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95 여왕의 기억 (2)
그 손짓에 이끌려 걷자 환수들이 갈라져 길을 텄다.
자신을 향해 술렁이는 그들의 말이 들려온다. 처음 보는 환수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언어 자체는 늑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요정어. 아니, 본래는 이 세계의 말이었으리라.
원작, 단세혁의 세계보다 더 빨리 끝을 맞이한 여왕의 세계.
나무 하나를 둘러싸고 여왕과 환수들이 둘러 앉아있는 광경은 고작 기억 속의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지척까지 다가간 순간, 그녀의 손이 뺨에 닿았다. 환상이 아니었나? 극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환상에 빠질 리는 없을 텐데.
"―――그리운 느낌이구나."
언제나와 같은 신비한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육성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녀의 격을 넘볼 순 없다. 살아있는 신이 있다면 분명 그녀이리라.
흑호는 말했었다. 환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여왕은 영락해가고 있다고. 그걸 용납할 수 없다고.
그녀를 마모시키는 모조품이 밉고 미워서 환계를 부수고 환수를 몰살시키겠다 말했었다.
늑대의 시선은 그녀가 품에 안아 쓰다듬고 있는 조그마한 검은 호랑이에게로 향했다. 다만, 자신을 보고 헤실헤실 웃는 순둥한 모습에서 자색의 흑호를 떠올리기란 어려웠다.
――아주 조금 자색의 흑호가 뭘 원했는지는 알 것 같다.
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모방하고 사로잡힌 여왕과, 고작 추억을 모방하느라 영락해가는 걸 용납하지 못한 흑호. 서로가 엇갈리고 말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추억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날 알고 있니?"
듣는 것만으로 긴장이 풀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하구나. 괴물인데도 지성을 갖추고 있다니."
괴물이라는 말에 손길을 즐기던 어린 흑호가 이를 드러냈다. 아까까지 갸르릉거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것만 같은 맹수의 얼굴이 되어 보였다.
또한, 요정과 환수들마저 팔과 날개를 펼쳐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여신님 해치지 말어!"
"괴물~! 괴물 늑대야~!"
정말 사랑받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여신…… 언젠가 여왕 자신이 말했듯, 신으로 추앙받았다던 지금의 여왕은 여신이라 불리는 듯하다. 늑대는 거기에 공감을 표했다. 여왕보다는 여신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니까. 분명 여왕이라는 이름은 영락한 자신을 자조하듯 그녀 스스로 붙인 이름이리라.
그게 과연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걱정 말렴."
회상 속의 여신은 요정과 환수를 물리고 어린 흑호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 늑대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지금의 여왕이 환수 그리고 요정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건……
"그러지 않을 테니. 그렇지?"
다분히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끄덕여 맞장구쳤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이것 보렴. 착하잖니?"
웃으며 턱 아래를 간질이는 손길에 반신반의하던 요정들도 까르르 웃으며 등줄기를 타고 갈기를 잡아당겼다. …이마저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생각하면 씁쓸해지고 만다.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환계는 계속 무너져가고 있으리라.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니?"
다정한 목소리가 물어왔지만,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순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따뜻한 손이 이마 위에 올려졌다. 누구의 손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실루엣뿐인데도 그녀가 눈을 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환상이 아니었나?
기억을 읽은 걸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의 그녀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회상 속의 여신은 표정이 보일 리 없는데도 슬픈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건 분명 이 세계가 끝을 맞이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신과 이 세계가 회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 순간을 직접 본 건 아니었으나, 기억을 읽었다면 다름 아닌 그녀 본인이 그리 말했단 걸 알 테니 의심할 여지는 없으리라.
그 눈에 담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환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기억 속의 환상에 불과한 게 맞을까. 균열에 빠진 건 알겠지만, 어떻게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걸까. 혹시 과거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생생하다.
곧 미래를 읽은 회상 속의 여신이 감정을 추스르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고 싶으니?"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끄덕였다.
이곳이 아무리 아름답고 평화롭더라도 여기 있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의미 없이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사양이었다.
설령 의미 없더라도 끝까지 발버둥 치고 발악한 뒤에야 후회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기에.
"그래……?"
씁쓸한 걸까 아니면 기쁜 걸까. 흐린 말꼬리 뒤에 이어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손끝을 따라 빛이 반짝였다. 은하를 만들어내는 듯, 균열 속 기억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이 공간에서 그녀는 정말 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록 여왕이었던 지금의 그녀는 부정했더라도.
그녀의 가녀린 손끝이 빛이 이어진 통로를 가리켰다.
"들어가 보렴. ……힘내렴. 부탁할게."
작별과 응원을 담은 말에 끄덕인 늑대는 통로 너머를 향해 달렸다. 곧게 뻗은 따뜻한 외길. 그 길의 끝에서 늑대는 잠시 뒤돌아봤다가 남은 걸음을 내디뎠다.
빛이 폭사하더니 서서히 꺼져간다.
그리고 늑대는 자신이 검은 장막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게 됐다.
***
강태준이 없는 추살대. 은자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별안간 나타난 무수한 몬스터. 던전이라도 있나 생각했지만 죄다 은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리 없다.
가지각색의 몬스터는 던전의 테마와 연관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복합형 던전이라기도 무리가 있다. ……역시 탕아들의 소행일까? 대규모 소환진이라도 있었나?
"―――."
끓는 듯한 괴물들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자 은자림은 창을 고쳐잡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생각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추격은 중지하겠어요. 몬스터부터 처리하죠."
뚫고 가기에는 무리. 그뿐만 아니라 당장 추살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숫자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은자림은 주변을 훑었다.
