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99 상념 (2)
"그래서, 고원을 따라가겠단 건가."
"어."
가벼운 대답에 늑대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김에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낮에 강태호의 병실에 들른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다."
"안 막아?"
되레 의아하다는 듯 약간의 서운함을 담아 묻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겠다는 일을 내가 막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에 늑대는 웃었다. 그리곤 촉수를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넘어가 촉수에 얽히는 감각. 홍유리는 눈을 감고 그 손길을 음미했다.
"다만, 다치지 마라."
"……."
"그건 내 권리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홍유리의 목울대가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
홀리기라도 했다는 듯 뻗어오는 손. 자신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이 어느샌가 풀려있었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야."
힘겹게 답한 홍유리로부터 젖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집… 새로 구해야겠네."
작게 중얼거렸지만 이렇게 안겨있는데 듣지 못할 리 없다. 늑대는 애써 못 들은 채 넘어갔고 홍유리는 드물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처럼 뺨을 비볐다. 몇 번의 버드 키스가 오가고 늑대가 물었다..
"그런데 팀장이 자릴 비워도 되나?"
"뭔 상관이야.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부팀장이 알아서 하겠지."
"……."
어쩌면 팀장직이 싫어서 가는 건 아닐까. 찔끔 눈을 돌리는 게 그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문득 홍유리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아, 이러니까 더 싫어."
"……."
"더 주기 싫어지잖아."
홍유리는 더 강하게 늑대를 끌어안았다.
부글부글, 감정이 끓어오른다.
혼자 가지고 싶다. 이대로 독점했으면 좋겠다. 역시 다른 누군가랑 함께하거나 하고 싶지 않다. 계속, 계속 혼자 가지고 있고 싶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단둘이서만 쭉.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
"……."
늑대는 말없이 홍유리의 어깨에 앞다리를 둘렀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끊어낸 건 자신이었고 다시 이어버린 건 그녀다.
가만 놔뒀더라면 알아서 포기했을 백소율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어 굳이 그녀를 도발했다. 그게 동정의 손길인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싹을 틔운 건 다름 아닌 홍유리 본인. 누구도 탓할 순 없다.
그런 동시에 나누기 싫다는 상반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모순을 모를 리 없지만, 늑대는 홍유리를 이해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만약 다른 누군가와 그녀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싫다.
그럼에도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이미 관계는 일그러졌다지만, 언제까지 백소율을 무시하고 있을 순 없다. 그건 그녀를 기만하고 짓밟는 것과 다름없기에.
이 끝에 파국이 있던 또 다른 길이 열리던 선택의 때는 찾아오리라. 분명, 머잖아 반드시.
말로는 하지 않아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응."
"앞으로 어떻게 돼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란 거다."
서로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했다. 야밤의 시계 소리도 사라지고 페리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게끔 조용해졌다. 마치 세상에 단둘만이 남은 것만 같다…….
세상이 기우는 것처럼 다가온 침대가 둘을 끌어안아 눕혔고 달빛이 비쳐오는 가운데 늑대는 하염없이 그녀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잠들 수 없는 자신과 달리 그녀가 조용히 눈 감을 때까지.
***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이은하는 데굴데굴 굴렀다. 새벽인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집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혼자라면 클랜에서 방을 얻어도 됐겠지만, 동생이 있는데 차마 그러긴 어려웠다. 물론 방을 구하는 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조금 어색하긴 하다.
몸은 노곤해서 눌어붙을 것만 같은데 머리는 이상하게 또렷하다. 어제오늘 연일 휴가였지만 이은하는 휴가를 즐기지 않았다. 몸이 달아올라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그날, 홍유리와 함께 늑대를 찾으러 갔던 이은하는 그날 본 광경을 잊지 못하고 있다. 화인처럼 새겨져 다신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아 하루에도 몇 번씩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생에 다시 없을 만큼 끔찍했고 보기 싫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봐버리고 말았다. 그 늠름하고 대단한 알파의 이면을. 스스로 죽이고 먹어치우고 이성을 잃을 만큼 몰아붙였던, 누구도 몰랐던 처참한 뒷면.
차마 따라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알파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흉내도 내지 못했으리라.
그런데도 티 내지 않고 그렇게 혼자 쭉…… 한숨 쉰 이은하는 엎드려 누웠다.
그날 이후론 쉬는 게 쉬는 게 아니게 돼버렸다. 생각해보면 물론 그렇겠지만, 안일했다. 원래 슬라임이었던 알파가 아무 노력도 없이 그렇게 강해졌을 리 없는데. 마냥 부러워할 일이 아니었는데.
환계에서 노력했다, 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매일 정신 고갈의 전조가 찾아올 때까지 수련하는데도 그날 이후부턴 고작 이거?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시 몸을 구른 이은하는 천장을 보고 대자로 누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파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대체 알파는 뭘 보고 있어서? 그 눈에 보이는 게 대체 뭐길래?
클랜장님의 발표는 들었다. 자색의 흑호를 알파가 쓰러뜨렸다던데…… 세간에는 스퀘어라고 알려졌지만,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린 것도 사실은 알파란 걸 이은하는 알고 있었다.
알파는 벌써 세 번째 재앙을 걷어냈다.
그게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대체 난 언제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해서. 베개를 끌어안고 멍하니 침대 위를 세 바퀴쯤 굴렀을 무렵,
"언니!"
방문이 벌컥 열며 들어온 동생을 이은하는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진짜야? 지금 클랜에 환수… 가 있다는 거?"
이은하는 눈을 끔뻑였다. 환수들은 다 산이나 섬으로 가지 않았나? 클랜에 남아있는 환수? 아, 페리랑 감마가 있구나.
