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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4화 (224/407)

〈 224화 〉 #94 환계 붕괴

재생 능력을 갖춘 적을 쓰러뜨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재생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피해를 주거나 마력을 소모시켜 정신고갈에 빠트리거나.

후자의 방법은 화산각룡에게 써먹어본 적 있다. 마치 바위산과 같은 굳건함을 상대로 물어뜯고 먹어 치우며 마력을 빼앗았던 것.

처음 늑대는 후자의 방법을 노리고 있었다. 정신 고갈을 유도해 쓰러뜨리는 것. 실제로 잠식과 마정에 더불어 마력만큼은 앞서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그래서 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게 오산임을 깨달았다.

털끝에 닿는 빗물의 감촉. 마력을 고갈시키는 것보다 환계가 무너지는 게 더 빠르리라. 설사 놈을 쓰러뜨리더라도 환계의 붕괴가 더 빠르다면 환계뿐만 아니라 현계마저 엉망이 되고 말 테니까.

따라서, 싸움은 속전속결로 끝을 맺어야만 한다.

자색 발톱이 귀 옆을 스친다. 풍압을 막기 위해 마주 폭풍을 일으켰으나 터무니없다. 바닥에 발톱을 박고 수 미터나 미끄러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

밀려난 늑대는 붉은 눈을 빛내며 여전한 투지를 불태웠다. 공허와 겁화를 일으키고 있지만 자운을 밀어내는 게 마냥 쉽지는 않다.

허나, 양상은 뒤바뀌어있다.

항상 쫓아오던 흑호보다 어느샌가 먼저 움직이는 건 자신이 됐으니까. 그래도 놈은 물러나지 않는다. 겁화를 꺼리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어쩌면 별것 아닌 자존심일 수도 있고, 단순히 물러나는 법을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늑대는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놈이 도망쳤다면 이 싸움은 성립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물러나지 않고 맞서준다는 게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질 정도다.

자운을 두른 흑호는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쉽게 달려들진 못했다.

한계치까지 영량을 펼친 늑대로부터 칠흑이 번져나가 장막을 만들었다. 그림자 속에는 흑무 또한 섞여 있다. 마력을 사용해도 자신을 찾는 건 어려우리라.

검은 호랑이는 그 해답을 간단히 만들어냈다. 늑대를 찾는 게 어렵다면 그 전제를 바꾸면 되니까. 늑대를 가리는 그림자와 안개, 칠흑의 장막을 앞발을 들어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하고 꼴사납게 모습을 드러내리라. 하지만 흑호의 예상과는 달리 늑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눈 사이를 좁힌 흑호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일으키며 늑대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진작 바위와 나무가 전부 쓸려나가 평지와 다름없는 일대를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현계로 도망쳤는가?

흑호는 작게 코웃음 쳤다. 순순히 물러났다면 굳이 쫓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였는가 생각하면 다소 가소롭게 느껴지기는 한다.

―――그게 오산이었다.

"……?!"

목덜미에 와닿는 명백한 통증. 무언가가 물어뜯었다. 아니, 물어뜯고 있다. 놓지 않겠다는 듯 두 발로 자신을 지탱하면서.

――두 앞발? 어떻게?

분명 자운에 사라졌을 터. 의문을 가진 흑호가 늑대의 한쪽 발을 보았을 땐, 앞발 대신 갈고리 같은 커다란 발톱을 만들어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 찰거머리 같은 집념에 몸을 흔들어 떨쳐내려던 흑호는 앞발을 휘두르고 머리를 흔들었으나 늑대는 오히려 그 풍압과 바람에 몸을 싣고 흑호의 등 위로 올라탔다.

마정(魔精). 마력을 사용한 모든 행동에 보정받는 대마력의 상위 스킬이자 늑대가 가진 세 번째 A등급 스킬. 거기에 잠식으로 빼앗은 마력까지 더해 늑대의 이빨은 검은 호랑이의 가죽을 꿰뚫었다.

이빨이 비틀리고 또 맞물리며 흑호의 목덜미에 깊은 상흔을 남겨간다. 자운은 공허가 막고 있다. 서로 팽팽히 대립하는 두 힘의 균형을 부수고 검은 불꽃이 타올라 늑대에게서 옮겨붙기 시작한다.