"은신한 몬스터가 있으면 알려줘요."
이은하가 끄덕이자, 은자림은 창을 휘둘러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았다. 소름 돋는 예기가 창 끝을 타고 흐르자 어스름히 빛나는가 싶더니, 달빛에 창날이 번뜩였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자 이은하는 아까의 휘두름이 위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앞열의 몬스터 셋이 서로 다른 위치와 형태임에도 목에서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너무나도 깔끔한 궤적에 헌터들이 혀를 내둘렀고, 이은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설마.'
감히 자신이 판단할 순 없겠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네버랜드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다.
아니, 절대 착각이 아니다. 단신으로 뛰어든 은자림이 붉은 창을 휘저으며 몬스터의 무리를 헤집었다. 마치 양의 무리에 늑대가 끼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헌터라는 이름 그대로 사냥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 담력에도 놀랐지만 정말 대단한 건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니, 오히려 몬스터의 무리가 흔들리고 있다.
유려한 창날이 매머드의 눈알을 꿰뚫고 뇌를 관통한다. 손목의 스냅으로 창대를 돌려 워그의 머리통을 깨부순다. 그 일련의 동작이 춤추듯 흘러나온다.
이은하는 멍하니 창무(槍舞)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칠영웅의 수좌, 창선의 제자라는 것은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걸맞은 실력과 재능이 없다면 대표 클랜의 로드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구경할 때가 아니다. 휘휘 고개를 흔든 이은하는 먼저 할 일부터 해야한다 생각하곤 마력을 전개해 훑었다. 그리곤 바위 뒤에 숨어 있는 기척을 느끼고 손을 뻗었다.
"Distort."
손바닥은 점점 주먹으로. 공간이 왜곡됨에 따라 위장자가 울부짖는다. 윤곽만 겨우 보이는 괴물은 이곳저곳이 뒤틀리며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피가 흘러 붉게 물드니 위장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됐다.
수준 낮은 몬스터는 아니나 이은하의 마력에 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결국 손목을 꺾자 위장자의 목이 비틀리며 엉망진창인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땐, 얼추 상황이 정리된 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있는 추살대는 네버랜드 공략대에 버금가는 정예였으니까.
자색 나비가 날아다니면 몬스터들은 잠자듯 쓰러졌고, 거대한 배틀 엑스가 휘둘러지면 어김없이 허리가 잘려 양단된다. 은자림뿐만 아니라 환영의 나비와 거암의 로드 또한 여기에 있었으니까.
추살대를 둘러본 은자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페이스라면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탕아들을 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끊어놓는 것처럼 그것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커다란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은자림은 침음했다. 머리 한구석이 간지럽다. 어쩐지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상황에 창을 고쳐잡았다.
"―――!"
그 울음소리가, 발소리가, 기척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설마…"
하지만 그렇기에 믿기 어렵다. 놈은 분명 알파와 자신이 쓰러뜨렸으니까. 네버랜드에 고립돼 남아있을 괴물이 대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윽고 도시 숲을 쳐부수고 정말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은자림은 이를 악물었다. 살덩이가 인간의 형상을 취한 듯 보이는 괴인, 저거노트가 그들 앞에 서 있었으니까.
***
장막 안의 풍경은 삭막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온통 검게 물들어 바깥에서 보았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안의 풍경이 너무 잘 보였다. 검은 마력을 구름처럼 빚은 그녀가 오연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뻐근하다는 듯 기지개를 켠 만상의 주인이 키득거렸다.
"늦었네. 이미 끝났는데."
그 말대로 여왕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늘 보았던 우주를 빚어 만든 듯한 모습조차 온전하지 않다. 마치 환상처럼, 사라지기 직전의 홀로그램처럼 아슬아슬하게 연명하고 있다.
【아가, 도망…】
그 말조차 하지 못하게끔 만상의 주인이 주먹을 쥐었다.
【읏……!】
괴로운 신음을 토해낸 여왕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승패는 갈려 있었다. 그렇게 바닥에 몸을 뉜 여왕을 보던 소녀는 시선을 돌렸다.
"지금 가면 놓아줄게. 어때?"
손가락을 튕기자 통로가 생겨난다. 공간 없는 곳에 공간을 만들어 낼 힘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여전한 웃음을 머금은 채 물어오자,
―――늑대는 이를 드러냈다.
"아, 그랬지……"
소녀는 구름 위에서 번갈아 가며 발을 찼다.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하는 수 없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늑대를 짓눌렀다. 단숨에 짓눌려진 늑대는 문자 그대로 다진 고기로 변하고 말았다. 머리만 가까스로 남아 엉망진창이 돼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
소녀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순순히 갔으면 좋았을 텐데. 이젠 시간이 부족해져 더 양보할 순 없다. 희망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죽이진 않았다. 저렇게 됐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가 얼마나 끈질긴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 ……실낱같은 가능성일 뿐이지만, 보험은 보험이니까.
응. 아직은 살려둬야지.
이제 남은 건 여왕을 거두고 신혈을 채취하는 것뿐이다. 영락했더라도 한 때 신으로 불리었던 존재. 진짜 신은 아니더라도 한없이 가깝다. 그녀의 정수야말로 엘릭서를 만들기 위한 마지막 재료가 되리라.
드디어, 드디어…!
아,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확신도 없이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성과 논리의 영역은 한참이나 벗어나 그저 맹목적으로 바라왔을 만큼……
그래도 이젠 끝이야.
새하얗게 웃는 소녀의 뒤로 한 쌍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데구르르, 마개 열린 플라스크가 제멋대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