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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3화 (223/407)

〈 223화 〉 #93 자색의 흑호 (4)

물어뜯고, 쳐내고, 짓밟고 쓰러뜨려도 마주 보는 붉은 눈에 두려움이란 없다. 아니, 일격으로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하게 한 것부터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마랑의 힘이고 능력이다.

그렇다 한들 힘의 차이는 보여주었을 텐데 여전히 송곳니를 드러내고 포기하지 않는 마랑의 모습을 검은 호랑이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가― 고작 이깟 모조품에. 없는 것만도 못한 모방한 가짜 세계에 정말로 그런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무지는 죄가 아니다. 한낱 미물에서부터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검은 호랑이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깟 모조품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검은 호랑이는 낮은 음색으로 굳이 얄궂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밉다. 이 세계가 증오스럽다. 그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조품들이. 그분을 영락하게 만드는 이 가짜 세계가.

영물 혹은 환수라 불리우는 같잖은 것들도 마찬가지. 그래. 그것들만 사라진다면 그분이 쇠약해질 일은 없으리라. 정수를 모조리 먹어치우면 그분도 포기하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몇 번의 멸망과 종말을 지켜봐 왔다.

그것들은 나약하고 어리석고 덧없다. 힘없고 연약하며 여리다. 매번 종말이 찾아오면 그것들은 피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 그분은 이 세계를 새로이 탄생시켰다. 그건 그만큼 힘을 쓰고 영락함을 뜻했다.

……어째서? 결국 없어질 거란 걸 알면서 그분은 대체 어째서? 고작 이깟 것들에게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가?

처음에는 그분에게 뜻이 있으리라 여기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종말이 찾아오면 늘 그분은 슬픔에 잠겨 미물들의 정수를 거두었다. 슬픔이 가시고 다음 세계로 가시면, 늘 기억을 더듬어 정수로 다시 영물과 환수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생각했다.

그냥 없애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그들이 지닌 정수를 수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굴레가 끝이 나리라. 그분이 해방되리라.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흑호는 영물과 환수라 불리는 모조품들을 집어삼켜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분이 자신을 막았다.

검은 호랑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기억 속의 그곳을 어렴풋이 따라했을 뿐인 덧씌워진 가짜 세계와, 그들의 정수로 하여금 여왕께서 만들어낸 영물과 환수라는 버러지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진짜가 아닌 가짜. 진실이 아닌 거짓. 결국 환계라는 이름 그대로 환상에 불과한 모조품일 뿐인데.

그분이 쇠락하고 영락하면서까지 이 세계를 지키고 유지하고 몇 번이나 다시 만들 이유가, 그럴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흑호는 기꺼이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여왕은 자신이 막을 테니 얼마든지 날뛰어보라고. 환계를 무너뜨려도 좋다고. 대신 마랑을 죽이지는 말라고.

"……대답해라."

저 너머의 검은 장막, 환상이 벗겨진 붕괴한 세계를 보며 흑호는 마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 어떤 진실이 있더라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환계를 지키고, 재앙을 쓰러뜨린다. 처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검은 장막 안에서 무슨 일이 있건 간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다.

늑대로부터 일어난 아지랑이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여명이 도착하고 전국 각지의 클랜들이 몰려들자 도시를 침공했던 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마 승산이 없다 여긴 것일 터.

챡- 얇은 세검을 튕기자 바닥에 피가 흩뿌려진다. 코트 안쪽에 납검한 구진하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한쪽 팔이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불편한 거였나. 이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정리했을 텐데 고작 꼬리 몇에 이렇게까지 고전해야 한다는 게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등 뒤에서 감탄과 칭송의 말이 들려오는 걸 구진하는 애써 못 들은 체 하고 생각을 전환했다.

잃어버린 팔은 대체 언제쯤 회복할 수 있을는지. 그때, 조금 더 신중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나저나, 놈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 적은 없었을 텐데. 강훈까지 생각하고서도 과연 이게 놈들의 전력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침공할 이유가 있었을까.

아무리 봐도 성급했던 것 같아 의문이 남는다.

……그래도 이젠 괜찮으리라. 설령 전력이 아니었다 한들 서울의 소란은 곧 잦아들 테니. 구진하는 대피소의 가장 앞자리, 입구에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

붉은 대검을 들고 걸어오는 갑주의 괴인―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를 보고 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대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늦었구나."

"죽였나?"

답하는 대신, 보란 듯이 붉은 대검을 흔들어 보인다. 그게 대답이었기에 강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더구나. 자랑스러웠다."

고저 없는 목소리. 담담한 말에 강태준은 잠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서진 투구와 격전의 흔적. 느껴지는 남은 마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 그만큼 분전한 것이리라.

아주 잠깐 후회와 안타까움이 들었지만, 이내 그 감정을 털어냈다.

동생은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럼 뒤는 자신이 맡아 처리해야 할 터. 아주 잠깐의 묵념 끝에 강태준은 검을 들었다.

이 악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

아지랑이 위에 검은 불이 타오르고 있다. 여태까지와는 다소 다른 모습에 흑호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아지랑이와 자운은 동등한 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아지랑이 위에 타오르는 검은 불이 가세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의 열세이리라.

다만, 그 차이는 크지 않으리라.

그 전에 마랑을 쓰러뜨리면 될 일이다.

줄무늬로부터 구름이 새어 나와 흑호를 감쌌다. 일견 신령스레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불길하고 사이하게 느껴지는 색감이었다.

겁 없는 마랑은 이번에도 먼저 달려들었고 흑호는 앞발을 들어올 려 내리찍었다. 기압이 수천 배 상승해 찍어누르는 듯한 압박에 늑대는 폭풍과 마력을 일으켜 저항했다.

