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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31화 (231/407)

〈 231화 〉 #99 상념

여명의 로드, 강태준이 연 기자회견은 며칠에 이어 뉴스로 보도됐다. 전국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시끌벅적하다.

자색의 흑호. 인류가 손댈 수 없었던 재앙의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설령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류를 끝낼 수 있는 괴물의 존재는 늘 그들을 불안케 했으니까.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일일 수는 없다.

"괜찮습니까?"

늑대의 물음에 여왕은 천천히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심정인지 늑대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보았으니까. 본의 아니게 균열 속에서 여왕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 아직 어린 흑호를 쓰다듬던 그녀의 모습을.

자색의 흑호는 단지 한 마리의 짐승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그녀의 동반자였다. 오로지 그 검은 호랑이만이 여왕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주민이었으니. 비록 자기 뜻에 반했다고 해도 그 이유를 아는 만큼 미워할 순 없었으리라.

이전 세계를 그리워해 환계와 환수를 만든 여왕. 그리고 그런 여왕이 영락하는 걸 볼 수 없어 환계를 부수려 한 흑호. 자신을 위한다는 걸 알기에 여왕은 차마 흑호를 죽일 수 없었으리라.

꼬이고 꼬여버렸다.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이렇게나마 어렴풋이 추측할 뿐. 그런 여왕을 위해 늑대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죽어 돌아올 수 없을 흑호를 대신해 곁을 지키는 것뿐이고.

"……."

우수에 젖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차마 괜찮다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떤 물음이 돌아왔다.

"아가,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니?"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요."

즉답이지만 나름 진지한 답이었다. 종종 생각해봤다. 원래 세계의 자신이 어떻게 됐을지를. 지금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건 이전의 몸은…… 아마 죽지 않았을까.

그냥,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게 나으리라. 이전 세계를 떠올리면… 물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젠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 세계의 자신은 이미 죽어 돌아갈 자리는 없다고.

"……."

여왕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손 위에서 밝고 작은 빛이 조심스레 떠오르더니 조그맣게 형태를 이뤘다. 늑대는 그것이 자신이 가진 업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이를테면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수란다."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답한 여왕은 떠오른 빛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다른 쪽 손바닥을 펼쳤고 거기에서도 작은 빛들이 계속해 흘러나왔다. 어쩐지 따뜻해 보이는 구슬들은 방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흘러나왔다.

"내 아이들의 것이고."

두둥실 떠오른 정수는 애교라도 부리듯 여왕을 둘러쌌다. 늑대의 코끝에도 잠깐 정수가 닿았는데,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까지 했다. 마치 요정처럼.

정말 살아있는 것만 같다…….

늑대는 홀린 듯 정수를 바라보았다. 그릘 리가 없는데도 그들의 생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한 그루 나무에 둘러앉아 지저귀고 재잘거리던 환수와 여왕의 모습이.

그러다가 여왕의 손에서 좀 더 커다란 정수가 흘러나왔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자색으로 빛나는 검은 구체는 마치 검은 호랑이를 연상케 했다.

"내 아이들은 죽어 내게 돌아오더구나."

읊조리는 듯한 여왕의 목소리가 늑대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긍정했다.

"이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늑대는 빈말로나마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자들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건 정수의 말로가 업이며 자아조차 흐려지고 말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흐려진 자아가 여기에 남아있는데 환생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환생이라는 게 정말로 있기는 한 걸까.

순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은 그래서 환계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추측이었다. 정수가 된 그들을 모방해서라도 만나고 싶다던가 하는 그런 마음에서.

여왕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긴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기나긴 한숨이었다.

"……이 아이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뜸 들인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이리라. 그렇게 말하는 여왕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늑대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다.

깨진 그릇, 격을 포기함으로써 잠깐은 안정됐지만, 영락함을 넘어 일개 생명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본래 초월자였던 그녀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영혼의 격을 육신의 격이 감당치 못한다.

종이컵에 담긴 불과도 같다. 그녀의 드높은 영혼이 어울리지 않는 육신을 불태우고 결국 수명을 다하게 되리라.

그런 자신이 죽은 뒤에 정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걸 감히 늑대 자신이 대답할 순 없다. 하지만 정수 혹은 업으로 남은 이상 환생하기란 어려우리라.

그래도,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늑대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후회할 거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잃어버린 자들이 하나 되어 자신에게 속삭이던 것을 늑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건 오로지 하나. 멸망과 종말을 막아달라는 것뿐이었다. 계속 소리 지르는 말을 듣지 못했을 뿐.

잃어버린 자들이 바라던 염원은 그것이었지만, 정수가 바라는 건 그녀의 곁에 함께하는 것이리라. 분명 여왕의 생이 다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

여왕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고맙구나."

***

"뵙고 오는 길인가요?"

백소율의 물음에 늑대는 끄덕였다.

"뵈러 가는 길인가?"

"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갈 걸 그랬네요."

아쉽다는 듯 말하자 늑대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왕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건 기꺼운 일이었으니.

"고맙다."

"오히려 제가 감사한 걸요."

백소율의 검지 끝으로 자색 마력이 떠오르더니 지저귀는 새와 요정의 형상을 이뤄 날아올랐다.

"배우는 것도 많으니까요"

가만 보던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의 그것은 환영이 아닌 현실이지만 세계 하나를 만들고 신으로 불리었던 그녀인 만큼 인간의 마법이 어렵진 않으리라.