번진 불꽃은 모든 걸 불태우는 겁화.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어떻게든 늑대를 떼어놓기 위해 마력의 폭풍을 터뜨린 흑호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더 높은 격. 자운은 전신에 번진 겁화를 금세 꺼트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늑대가 가진 은신의 마지막 단계, 더 오를 곳 없는 비가시화의 힘이었다. 그림자와 흑무는 날아갔어도 늑대는 이 악물고 풍압을 견뎌냈기 때문에. 흑호가 보지 못했을 뿐, 늑대는 그 자리에 있었던 거다.

비록 기습으로 얻은 우위였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수단방법은 가리지 않는다.

늑대는 다시 흑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잠식이 갉아먹고 있다 한들 상처가 재생하는 게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스테이터스라면 한참을 밀리더라도 스킬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한다.

흑호의 몸부림으로 반쯤 부서진 두개골이 빠르게 재생하는 와중에 늑대는 검은 호랑이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 두 눈이 완연한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다.

자색 구름이 폭사하듯 터져 나와 일대를 덮기 시작했다. 동시에 늑대의 눈에 흑호가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

무식하리만치 휘두르는 대검이 공기를 무겁게 갈랐다. 고개 숙인 강태준은 지면을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려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대검이 지나간 이후엔 그의 시간.

투구의 눈구멍. 관절의 틈새. 갑주 사이사이를 용서 없이 꿰뚫는 검의 궤적에 따라 강훈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어떻게든 손을 뻗어 닿으려 했지만, 악귀 원령의 존재를 이미 들어 알고 있기에 당하지 않는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서로의 실력은 거의 비슷했지만, 대검이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는 것과 강태호와의 싸움으로 마력을 상당량 소모했기 때문에.

그런 페널티를 가지고 있으니 이길 턱이 없다.

강훈이라고 그걸 모를 리 없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그는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에게 틈이 있는 걸지도 모르고 동귀어진을 노리는 걸지도 모른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강태준은 강훈을 압박해나갔다.

그즈음, 많은 기척들이 움직이는 걸 두 사람 모두 느꼈다.

탕아들은 후퇴하고 각 클랜이 추살하고 있다. 문득 강훈이 아쉽다는 듯 토로했다.

"여기까지겠구나."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명백했기에 강태준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오산이라는 듯, 강훈은 검을 휘둘렀고.

"……!"

강태준은 그가 계속 노리고 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창염이 파도처럼 높게 일어나 덮쳐오자 마력을 일으켜 꿰뚫어냈다. 얼음 파편과 알맹이가 밤중에도 빛나며 조각조각 흩어진다.

―창염을 사용하는 건 강훈이 가지고 있던 검의 능력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고를 유도하기 위해 수세에 몰리면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것… 그 집념에 혀를 내둘렀다.

시야가 다시 열렸을 때 그 너머, 강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강태준은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놓칠 줄 알고."

***

머리가 지끈거린다. 징징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워.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데 그럴 기력이 없다.

힘겹게나마 눈을 뜬 홍유리에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등이었다. 마력이 고갈돼 쓰러졌을 뿐이기에 마지막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을 죄다 조져버린 건 똑똑히 기억난다. …환수들의 도움으로 대마법을 사용해 환계에서 박멸할 수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기억나는데……

"일어나셨어요?"

묻는 말에 고개만 돌린 홍유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소율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얘가 왜 날 올려다보고 있나 싶었을 땐 자신이 백록의 등 위에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1시간도 안 걸리셨어요. 빨리 일어나셨네요."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백소율의 너머로 보인 건 꺼지지 않은 불과 진압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소방차까지 몰려온 걸 보면 소동은 가라앉은 모양…

"탕아들을 쫓고 있대요."

"……."

지금이라도 가세해야 하나 싶었지만 기절한 동안 차오른 마력은 가까스로 정신을 잃지 않는 게 고작인 양. 이걸로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다시 백록의 등 위에 몸을 뉜 홍유리는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에 환계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산을 뿌리째 들어 올린 눈을 의심케 하는 싸움. 그런 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게 자색의 흑호. 상식을 가볍게 박살 내는 괴물이자 쓰러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재앙의 진실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괴물과 알파가 싸우고 있다는 것. 진화한 이후의 알파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막연히 상상하던 걸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길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차라리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러던 홍유리는 마지막에 본 광경을 떠올리고 눈을 부릅떴다.

