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 #93 자색의 흑호 (3)
뒤집힌 세계. 중력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산이 하늘 위에 떠 있다는 모순. 스퀘어의 부유섬과는 다르다. 마력으로 띄워 올린 게 아니라 무식한 힘으로 뿌리째 들어 올려 던진 거였으니까.
따라서, 추락하기 마련.
거대한 운석과도 비할 수 있는 질량. 백록은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산맥을 덮는 산의 그림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송두리째 뽑혀 떨어지는 비현실적인 광경. 그걸 가능케 하는 건 형언할 수 없는 힘이다. 그것이 바로 불합리한 존재, 자색의 흑호. 인류가 대적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환계의 생물들이 여왕의 비호 아래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백록은 기억하고 있다. 어스 서펜트가 지상으로 추락했을 때의 파괴를.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한 그 커다란 충격을.
그렇다면, 아예 산 하나가 통째로 떨어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백록은 페리를 데리고 빠르게 환계를 벗어났다. 아니, 환계의 모든 생물이 환계를 떠나 현계로 이동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
바닥과 천장이 뒤집혔다――― 그 말은 과장도 뭣도 아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밟고 서 있었던 산을 뽑아 던짐에 따라 늑대는 떨어지는 산에 서 있게 됐으니까.
아무리 공허가 있다지만 이 충격을 전부 흡수할 수 있을 리 없다. 즉사하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한다.
산을 뿌리째 뽑아내고도 힘이 남았는지 악착같이 달려드는 검은 호랑이. 추락하는 산의 그림자 아래에서 최대한으로 폭풍을 일으켰다. 바람을 두르고 탄력을 발해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야만 한다. 충돌의 충격을 피할 수 있도록……!
"―――!"
그림자보다 더 짙은 흑호가 바짝 뒤를 쫓아오고 있다. 이젠 확실한 살기가 담긴 눈이 자신을 찢어발기겠노라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다.
그림자에 가려있지만, 놈의 자색 줄무늬만큼은 똑똑히 보이고 있다.
거리가 좁혀진다. 역시 힘뿐만 아니라 속도와 모든 신체 능력에 있어 자신보다 월등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단 뜻이니까. 즉, 몇 번이고 세계를 넘나들었을 터. 그 수많은 세월이 자색의 흑호를 범접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었다. 그를 추월한다는 게 더 얼토당토않은 소리일 터.
다만, 그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놈을 추월하는 게 아니라 쓰러뜨리는 거니까.
그렇게, 산이 떨어져 내렸다.
***
화르르- 빠드득―!
집이 불타는 소리가 이빨이 갈려 나가는 소리에 묻혔다.
저걸 무슨 맘으로 샀는데… 저게 어떤 집인데……!
날아오는 총알을 꼬리로 쳐내고 화살을 집어 반대로 쏘아낸다. 돌아온 화살을 아공간으로 먹어 치운다.
화살, 마법, 마력 온갖 것들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홍유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게 됐다.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떠드는 말도 도시의 풍경도 전부 다.
대신, 냄비라도 된 것처럼 부글부글 용혈이 끓어오른다.
"―――Se înroșesc."
최초의 영창은 '붉게 물들라' 고하는 말.
그에 따라 마력은 검정에 가까운 붉은 색으로 변해간다.
"대마법이다!"
그것이 대마법의 첫 소절임을 눈치챈 간부가 황급히 소리쳤다. 어느새 모여든 숫자만 일곱. 침공한 간부의 절반이 모인 셈이다.
문제는 그러고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꼬리가 수십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 간부 셋이서 광휘를 쓰러뜨렸으니까.
홍유리가 광휘보다 월등히 강하다거나 여기 모인 간부들의 수준이 미끼로 쓰였던 간부보다 낮은 게 아니다.
그저 상성이 좋고 무작정 달리고 있을뿐.
기실, 이 자리에 모인 간부 중 한 번의 공격이 강한 타입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중에 뜬 그녀에게는 닿지 않는다.
어지간한 공격은 붉은 마력이 전부 태워버리기에 그리고 가까스로 닿았다 한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기는 했다.
