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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33화 (233/407)

〈 233화 〉 #99 상념 (3)

이은하와 여왕이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여왕에게 언어의 장벽 같은 건 없다고 미리 말했는데도 요정어로 묻던 이은하와 한국어로 답하는 여왕의 모습은 제법 재밌긴 했다.

"선생님은 안 계시나요?"

백소율이 묻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원이 아니기 때문인지 알리지 않았던 모양.

"고원과 합류해 변절자를 소탕하겠다더군.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다."

"안 말리셨어요?"

눈살을 찌푸리는 것에 늑대는 페리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말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무책임하잖아요."

처음으로 그녀가 꺼낸 자신을 비난하는 말에 늑대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으니까. 곁에 있어 달라는 약속이 있어도 홍유리가 원했으니 말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약속 그 자체가 아니니까. 서로 발목 잡을 약속이라면 없는 게 낫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다만, 거기서 문제가 생긴다면 도울 뿐. 늑대가 바라는 건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속박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미묘한 표정이 된 백소율은 상념에 빠졌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늑대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시 고개 돌리니 이은하와 여왕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늑대는 자신을 들어 올리는 손길을 느꼈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손길. 자신을 품에 안은 백소율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전 그러기 싫어요."

"……."

"좀 더 원하고 늘 함께하고 싶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계속, 계속."

그건 그녀 자신의 소망.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 대상이 자신임은 알고 있다.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새삼스레 그녀가 포기할 생각이 없단 것만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니까요."

체온이 전해져오자 늑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녀의 자유다.

그리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남을 사랑하는 방식은 각자 다를 테니까. 명확한 오답은 있어도 정답은 없으리라.

"그러니까, 네가 틀린 건 아닐 거다."

늑대의 머리 위에 백소율은 뺨을 가져다 댔다. 긴 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이은하와 요정들이 휘둥그레 눈뜨며 지켜보고 있었지만, 늑대는 뿌리치지 않았다.

확실하게 끊어내든가 혹은 받아들이든가…….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늑대는 잠깐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생각을 하고 말았다.

"뀨우웃!"

페리가 떼놓을 때까지 한참을. 떨어지고 나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답 없는 길에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

비가시화를 사용한 늑대는 옥상에서부터 발판을 만들어 창공을 달렸다. 지리산까지 거리는 멀었지만, 슬슬 한 번쯤 들러야 했으니까.

거리가 멀다고 말했지만 사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빠르고 강해졌는지를 실감하며 지리산에 내려선 순간, 많은 환수와 영물과 동물의 기척이 전부 느껴졌다.

그 정보량이 머릿속에 담기고 늑대의 시선이 어딘가로 돌아갔다.

"……."

마찬가지로 자신을 느꼈는지 발굽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점이 흰색 선이 되더니 이내 자신의 앞까지 도착했다.

"백록."

"휴. 오랜만이군."

급히 달려온 하얀 사슴이 숨을 몰아쉬었다.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무성한 지리산의 숲. 저번에 인삼을 가지러 온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지낼 만 해?"

"얼마든지."

"불편한 건 없나?"

가능한 선에서라면 어떻게든 환수들의 편의를 봐주고 싶었다. 처음에 여명이 환수와 영물을 산과 섬에 풀어놓겠다는 말에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곧 사그라졌다.

환수는 식사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종에 따라서 수면조차 필요 없는 경우도 있는데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애초에 몬스터가 자연 발생하는 세계인 만큼 오히려 몬스터를 처리해준다면 그게 더 안전하고 편하니까. 아직은 격리되다시피 있지만, 머잖아 환수와 인류가 서로 어울리는 세계가 될지도 모른다.

"괜찮네. 그보다 여왕께서는…"

산과 섬에 있으니만큼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모양. 긴장하고 있는 표정에 늑대는 가볍게 그녀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러 문물을 즐기고 있다고. 그녀가 즐긴다는 건 추측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에겐 그리 보였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는 듯이.

"자네가 있어 주니 다행일세. 고맙네."

환수들에게 있어 여왕은 그들의 주인이자, 어머니이자, 보호자였으니. 한낱 생명으로 몰락하고 만 그녀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여전히 방법은 없겠나?"

마찬가지로 그녀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도. 늑대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왕의 문제는 영혼의 격과 육신의 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드높은 격을 감당하지 못한 육신이 붕괴해가는 것. 아무리 길어도 4월이 되기 전에 스러지고 말리라. 제대로 된 봄을 맞지도 못하고 쇠약해져 차갑게 끝을 맞이하리라. 재생이나 회복 같은 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문제. 모조 엘릭서라도 다시 구하지 않는 한 이것만큼은 해결할 방법은 없다.

이미 스스로 격을 포기했을 때부터 여왕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다만, 여분의 삶이 주어졌을 뿐. 그녀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으리라.

"……."

여왕을 구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자신이 그럴 생각이란 걸 알게 된다면 오히려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표정을 읽은 백록은 진중히 그런가하고 말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음의 준비와 함께 다가올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다못해 그녀가 웃으며 떠나갈 수 있도록.

"고맙네. 자네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네."

"……."