"응. 왜? 보고 싶어서?"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동생의 고개가 미친 듯 끄덕여졌다.
"응! 응! 보고 싶어. 볼 수 있어?"
왜 이렇게 들떠있지?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그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소율이한테 말해서 잠깐 감마를 보여주면……
"감마? 알파라던데?"
그 말에 이은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러고 보니 알파를 몬스터가 아니라 환수라고 발표했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바쁘지 않을까? 요즘 자신도 잘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최상층에 자주 들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혹시… 힘들어?"
일부러 그런다는 건 알지만 눈을 반짝이며 묻는데 차마 그렇다고 답하기가 힘들다. 그냥 모른 체 할까 생각하던 이은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는 봐도 장담은 못 해."
"응! 응!"
괜찮다고 끄덕이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어차피 알파가 그렇게 시간 낭비할 만큼 한가하진 않을 테니까.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상관없으리라. 가볍게 생각하기로 한 이은하는 동생을 내쫓고 잠을 청했다.
***
날이 밝았을 때, 홍유리는 고원과 합류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어깨 위에 올라탄 페리가 갸웃거리는 것에 조금 눈살을 찌푸리면서.
"너무 커진 거 아냐?"
"……."
"코모도왕도마뱀이 따로 없네."
그 말에 웃어버렸다. 물론 과장이 조금 섞이긴 했지만, 듣고 보면 그렇게도 보인다. 꼬리가 긴 탓이긴 하지만, 탈피하면서 줄어들었던 몸이 다시 커져 머리에서 꼬리까지 2m는 되는 데다가 몸무게도 30kg에 육박해가고 있으니까. 아마 감마가 옆에 있다면 확실한 비교가 될 텐데…
"뀨?"
그래도 여전히 귀엽게 보여 쓰다듬어주었다. 사실 페리가 얼마나 커지건 또 어떻게 변하든 달라질 건 없다. 여태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중증이네."
말은 그렇게 해도 홍유리도 페리를 쓰다듬고 있다. 출발은 오후라고 했으니 그 때까진 여유가 있는 모양. 어느새 페리와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얘, 자꾸 커지면 집에도 못 들어오는 거 아냐?"
까르르 웃는 페리를 비행기 태우던 홍유리가 묻자 늑대는 떨떠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래된 용을 떠올리면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으니까.
자신처럼 변형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페리가 그대로 테헤란에 남아 부정을 잔뜩 먹은 뒤에 10m쯤 돼서 돌아온 모습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왔다.
"장난 아니거든? 여왕님한테라도 물어보지?"
"그래."
확실히 환계의 생물을 그녀보다 잘 아는 이는 없으리라. 전처럼 떠도는 게 아니게 된 이상, 나름 해결법이 필요하긴 하리라. 페리의 성장을 멋대로 억누를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거."
홍유리가 건넨 것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핸드폰이란 건 물론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빤히 쳐다봤지만, 홍유리는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뭐? 그냥 연락하면 받으라고. 알아들어?"
저번에 핸드폰이라도 만들어줘야겠다 했던가.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홍조가 떠올라있는 게 보였기에 늑대는 웃어버렸다.
그렇게, 홍유리는 고원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
홍유리가 떠난 뒤, 늑대는 여왕을 만나기 위해 방 밖으로 나왔고 마침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이은하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나? 홍유리는 지금 없는데."
허리 뒤로 손을 숨긴 채 꼼지락거리던 이은하가 그게 아니라고 하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부탁이 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동생을 만나줄 수 있느냐는 말.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늑대는 가볍게 그러겠다 말했다. 클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지만 데려오겠다는 것에야.
"알겠다."
기뻐할 거라 생각했더니, 의외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 아니. 바쁘면 거절해도 되는데…"
거절할 만큼 바쁜 일은 없으니까. 요즘 일과라고 해봐야 여왕을 만나는 정도밖에 없다. 비가시화를 사용한다면 상관없겠지만, 굳이 밖으로 갈 생각은 없다. 한 번쯤 백록을 보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아, 응. 고마워."
아리송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한 이은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어디 가려고?"
늑대는 촉수로 위층을 가리켰다. 최상층에 자주 들른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대체 거기에 뭐가 있길래? 원래 클랜장실로 썼어야 했을 최상층은 대체 왜 비어있는 걸까?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티가 났기에 늑대는 궁금하면 가보겠느냐 물었다. 정말 궁금하긴 했는지 우물쭈물 그래도 될까? 되묻기에 따라오라 말했다.
백소율이 마법에 대해 도움받고 있는 만큼, 독자적인 길을 걷는 이은하도 조언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긴장이 역력한 표정의 이은하가 심호흡하자 늑대는 문을 두드려 노크했다. 들어와도 좋다는 대답이 들리자 요정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이은하는 휘둥그레 두 눈을 떴다.
"새로운 인간!"
"아냐! 환계에서 봤었어! 은하, 은하!"
재잘거리는 요정들. 그리고 그 너머,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왕과 맞은 편에서 집중하고 여왕의 지시대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백소율의 모습이 보였다. 말했다시피 변절자의 심문으로 바쁜 환영의 나비 대신에 그녀의 가르침을 받는 모양.
"오늘도 와줬구나. 아가. 그리고 옆에는……?"
여왕의 깊은 눈에 잠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어쩌면 이은하가 요정어를 할 줄 안다는 게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늑대는 그렇게 생각했고, 반대로 이은하는 여왕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 감탄하고 있었다.
오면서 여왕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은 했지만 그럴 거라 생각 했다. 뒤늦게 집중하고 있던 백소율과 눈이 마주치자 늑대는 가볍게 촉수를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