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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5화 (225/407)

〈 225화 〉 #95 여왕의 기억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흑호는 산을 들어 올려 늑대를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시야를 가득하게 메우는 거대한 산봉우리. 이미 엉망이 된 나무와 바위의 모습들마저 생생하게 보인다. 직격당하면 목숨은 장담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산이 닿을 일은 없다. 서로를 가로막듯 생겨난 균열에 거의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균열은 게걸스럽게 산을 먹어 치웠다.

늑대와 흑호를 갈라놓은 균열은 점점 커다래졌고 흔들림은 이제 균형 잡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지각이 아닌 세계가 흔들리는 지진, 차원 붕괴.

검은 장막은 그 영역을 넓히고 환계의 바다는 빗줄기가 아니라 무너져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것이 바닥에 닿아 완전히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호랑이는 끝까지 늑대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의 관심은 이미 흑호에게 있지 않았다. 놈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환계의 붕괴를 막는 게 더 급해졌으니까.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

가라앉아 추락한 바다에 늑대는 기꺼이 몸을 맡겼다. 그 질량이 대지를 강타했지만, 흑호가 던졌던 대부분 사라진 산이 늑대의 우산이 됐다.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깊은 수심을 만들었지만, 수륙양용을 가진 이상 거친 물살과 파도조차 방해가 되진 못한다.

순식간에 바닷속을 헤엄치며 나아간 늑대는 자신을 가로막는 검은 장막 앞에 섰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구멍 따윈 없다. 아니, 이 검은 장막 자체가 구멍 없는 구멍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간 자체가 없는데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공허와 겁화도 마찬가지. 분명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불태우는 힘이나 아무것도 없는 걸 어쩌진 못한다.

"……."

방법이 없다. 아니,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하나 있기는 하다. 늑대는 고개를 들어 에메랄드빛 바다가 추락한 빈 천공을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검은 장막과 균열은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간다.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언제쯤 환계가 무너져내릴까? 1시간? 10분? 어쩌면 그것마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그 생각에 늑대는 균열을 향해 뛰어올랐고, 무언가에 뒷발목을 붙잡혀 수면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

강한 힘에 던져진 늑대는 고개를 들어 올렸고 자신을 내동댕이친 흑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빛내는 괴물의 앞발이 떨어진 바다를 내리찍자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까지 갈라지고 말았다.

갈라진 바닥의 양옆으로 해일처럼 높은 파도가 출렁이고 늑대는 기꺼이 그 위에 올라탔다. 놈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환계가 멸망할 때까지 들러붙으리라.

그걸 알고 있기에 늑대는 여기서 놈을 쓰러뜨리기로 했다. 흑호의 앞발이 물살을 강타하자 또다시 해일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어떻게든 자신을 밀어내고 시간 끌려는 발악임을 늑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바다는 검게 물들어간다.

아니, 검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처럼 검은 불꽃이 바다 위를 세차게 달려 불바다를 만들어간다.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이 높게 치솟은 해일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흑호를 덮치려 한다. 검은 호랑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수면 아래로 깊게 잠수하는 것뿐이었다.

올바른 판단. 만약에라도 정신체인 흑호가 바닷속에서 질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상대가 늑대가 아니었더라면.

바다의 수면을 검은 불꽃이 뒤덮자 늑대는 망설임 없이 수중으로 파고들었다. 거대한 물살이 출렁이며 자신을 밀어내지만, 아까에 비해 그 기세가 현저히 떨어져 있다.

상처 입고 체력이 부족해졌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물의 저항력 때문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반대로 늑대에게 있어 수중이란 지상과 다름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상보다 편하기까지 하다.

힘과 속도가 우위에 있었기에 흑호는 늑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결국 늑대에게 밀리고 말았거늘, 이 수중에서 결과는 뻔하디뻔한 일방적인 유린.

흑호의 발버둥은 통하지 않고 더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가고야 만다. 빛을 삼킨 검은 불꽃 아래 오직 붉은 눈동자만이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강훈을 뒤쫓아 얼마 가지 않아 강태준은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 보다 도망치지 못했단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선택해라."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는 것에 강태준은 무시하고 검을 겨눴지만, 이어진 말에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는 아직 죽지 않았다."

"……!"

"가능성은 낮아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느냐?"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숨을 쉬는 듯 마는 듯한 죽기 직전의 강태호의 모습이 보이자 강태준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어붙고 넘치도록 피를 흘리면서도 그 말대로 아직 죽진 않았다.

어쩌면 이 상황을 상정하고 살려둔 걸지도 모른다.

"선택하거라."

강태준은 입술을 깨물며 저울에 추를 올렸다. 지금 쫓으면 강훈은 잡을 수 있다. 대신 동생은 죽는다. 반대로 강태호를 살리자면 기껏 몰아붙인 강훈을 놓아줘야만 한다.

선텩의 기로에서 강태준은 저울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강훈을 죽인다.

여기서 그를 놓쳤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설령 동생이 죽더라도 그를 죽이는 게 옳다, 머리로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검을 집어넣고야 말았다.

어리석은 판단이란 걸 알면서도.

"……다음엔 죽이겠다."

씹어뱉듯 말하며 섬뜩한 살의를 발한 강태준이 몸을 돌리자 강훈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살아남는다고 해도 강태호가 전장으로 복귀하는 건 무리일 터. 조금 뜻밖의 수확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

"빠져!"