"―――!"

긴장을 놓으면 당장 납작하게 찌그러질 것 같아 늑대는 전신에 힘주며 견뎌내야만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충격에 먼지구름이 높게 피어올랐다.

마치 수십 톤의 화약이 단번에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

자세를 낮추며 밀려드는 폭풍과 여파를 견뎌냈으나, 이미 코앞까지 닥친 검은 호랑이의 모습에 늑대는 갈기를 돋웠다.

사자처럼 풍성하고 길게 자라난 갈기는 그 형태를 바꾸어 많은 촉수가 됐다. 단번에 뻗어진 촉수가 흑호를 붙잡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흑호는 이깟 건 아무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단숨에 뛰어올라 한껏 입을 벌렸다.

충격의 여파를 견디기도 쉽지 않다. 물어뜯기면 곧바로 경추가 부러지리라. 흑호에게 붙잡히는 그 짧은 순간이 생사를 가르게 될 터.

한껏 두른 자운이 검은 불에 타오르고 아지랑이에 먹혀간다.

도약한 흑호의 턱이 늑대를 물어뜯는 것보다 빠르게 늑대는 몸을 숙이며 흑호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갈기가 변화한 촉수가 마치 그물처럼 그를 얽맨다.

바닥에 내려앉은 흑호를 금세 빠져나온 늑대가 등 위에 올라타 물어뜯었다. 촉수를 포함해 붙어있는 신체와 이빨이 공허와 잠식을 발하지만, 쉽사리 가죽을 파고들진 못했다.

발톱을 세운 늑대는 보라색 줄무늬를 긁었고 그러자 자운이 새어 나왔고 어느샌가 앞발이 사라져 있었다.

녹이는 것인가, 태우는 것인가, 먹어치우는 것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자운의 정체는 말 그대로 사라지게 하는 것, 소멸.

닿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겁화와 공허와는 결이 다른 힘이었다. 심지어는 거기에 무슨 효과가 있는 건지 재생마저 잘 듣지 않았다. 뼈와 근육이 자라는가 싶으면 엉망으로 풀려나갔으니까.

변이로 만들어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마치 앞발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의식할 때마다 풀려나간다.

하지만 늑대는 절망하지 않았다.

"―――――!"

자신은 앞발이 사라진 데 그쳤지만, 흑호의 전신에 검은 불이 옮겨붙었으니까.

***

백록에게 구해진 백소율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내려 쓰러진 홍유리를 안아 들었다. 실낱같은 마력밖에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마력을 써버려 정신고갈이 찾아온 모양.

늘 당당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백소율은 정신 잃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선생님만 사라져준다면…… 알파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추하고 검은 마음에 흠칫거리고 말았다.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느껴지는 감정이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애증과도 같다. 가만히 잠든 얼굴을 쓸어내리자 그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빤히 보는 백록과 페리의 시선에 감정을 억누른 백소율은 도시를 둘러보았다.

살덩이들은 어느샌가 거의 사라져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아까 싸웠던 괴인은 어떻게 됐을까? ……조금만 더 제대로 했으면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이제 와 새삼 아쉽게 느껴진다.

그렇게 불길과 소란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

서울의 침공은 빠르게 막을 내렸다.

탕아들은 후퇴를 거듭했고 전쟁의 신전과 클랜들은 그들을 추살해갔다. 도시가 비좁다는 듯 꿈틀거리는 살덩이들도 무너지고 쓰러져 금세 모습을 감췄다.

"apa curge constant."

"apă curgătoare nesfârșită."

인디고 스퀘어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자 손바닥에서 물줄기가 뻗어 나와 불을 꺼뜨린다. 인근 지역의 소방서 또한 몰려들어 약제가 포함된 물과 마른 모래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화재가 잦아들기까진 시간이 걸릴 터… 어쩌면 며칠 밤낮이 소요될지도 모른다.

대피소와 벙커에서 나온 시민들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시민들만이 아니라 헌터들까지 마찬가지. 화재를 진압하는 걸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늑대와 흑호의 싸움으로 인해 현계로 도피한 환계의 생물과 요정들을 보고 있는 것.

분명 몬스터일 텐데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기품 있고 우아한, 눈길을 끄는 생명체들.

다만, 그들에게 손대지 못하는 이유는 우아하거나 눈길을 끌어서가 아니라 보호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심이 올라갈 대로 올라간 군과 헌터들이 무기를 겨누기라도 하면 여명의 일원과 은자림이 그 앞을 막아섰다.

다른 이라면 모르나 창선의 제자라는 이름값은 거기서도 톡톡히 발휘된다.

……탕아들의 간부 절반은 쓰러진 홍유리가 몰살했고 살덩이들은 쓰러지고 꼬리와 말단들은 붙잡히거나 추살돼간다.

인류의 승리――― 그렇게 표현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

싸움을 이어가던 늑대는 어떤 흔들림을 느꼈다.

또 산을 들어 올리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작 산이라던가 지형이나 대지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것.

공간, 아니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언젠가 백록이 말했던 것처럼 거울처럼 금이 가고 깨져나가고 있었다.

"시작됐군."

겁화에 등줄기가 새까맣게 타오른 흑호의 말에 늑대는 이 세계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장막 안에선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왕에게 어떤 이상이 생겼기에 일어난 일이리라.

무엇보다도 에메랄드빛 바다가 쏟아져 내리는 게 그 증거다. 높디높은 천장에서 굵은 빛줄기처럼, 혹은 거꾸로 놓인 모래시계처럼.

여왕과 만상의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나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눈앞의 적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불타오른 흑호와 앞발이 사라진 마랑.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두 괴물의 싸움이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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