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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1화 (221/407)

〈 221화 〉 #93 자색의 흑호 (2)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고하는 낮은 음색의 울음. 사지가 굳고 절로 몸이 뻣뻣해진다. 역병 그리고 질병과는 다른, 단순한 짐승으로서 살의를 내비치는 게 아니었다.

그 본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듯, 흉포하게 빛나는 자색 눈동자는 분명한 이지를 담고 있다.

곧, 산군의 호령과도 같은 검은 호랑이의 말이 들려왔다.

"물러나라."

다름 아닌 이곳, 환계의 말로써.

"그럼 살려주마."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살의는 없다. 늑대는 말없이 자세를 낮췄고 그러자 그것보다 더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내비치며 검은 호랑이가 으르렁거렸다.

넓게 퍼진 자운이 출렁인다. 여기에 와서 늑대는 확신했다. 놈이 자신을 부른 건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자신에게 맞설 것인지 아닌지.

늑대는 이를 드러냈고, 호랑이는 으르렁거렸다.

"―――!"

서로에게 물러날 기미는 없다.

울부짖는 두 괴물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은 외길, 서로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기에.

***

늑대의 갈기가 촉수로 변해 길게 뻗어졌다. 그 끝에서부터 불똥이 튀고 이내 다시 한번 검게 물들어갔다. 겁화를 두른 촉수로 하여금 진득하리만치 내려앉은 자운을 불태워갔다.

반대로 자운 또한 겁화를 덮는다. 심지어 겁화가 불태우는 것보다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기실, 자운은 늑대의 겁화보다 높은 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실체를 꿰뚫는 늑대의 혜견으로조차 온전히 엿볼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흑린에게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여왕에게는 정신을 잃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만상의 주인에 이르러서는 그 정신마저 어긋나 일그러질 뻔했으니.

하지만 놈은 다르다.

엿보기 힘들 뿐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닿을 수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언젠가 백록이 했던 말. 자신과 놈이 비슷하다―― 늑대는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업을 두른 것처럼 놈 또한 업을 두르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와서 어떤 의문이 뒤늦게 풀려나갔다.

밀려나는 겁화. 몰려드는 자운. 그 속에서 늑대는 자신에게 공허를 두르고 도약했다. 뛰어오르는 늑대를 상대로 마치 거목처럼 두꺼운 다리가 맥동한다.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앞발을 휘두르자, 공간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마치 대기 그 자체가 벽이 되어 자신을 밀어내는 느낌에 늑대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그 위로 올라탔다. 마력을 끌어내 저항하자 흑호의 포효가 쩌렁쩌렁 울리며 발판을 모조리 깨부쉈다.

"―――!"

눈을 부릅뜬 늑대는 지면에 착지하며 새삼 흑호의 강함을 실감했다. 허나 그때만큼의 차이는 아니다. 화산각룡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질병에게 쫓겼을 때처럼 압도적이지는 않다.

흑호가 그들보다 약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강해져 그 차이를 좁힌 거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다.

힘을 보였음에도 되레 투지를 드러내자 흑호는 눈 사이를 좁혔다. 격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을 텐데 놈에게 있어 이 가짜 세계가 제법 중하다는 것이리라.

결국, 흑호는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

같은 높이에 서자 되려 검은 호랑이의 강함을 실감하게 됐다. 본능을 깨닫고 진화한 이후 마냥 놀고 있던 건 아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그러나 여태 그러했듯 높아진 격은 그걸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몬스터로는 경험치도 주지 않았으니. 놈을 추월하지 못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장의 곡선은 어쩔 도리도 없이 더뎌지고 말았다. 시스템조차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이나.

당연하다. 이미 통제를 벗어나 있었으니까.

그건 정해진 길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갈 길을 선택하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운을 두른 흑호――― 자색의 흑호라는 이름을 가진 미지의 재앙.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다. 물러나라는 말에 응하지 않았으니 결국 살아남는 건 둘 중 하나. 늑대는 아지랑이를 불러일으켰다.

겁화는 밀렸으나 공허는 밀리지 않는다. 자색 구름과 아지랑이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흑호가 다가온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당장에라도 도약할 것처럼 팽팽해지더니, 질주하기 시작한다.

서로 간의 거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척까지 다가온 흑호는 뒷발로 자신을 지탱하고 상체를 일으키듯 앞발을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측면으로 빠진 늑대는 발판을 만들어 뛰어올랐고, 헤아릴 수 없는 힘에 바위산 위에서 흘러내리던 폭포가 멎었다. 지면이 꺼지고 산의 고도가 낮아진 듯한 착각이 든다. 포효하며 쫓아오는 흑호는 늑대의 뒤를 따라 일어난 검은 불꽃을 물어뜯었다.