흔들리던 환계와 세계의 끝을 보여주는 듯하던 검은 장막. 거기에 환수들까지 현계로 온 거라면…… 분명 어떤 이변이 일어났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도와야, 도와야 한다. 홍유리는 백록의 털을 쥐어뜯듯이 잡고 몸을 일으켰다. 횡설수설,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추측을 마구 늘어놓으며 환계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백록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네."

"뭐? 왜?! 일단 시도라도 해봐야…"

소리치는 홍유리의 말을 끊고 백록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걸세."

"……."

"이미 환수들은 환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네."

잠깐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백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

거대해진 흑호. 그건 허세도 뭣도 아니다. 힘의 차이는 있어도 격은 동등하다. 서로가 정신체. 육신의 틀에 제한받지 않는 이상 크기를 부풀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흑호가 그랬던 것처럼 늑대의 크기 또한 부풀어갔다. 같은 정신체이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균열과 흔들림은 심해지고 붕괴는 빨라진다. 세계가 무너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 거대해진 두 괴물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

가장 먼저 늑대를 위협한 것은 역시 이번에도 앞발. 풍압이 닿지 않을 정도로 옆으로 크게 피한 늑대가 곧장 달려들었고 자운과 공허가 먼저 부딪쳤다.

이미 몇 번이나 봐왔기에 흑호 또한 늑대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한껏 벌린 입이 다가오자 늑대는 보고도 목덜미를 내줘야만 했다.

흑호는 간단하게 이빨로 끊었으나, 곧 그게 착각임을 알게 됐다. 자신이 물어뜯은 건 목덜미가 아니라 길고 풍성한 갈기가 촉수로 변한 것이었으니.

입 안 가득히 들어온 촉수. 한껏 입을 벌려봐야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흑호를 밀어붙였다.

발아래서 우지끈 나뭇조각들이 부서진다. 흑호의 앞발이 들려 내리 찍으려 하면 위로 뛰고, 턱이 벌려지면 옆으로 빠져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늑대는 흑호를 유린해갔다.

정면에선 이길 수 없기에 흑호의 측면을 점해야만 한다.

흑호는 분명 늑대보다 빠르고 강하다. 동등한 정신체이나 늑대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럼 어째서 시종일관 밀리고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그 강함 때문에. 태생이 산의 왕으로 태어나 힘을 축적한 흑호는 늘 강자였기 때문에. 늘 학살과 일방적인 싸움을 이어간 흑호에겐 사선을 넘은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역량은 늑대보다 훨씬 높고 지성 또한 있다. 하지만 문제는 기량에 있어 늑대가 몇 수나 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 매 공방에서 뒤처지고 손해 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늑대는 셀 수도 없이 사냥해왔다. 지성이 있어도 흑호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낮은 승산을 기어코 뚫어내는 집념. 그것이야말로 늑대가 가진 가장 큰 장점. 날카로운 송곳니로부터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고 넘어온다.

안쪽부터 타는 듯한 고통에 흑호는 거세게 몸부림쳤고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익숙해진 오히려 늑대는 그 기세를 이용했다. 마치 아슬아슬한 로데오를 보는 듯한 기예. 뿜어나오는 자운은 공허를 뚫지 못하고 그 틈새를 파고든 겁화에 점점 타오른다.

가까스로 흑호의 기다란 꼬리가 늑대의 발목을 붙잡아 멀리 던진다. 고작 꼬리만으로 거대해진 늑대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수십 수백 미터를 가볍게 내던져졌지만 그 정도론 아무 의미도 없다. 늑대는 날아가던 그대로 균형을 잡아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겁화에 타오른 흑호는 거친 숨을 내뱉었고, 흑호의 마력뿐만 아니라 체력마저 앗아온 늑대의 호흡은 되려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시점에서 승패는 명확해 보였다.

환계가 무너져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세계가 붕괴해 갈라진 금이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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