다급한 외침에 이은하는 옆을 돌아보았고 창염을 뒤따라 커다란 빙벽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빙벽…? 아니, 빙산이라고 하는 게 옳으리라.

이미 늦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은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커다란 빙벽을 올려다보았다.

"…괜찮나요?"

물어보는 말에 고개 돌린 이은하는 단아한 백색 도포를 입은 여성의 모습에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선자님."

"그래요.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군요."

그럼 됐다는 말과 함께 붉은 창을 들어 올린 은자림은 빙벽을 향해 힘껏 투창했다.

맞부딪히자 얼음 알갱이가 깨져나간다. 빙벽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하고 두꺼웠지만, 고작 그 정도로 헌터들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곧 빙벽을 뚫고 그 너머로 갔을 때, 은자림은 푹 한숨을 쉬었다. 암묵적으로 추살조의 조장이 되긴 했지만, 창염과 빙벽의 주인이 누군지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세간에는 비밀로 했지만, 전대 검성이자 칠영웅의 일원인 강훈. 스승님도 낭패를 겪은 그를 상대로 맞서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이 빙벽은 분명 경고이리라. 넘어오면 죽이겠다는. …잠깐 고민했지만 절호의 기회였기에 은자림은 쫓기로 맘 먹었다.

그렇게, 흔적을 따라 탕아들을 뒤쫓은 추살대가 만난 것은 무수한 괴물들이었다. 환수가 아닌 몬스터가 별안간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

심연과도 같은 바닥. 도시와 산이 모두 잠길 만큼 깊게 치솟은 바다에서 자색의 흑호의 숨결이 약해져 갔다.

붉은 핏물이 주륵 새어 나와 바닷속을 물들인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깊은 심해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는가 싶으면 흑호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그것에 검은 호랑이는 분노를 느꼈다.

마랑은 느리고 약하다. 분명 강한 건 자신이다. 산을 들어 올리는 것도, 바다를 가르는 것도 마랑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힘의 차이가 이렇게나 역력한데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에 흑호는 심연 아래에서 크게 울부짖었다.

그 분노에 호응하듯, 자운이 터져 나온다. 남겨둔 힘을 모조리 끌어내자 바다가 자색으로 물들었지만, 그게 좀 더 빨랐어야했다.

―――세계가 붕괴한 균열이 바닷속을 가득 메우고 소용돌이가 일어나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흑호와 늑대 또한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무슨……"

던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 발생이라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도 많다. 전례 없는 사태에 헌터들의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균형이 깨져 싸우기 시작했다.

몬스터와 헌터가 뒤엉키고 환수들이 그들을 돕는 기묘한 상황.

"이건……"

어이없다는 듯한 홍유리의 말에 백록은 끄덕였다.

"환계일세."

환계의 던전이,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현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짙디짙은 마력이 대기 중에 널리 퍼져, 비어있는 마력을 빠르게 채워주고 있었다.

세계가 붕괴함에 따라 침식이 강해졌고 마력과 던전이 차츰 현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환수들이 환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됐을 때 깨달았어야 했다.

차원의 붕괴가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나마 늑대를 비롯해 몇몇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한국의 피해는 작겠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괴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화산각룡같은 재앙이 대도시에 강림한다면? 완전히 붕괴해 그 농도 짙은 마력이 현계에 멋대로 풀려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홍유리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어쩌면 인류는 여기서 끝일지도 모른다.

다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아직 환계에 남아있는 이에게 있으리라.

***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늑대의 눈에 보인 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얼추 환계와도 흡사하나 덧씌워진 세계는 아니다.

――아니, 현실이 아니다.

늑대는 이것이 기억 속의 과거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투영된 머나먼 과거.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한다면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들로부터 흘러들어온 기억들과 한없이 흡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격이 다르다. 흐릿하고 희미한 회상이 아니라 뚜렷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계였으니. 영물 아닌 영물과 환수 아닌 환수들이 뛰노는 곳.

"……."

달과 태양이 공존하고 하늘 대신 바다가 떠 있다. 현실이 아닌데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짙은 마력을 늑대는 가만히 음미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늑대조차 본 적 없는 환수들이 서로 어울리고 지저귀고 있었다. 평화라는 단어가 더없이 어울리고 다툼이 사라진 듯한 꿈에서나 그려보던 세상. 마치 몽환 속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다. 환수들이 추앙하듯 그림자를 중심으로 둘러싸 행복해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그림자는 도려내진 것처럼 실루엣만 남아 형상만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우습고 얄궂게도 빛이 그림자를 비추는 듯하다. 마치 그녀가 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듯이.

늑대는 한탄하듯 긴 숨을 뱉었다.

"……여왕."

그게, 여왕이었으니까.

여태 늑대가 보았던 눈코입 없이 우주로 빚어낸 듯한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검은 물감으로 엉망진창 칠해버린 것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스스로 도망자라 칭했고 신은 없다고 말했다.

――신으로 추앙받았다던 그녀 본인의 말대로 늑대의 눈에 그녀는 신처럼 보였다. 열매를 따고 그것을 나누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

늑대는 바로 이곳이 여왕의 고향이자 그녀의 빛바랜 기억 속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무릎 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검정 호랑이가 갸르릉거리고 있다.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고서. 하얀 사슴과 요정들이 어울리고 지저귀는 세계. 늑대는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시선을 눈치챈 건지 그 중심에 있던 여왕이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웃는 표정으로 손짓해오는 것에 늑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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