불합리하겠지만, 그녀의 통찰력이라면 마법이라는 영역에서조차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초월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분명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새와 요정이 흩어지듯 사라지자 늑대는 작게 감탄했다. 마법에 조예가 없더라도 그녀의 수준이 높아졌단 것만은 알 수 있었으니까.

3월이 다가오는 아직 추운 날. 늑대의 빤한 시선에 백소율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완전히 붉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던 늑대는 백소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을 땐, 그래도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

문전성시를 이룬 사람들의 모습. 누구 하나라도 나와주길 기다리고 있지만, 클랜의 문은 단단하게 잠겨있다. 제법 높은 층이었지만, 늑대의 예민한 청력은 그들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자색의 흑호. 놈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강태준이 공표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리라. 제법 시끌벅적했지만, 늑대는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보단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 남은 건 바다의 재앙.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가능하면 빨리 쓰러뜨리고 싶다는 게 본심이었다. 환계와 함께 만상의 주인이 사라진 지금이 남은 재앙을 쓰러뜨릴 적기일 테니까. 완전히 죽었다면 좋겠지만, 설마하니 그녀가 순순히 죽었을 거라 상상하긴 어렵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재앙을 끝내야만 한다.

만상의 주인이 돌아오면 손도 발도 쓰지 못한 채 전부 끝나고 말 테니까.

물론 재앙을 쓰러뜨린다고 종말이 끝나는 건 아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종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말았으니까…….

***

탕아들을 쫓아 항저우가 아닌 상하이로 갔던 고원. 그들의 복귀는 여명보다 훨씬 늦었다. 침공이 끝난 한참 뒤인 지금에서야 돌아왔으니까. 이미 고원을 지탄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나 많을 줄은."

변절자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철. 그걸 받아든 강태준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사각지대처럼 이단의 탕아들과는 또 다른 조직이나 그들에게 협력하는 이들과 기업. 심지어는 옛 범죄조직이 명맥을 이어온 경우도 있었다.

뿌리는 생각보다 더 썩어 있던 거다.

창선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지트와 연구소를 발견했네. 이미 완전히 부쉈지만, 아마 거기가 본거지였겠지."

창선의 말에 강태준은 가볍게 끄덕였다.

"살덩이로 변하는 약물도 대량으로 있더군. …그리고 참상을 보았네. 인간이 인간을 사육하고 그들을 키메라로 만드는 과정까지도."

"……."

"내 아들이 목숨을 걸고 알렸던 정보네."

"광휘의 일은……"

"유감이라고 하지 말게. 태을이는 소임을 다 했으니. 후회하지 않을 걸세. 후회시키지도 않을 걸세."

"……."

광휘의 궁사, 주태을.

창선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고원의 주인이 됐을 후계자. 동시에 세계 최고의 궁사라는 지위를 가진 인물. 끔찍하게 토막 나 죽은 자식의 일을 알고 있음에도 창선은 그리 말했다.

인류의 정신적 지주인 칠영웅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강태준이 보기에도 그 감정의 절제는 너무 이성적이었다.

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몰아칠 준비를 하고 있을 뿐. 지면 아래 용암처럼 들끓으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끝낼 생각이네."

"……."

"이들을 전부 죽이고 씹어먹어서라도 반드시. 그게 오래전에 내가 끝마쳐야 했을 일이니까."

강한 결의가 담긴 말에 강태준은 가만히 경청하다가,

"그러니,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길 부탁하네. 변절자를 모두 쓸어버릴 때까지."

그 말에 천천히 끄덕였다.

***

쉬는 날이 끝나기 전, 강태호의 병실에 들른 홍유리는 팔짱을 꼈다. 이미 몸에는 이상이 없는데 단지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언제 깨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데.

"……."

수액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그 선이 이어진 곳. 그 커다란 덩치가 침대 네 개를 이어붙이고 나서야 가까스로 누워 있었다. 개인 병실을 거의 꽉 채우는 덩치에 홍유리는 실소했다.

악귀 원령이라고 했던가. 강훈의 갑옷에 그런 게 들러붙어 있다고 했다. 마치 네버랜드의 3구획과 비슷하다. 아니, 십중팔구는 맞으리라.

그것들에 당해 언제 다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이 화상아. 뿔도 줬더니만."

알파가 기껏 무기로 만들어 주기까지 했는데 검은 얻다 팔아먹고 빌빌 누워있는 꼴이 이게 대체 뭔가. 헤벌쭉 좋아하던 얼간이 같던 모습은 어디 가고 여기 누워있단 말인가. 당장 일어나서 깝죽거릴 것 같은데 조용히 잠들어 깨지 않는다.

제발 좀 죽으라고 고사 지내던 때도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씁쓸하긴 하다. 문득 생각나 찾아온 거였는데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푹 한숨 쉰 홍유리는 천천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구진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의 병실이라 창문이 열려있어 구진하의 빈 소매가 흩날렸다.

"……."

한 명은 침묵하는 입에게 다른 한 명은 강훈에게. 어느 쪽이든 이단의 탕아들. 대부분 쓸어버렸지만, 아직 남아있다. 그 징그러운 바퀴벌레 새끼들을 아직 박멸하지 못했다.

고원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클랜장님과 접선했을 테지만, 아직 연락은 없다. 고원은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홍유리는 까득 주먹을 쥐었다.

"무슨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거냐."

묻는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집도 불탔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분풀이. 복수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분풀이. 홍유리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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