아니, 입안에 자운을 삼키고 있었다. 검은 불꽃이 사라지자 늑대는 그림자를 일으켰으나 흑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은 가죽은, 그림자에 꿰뚫리지 않았다. 생채기나 찰과상처럼 긁힌 정도로 무마되고 만다.

심지어 그 상처조차 늑대의 눈이 아니라면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빠르게 재생해 사라진다. ――잔재주에 의미는 없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건 분명 만상의 주인이 그랬듯이 수많은 세계를 넘어 오롯했던 존재일 테니.

그걸 놈이 환계의 말을 뱉었던 순간, 깨달았다.

다시 뒤쫓아오는 흑호. 늑대는 그에 맞서 발판을 밟고 회전했다. 탄력으로 한층 가속된 움직임으로 달라붙어 단숨에 흑호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그러자 느껴진 것은 마치 질긴 고무를 씹은 것만 같은 착각. 그림자가 통하지 않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한계까지 압축된 근육 섬유의 밀도가 격이 다르다. 아니, 이건 근육 같은 게 아니라……!

섬뜩한 자색 눈이 빛을 발한다. 고작 이거냐고 묻는 듯한 눈. 거대한 앞발이 짓쳐들어오자 늑대는 바람을 터뜨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결과― 공간이 송두리째 밀려나 늑대는 지면에 처박혔다. 으르렁거리며 뒤쫓아오는 흑호를 보곤 그림자 아래로 숨어들어 피했다.

피했지만, 지면이 깨부숴지며 늑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충격은 줄였으나 공간을 밀어내는 힘에 밀려 엉망이 됐다. 재생하고 있지만, 시신경이 끊어졌는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시각 스킬을 이어붙여 다시 앞을 보았을 땐, 놈이 자신의 앞에 오롯이 서 있었다.

처음과 변하지 않은 모습. 여전한 위용으로 흑호가 소리쳐온다.

"정녕 거짓을 위해 죽겠느냐―――!"

최후통첩.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에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거짓?

늑대는 실소했다.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이란 말인가. 아직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현계를 투영한 세계. 거짓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환수들은 살아있고 환계는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일 뿐.

여왕이 만든 세계이자 백록과 페리의 고향.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 이 모든 건 진짜였다. 고려할 가치 없는 말에 늑대는 다시 아지랑이를 불러일으켰다.

흑호의 날카로운 발톱이 지면을 으스러뜨릴 듯 파고들었다. 이제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는 듯, 호랑이의 발이 지면에 내리 찍히더니 바닥을 부수고 파고들었다.

꿈틀거리는 규격 외의 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 발판을 밟고 도약한 늑대는 산이 들썩이는 걸 보았다. 이 산을 뿌리째 들어내려는 미증유의 힘.

이제까진 자비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듯한 상상조차 할수 없는 거력. 산을 뽑아낸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늑대가 막으려 달려드는 것보다 좀 더 빠르게.

바닥과 천장이 반전됐다.

***

몰려드는 간부들에 홍유리는 혀를 찼다. 둘까지는 처리할 자신이 있었는데 넷은 장담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그러고도 더 오고 있다는 점.

아니, 시발. 무슨 바퀴벌레 새끼들도 아니고 명색이 간부라는 새끼들이 뭐 이리 바글바글해? 어디서 자꾸 기어 나오고 지랄이지?

일단, 저 아공간 쓰는 새끼부터 처리해야 뭐가 될 것 같은데… 마법을 쓸 때마다 집어삼키면 거슬리니까.

홍유리는 빠르게 주문을 외며 수인을 맺었다. 높은 곳에 떠 있는 홍유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간부들은 무너지지 않은 건물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귀찮게…'

마법사라면 늘 느끼는 거겠지만 어디 있어도 장소에 제약을 받는다. 마법이란 힘은 너무 크고 강렬했으니.

물론 이제 대피는 다 끝난 것 같지만, 대피소에 있다고 안전한 건 아니니까. 대마법까지 갈 것도 없이 4절 이상만 써도 난리가 날 테고…

건물을 뜯어낸 것처럼 파편이 날아오자 홍유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뒤로 손만 뻗어 막아냈다. 붉은 마력이 퍼져 있는 일대 전부가 자신의 영역이나 다름없었으니.

