루어 보건대, 감지 계열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아공간을 앞세워 간신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두 간부의 꼴은 이미 엉망이 돼 있었다. 물에 젖은 아니, 불에 탄 생쥐 꼴로 변한 두 간부. 로브는 불타 사라지고 모자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다시 마법을 발하려던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샌가 배후에서도 기척이 느껴진다. 하나… 아니, 둘. 앞의 두 얼간이까지 넷.

마력을 느끼고 모여들었다기엔 너무 빠르다. 짐작가는 건 있다. 홍유리는 로브가 불타 모습을 드러낸 괴인을 보곤 한숨 쉬었다. 감지를 사용하더니 통신도 할 수 있나본데…… 아마 지원이라도 요청한 모양.

마찬가지로 감지를 펼쳤을 땐 이단의 탕아, 그 간부들이 자신에게 모여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늑대는 기꺼이 응했다. 그도 자신도 알고 있다. 이 넓디넓은 환계에서 서로를 막을 수 있는 건 달리 없다는 것을.

자색의 흑호를 막지 못하면 환수들은 몰살당한다. 그 끝에 환계가 붕괴할지도 모르고 그 영향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놈을 막을 수 있다면 재앙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과 마찬가지. 여왕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그 산의 앞까지 순식간에 달린 늑대는 잠깐 뒤돌아봤다. 오는 동안 페리의 빛가루로 백록의 상처는 다소 회복했으니 목숨에 지장은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흑호는 백록을 죽이지 못한 게 아니라 죽이지 않은 거였다. 오직 자신을 부르기 위해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가 갈렸다.

환수들을 학살한 거로도 모자라 백록을 건드렸다는 건 알고 있다는 거니까. 백록과 자신이 쌓아온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 자신을 부르게끔 했다. 환계를 쥐고 흔들었다.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뀨우우…"

걱정하는 페리와 백록의 시선을 뒤로 하고 늑대는 산천초목을 올랐다. 수십 년간 놈의 영역이었던 산맥 전체가 우거진 숲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페리와 백록을 포함해 누구도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싸움의 여파만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현계가 아닌 환계에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높은 산에서 검은 호랑이의 부름이 들려온다. 낮게 우는 소리가 얼른 올라오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한 늑대는 날듯이 뛰어올라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렸다.

―――놈이 있었다.

폭포가 흐르는 곳. 우거진 숲속에서 보라색 안개가 피어오른다. 아니, 그건 안개라기보다는 마치 구름처럼 보였다.

깊은 상처처럼 각인된 보라색 줄무늬로부터 자운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온다. 바위 위에 올린 발을 시작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자색의 흑호. 원작에서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검은 호랑이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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