바로 고삐를 놓아버리는 것.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력을 남용해 어떻게든 출력을 높인다.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게 뻔하지만, 홍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전에 죄다 죽여버릴 테니까.
"Puterea cuvintelor mele Acoperă lumea."
두 번째 영창.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에 느껴봤던 감각이 예민해지고 이곳저곳이 달라지는 기분. 손톱이 길게 자라나고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날개가 길어지고 비늘이 더 많아지는 듯한.
물론 착각이겠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짜 드래곤처럼 돼 있을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은 들었다.
검붉은 마력에 온갖 것들이 녹아내리고, 홍유리는 작은 현기증을 느꼈다. 실시간으로 마력이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탈진해가는 기분――
"prin urmare, Ceea ce vreau este devenit realitate."
세 번째 영창이 내뱉어지자 간부는 이를 갈았다. 마력에 대한 지배권마저 넘어가 제대로 마력을 쓸 수조차 없게 됐다. 일대가 이미 그녀의 영역이다.
…정말 제정신인가? 이 도시 한복판에서 대마법을 구현하겠다고? 물론 자신들도 죽겠지만 대피소나 지하 벙커에 숨어든 시민들도 모조리 죽는다.
몰살. 오직 그녀 혼자만 살아남게 되리라.
간부는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 주문을 외고 보류하려는 속셈이라고. 자신들이 이탈하게끔 만들려는 허세에 불과하다고.
마법사인 그녀가 설마하니 거기까지 이성을 잃었을 리 없다――― 그게 오산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영창은 끊어지지 않는다.
"Acoperit în foc negru."
기어이 내뱉어지는 네 번째 영창의 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보았을 때, 이미 그 눈에 망설임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상공에 마법진이 떠오른다. 아연해 하는 간부들은 그게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Arzând…"
기어이 그 입술이 달싹인다. 대기와 공명하듯 최후의 영창의 첫 소절이 뱉어지자 간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시작했지만, 어느새 검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마치 세계가 단절된 듯하다. 아연하게 검은 벽을 매만지던 그들은 뒤늦게 이상을 깨달았다.
도시는 있으나, 불타진 않는다. 대신 먼 곳에서 산이 들려져 있었다.
……들려져 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산이 떨어지고 있었다. 검붉은 마력에 가려져 몰랐으나 처음 보는 생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들린 순간, 자신들의 몸 곳곳에 작은 용들이 붙어있음을 알게 됐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고 넋을 잃어버렸다.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싹 다 뒤져! 이 씹새끼들아―!"
대마법을 완창함에 따라 흑점이 폭발해 도시를 완파시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듯 떠올라있던 산이 마침내 추락했다.
마력을 다해 정신을 잃기 직전, 홍유리의 귓가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폭음이나 굉음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게끔 모든 게 흙먼지로 가려졌다. 일대의 생물은 모두 현계로 도망친 뒤였지만, 두 괴물만은 환계에 버젓이 남아 있었다.
늑대를 뒤쫓아 기어이 따라잡은 흑호가 단숨에 짓밟았고 기다란 발판 위에서 서로 구르며 엎치락뒤치락 실랑이를 이어갔다. 힘에서 이길 리 없는 늑대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으나, 흑호는 끈질기게 붙잡아 늑대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것마저 공중에선 불가능했으니.
서로가 물어뜯고 쳐내는 싸움에서 엉망이 돼 가는 건 늑대. 맞붙어 이길 턱이 없다.
산의 추락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대지의 파편이 아지랑이에 삼켜지는 와중에 자운과 공허만은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은 발.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튼 순간, 거목과도 같은 다리가 늑대의 머리 옆을 스쳤다. 지탱하던 마력의 발판을 거둬들임에 따라 힘을 주체하지 못해 떨어지는 흑호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다시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여전히 고무 뭉치를 씹은 것 같은 이물감. 그러나 이번엔 결과가 다르다. 늑대의 송곳니를 시작으로 이빨이 깊게 박혀 들었으니까.