붉게 타오른 파편이 재가 되어 우수수 떨어진다. 어느새 건물을 올라 자신에게 뛰어오르려는 두 간부를 향해 홍유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Iată moartea ta."

가볍게 뱉은 영창. 주문의 말이 구현되자 새하얀 폭발이 일어난다. 백소율에게 알려줬던 그녀의 마법. 다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Multiplex!"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해 터지고 또 터진다. 3절 영창의 다중화. 간부는 아공간을 열었지만, 사방팔방의 폭발을 전부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기우뚱, 건물이 기울어진다. 철골마저 녹아내리고 피가 튀기도 전에 증발해 사라지는 고온. 완전히 익은 고깃덩이가 잿더미로 변해 떨어지자 홍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공간을 쓰던 놈이랑 통신하던 놈까지 다 잡으려했는데 한 놈밖에 못 잡았으니까. 통신하던 놈이 몸을 바쳐 지켜냈다. 참 우애도 깊으셔라. 같이 뒤졌으면 좋았을 텐데…

"……."

서울이면 안방이나 다름없는데 수적 열세에 몰린다는 것도 짜증 나고, 서울이라서 마법에 제한받는 것도 열 받는다. 테헤란이나 환계였다면 이딴 고민도 안하고 시원하게 대마법이라도 쏴 갈겼을 텐데.

촉수가, 파편이, 마력이, 마법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나 홍유리는 자신의 마력으로 찍어눌렀다. 영창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질척거리는 공격은 전부 불타 사그라진다.

이미 살덩이들이 꾸물거리느라 도시는 반파된 거나 마찬가지. 근데 발목이 잡혀 있다. 인명피해는 최소 수천에서 어쩌면 수만에 이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불바다가 된 서울은 붕괴한 거나 마찬가지. 재건하려면 얼마나 더 돈과 시간이 필요할지 장담할 수 없다.

진짜 개 같네.

심지어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이 끊이질 않는다. 지하에선 뭐가 잘못됐는지 물이 거꾸로 솟아오른다. 아주 난장판이 된 도시를 보고 홍유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간부라는 것들이 바글바글 몰려오지만… 정말 수준 높은 놈은 없다. 어지간한 A클래스 헌터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수준.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더 몰려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조금만 더 해보고 정 안될 것 같으면 빠지면 그만이겠지만……

불바다가 된 도시에서 무언가 불타고 있는 걸 본 홍유리의 눈이 거꾸로 뒤집혔다.

"이……!"

그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집이었으니까.

***

탕아들의 침공이 거짓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불바다가 된 서울을 본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기둥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져 까만 연기가 도시 높이 피어올라 시야를 가릴 정도. 제대로 착륙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도착 10분 전."

알리는 말에 헌터들은 무장을 정비했다. 비행하는 동안 휴식을 취한 이들은 몸을 풀고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하연. 불은 끌 수 있나?"

그 중간에 강태준이 묻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끌 수는 있어도 더 악화될 거예요."

"……."

"그리고 도시 전부는 아무래도…"

자신 없다는 듯 말을 흐리는 것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보고 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곳을.

***

투구가 부서졌지만, 그마저 창염에 휩싸이더니 금세 재생하고 만다. 체력이 남아 있었다면 머리를 통째로 쪼갤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런 여력은 없다. 반 토막 난 검에 밀려난 강태호는 비틀거리다 겨우 자세를 잡았다. 검만 부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전에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마를 쓸자 흥건한 땀이 손목까지 적신다.

굳이 불리한 쪽을 따진다면 자신이리라.

"시벌."

체력만 문제가 아니라 이곳저곳이 정상이 아니다. 특히 어깨가 뻐근하다. 아마 휘두르다가 빠진 모양인데… 제대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억지로 비집어 넣었다. 삐걱거리고 있지만 몇 번 휘두를 정도는 되리라.

'…….'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귀 원령들의 속삭임도 심해져 있다. 대체 이딴 것들을 어디서 주워들고 와서 달고 다니는 건지 의문이다. 이미 마력을 터뜨려 몇 번 걷어냈건만 갑옷에 닿기만 해도 자꾸 타고 넘어오니까.

"이제 끝내자꾸나."

반 토막 난 칼날 대신 피어오른 창염이 대기를 얼어붙게 해 검의 궤적마다 얼음 알갱이가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강태호는 어깨를 빙빙 돌렸다.

뒤져도 어련히 장례는 치러주지 않겠나 생각하면서.

끝을 볼 때가 됐다고 여긴 강태호는 남은 마력을 전부 긁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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