그걸 가능케 한 것은 마정. 진화하며 새로이 얻은 스킬 덕분이었다. 대마력의 상위호환인 스킬. 부족한 스테이터스를 마력으로 강화해 어떻게든 충당하고 잠식으로 빼앗은 흑호의 마력까지 더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뒤지더라도 마력만은 앞서고 있다.
"―――!"
포효하며 공중에서 몸을 뒤집은 흑호의 앞발이 대기를 밀어낸다. 공간이 밀리는 듯한 압도적인 힘에 늑대는 저항하지 않았다.
검은 호랑이가 가진 힘은 늑대가 여태 싸워온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것. 저거노트, 화산각룡, 역병과 질병마저 아득히 넘어서 있다. 단 한 번의 직격이 분명 자신을 사망에 이르게 하리라.
공중에서 옆으로 날려진 늑대의 이빨과 눈알이 옆으로 뽑혀 나갔다. 직격당한 게 아니라 대기에 밀려 떨어져 나갔을 뿐임에도.
흙먼지가 치솟으며 추락한 흑호가 저 아래서 보라색 눈동자를 번뜩인다. 목덜미에서 흐르는 피는 별로 대단한 상처는 아니나 그 사실 자체가 불쾌하단 것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육신에 제한받지 않는 서로에게 어지간한 부상은 입으나 마나 한 것.
늑대는 생각했다. 역시 공허나 겁화가 아니라면 놈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
아무도 없는 도시 한복판에서 백소율은 마력을 뽑아내 그걸 무기라도 되는 양 쥐고선 계속해 찔러댔다. 재생하는 간부는 쉽게 죽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균형이 맞는다.
자신의 것이 아닌 살과 피가 난자한다. 불로 태우고 헤집어도 쉽게 죽지 않는 간부. 벌써 몇 분째 실랑이를 이어오고 있다.
어깨가 빠질 것만 같다. 감마는 색색 숨을 몰아쉬며 진작 쓰러져있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랬다가 뒤쫓아오면 그때는 정말로 끝.
이렇게 억지로나마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다.
딱 한 번만 더 주문을 욀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도 마력도 없다. 체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간부가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라져 간다.
다리만 남았던 몸뚱이는 어느새 허리까지 재생해있다.
지금 도망치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5분? 10분? 아니, 1분도 못 가리라.
그냥 차라리 환계로 도망칠 걸 그랬나 후회하던 중 이미 어깨높이까지 재생해있었다. 백소율은 어느샌가 자신이 마력을 두르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목까지 살덩이가 뭉치는 걸 보며 이젠 도저히 늦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많은 수의 마력탄이 간부를 꿰뚫었다.
순식간에 벌집이 된 간부를 멍하니 바라보던 백소율은 어느샌가 자신을 끌어당긴 피 칠갑을 한 사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사슴의 등에 먼저 타고 있는 쓰러진 홍유리를.
***
아이러니하게도 도시가 망가진 덕분에 착륙하는 게 편했다. 치누크가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여명이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도착한 서울은 이제 도시라기보단 폐허에 가까웠다.
"바로 이동한다. 이견 있나?"
강태준의 물음에 전원이 고개를 저었다. 미리 편성해 둔 조로 나뉘어 흩어지는 가운데, 그들보다 빠르게 자색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신이 가세하지 않아도 전국의 클랜이 모여든 이상 서울의 소란은 곧 잦아들 터.
서울 바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강태준을 살덩이와 벌집이 된 의문의 괴인이 가로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지나친 순간, 살덩이와 괴인은 순식간에 해체돼 조각조각 나뉘었다.
어느샌가 손에 들려있는 건 평소 쓰던 검이 아닌 붉게 달구어진 듯한 검. 강태호의 것과 마찬가지로 각룡의 뿔을 제련하고 담금질한 귀품이었다.
살덩이는 무너지더라도 괴인은 고작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검에 스며들었던 마력이 재생을 막고 나눠진 괴인을 수십 갈래로 난도질했으니까. 이른바 참격 속에 또 다른 참격을 담은 셈.
괴인은 그렇게 쓰러졌고, 강태준은 서울을 벗어나 강훈과 강태호가 싸우고 있을 전장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