"환계를 위해 몇 번이고 발 벗고 나서주지 않았던가. 거기에 우리의 염원마저 이뤄주었으니."

늑대는 쓰게 웃었다.

환수들의 염원이란 자색의 흑호를 죽이는 것. 하지만 그건 자신이 이뤄낸 게 아니다. 검은 호랑이는 최후의 순간, 여왕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으니.

하지만 그 사실을 환수들에게 알릴 순 없다. 자신들의 부모가, 창조주가 바로 자신들 때문에 영락해왔다는 참담한 진실만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엇갈렸을 뿐. 한 가지 확실한 건 종말을 끝내지 못하면 이런 비극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점이다.

아니, 이런 비극조차 남지 않고 모두 끝나버릴 테지.

늑대는 끝까지 백록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

밤이 됐을 때, 늑대는 자신의 방에서 도통 나갈 생각을 않는 백소율을 보고 난처해했다. 돌아가서 자라고 말했지만 벌써 세 번이나 말해도 고집 피우고 있으니까.

"제가 여기 있는 건 당연한걸요."

뭐가 당연한 거냐는 말에 백소율은 기죽은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거잖아요? 기회는 주겠다고.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요?"

그 당돌한 말에 늑대는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백소율은 정말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방에 남겠다는 강경한 의지. 차마 촉수로 묶어서 내쫓을 순 없었기에 늑대는 잠깐 고개를 돌렸고 혼자 과자를 먹고 있던 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을 보냐는 듯이.

빤히 시선이 마주하자 알겠다는 듯이 끄덕인 페리가 먹던 비스킷을 꿀꺽 삼켰다. 촉수를 뻗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주니, 헤실헤실 웃으며 촉수를 왁! 입을 벌려 삼키고 숟가락을 빨듯 핥았다.

"아…!"

그걸 부럽다는 듯 보는 시선에 늑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우물거리던 페리가 가볍게 날아 백소율과 닿았다. 이제는 커다래진 페리의 등줄기를 습관적으로 쓸어내리던 백소율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늑대는 잠깐 시간이 지나 혼자 돌아온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밤이 되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들려?]

고개를 끄덕이려다 늑대는 그렇다고 답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문명의 이기와 제법 떨어져 있었던 만큼 어색하게 느껴진다. 전파음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페리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신기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뀨뀨 다가와 호기심을 표했다.

[페리랑 둘이야? 무슨 일 없고?]

"그래. 괜찮다. 너는?"

[그냥, 이륙하기 전에 통화한 거야]

"외국으로 가나?"

[엉. 인도로 갈 거라는데. 왜? 걱정돼?"

픽 웃는 말에 늑대는 보일 리 없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과 함께하는 이상 지금의 홍유리가 당할 리는 없겠지만 딱 하나 걱정이 되는 건 강훈의 존재. 1대1로 싸울 상황이 생긴다면…… 역시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그래."

기운찬 그녀의 목소리에 늑대는 웃었다. 창선에 고원까지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근데 옆에 누구 있…]

"아무도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 너 왜 거기 있!]

"네. 알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뚝, 멋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백소율을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선을 돌려 문을 보았지만, 여전히 잠겨있었다. 애초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아무리 한눈팔고 있었다 해도 자신이 모를 리 없다.

……어떻게? 라고 생각하다가 백소율의 품속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감마를 보곤 탄성을 질렀다. 우화 중인 알을 건넨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어떠냐는 듯한 의기양양한 미소.

확실히 점멸을 사용해 이동하는 걸 막기는 어렵다. 24시간 마력을 방출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그렇다고 감마를 강제할 수도 없다…….

어쩌면 여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삼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안 건드릴게요. 어차피 주무시지도 않으시잖아요?"

눈을 마주하며 하는 말에 늑대는 뚫어지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무언의 압박에 백소율은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제멋대로라 죄송해요."

알고는 있었던 모양. 지금 그녀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을 넘은 거였으니까. 차라리 백소율을 묶어 환영의 나비에게 떠넘길까도 생각했지만…… 조용히 무릎 꿇은 채 기다리는 모습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라고 잘못을 모르는 게 아니다. 물론 답답했으리라.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나… 이런 돌발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정말 정답 같은 건 없다고 새삼 실감했다.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졸업식 이후, 백소율은 정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어필해왔다. 그 이전까지 다소곳하게 보였던 모습이 거짓말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아니, 그게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리라. 가만히 앉아있다가 뺏겨버렸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걸 마냥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홍유리를 안은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래도…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든 늑대는 끊으며 말했다.

"같이 자는 건 힘들다."

"……."

아랫입술을 깨물며 끄덕이는 모습에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을 이었다.

"대신 통화라면 얼마든지 해주겠다. 네가 잠들 때까지라도."

"……!"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 든 백소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긴 흑발이 살랑거리며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홍유리와는 다른 감촉을 느끼며 늑대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고개 돌리지 못하게 양 볼을 붙잡고서.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백소율이 놓아달라는 듯이 몸부림쳤다.

"봄이 오기 전까지는 답해주겠다. 어떤 식으로든."

위아래로 고개를 마구 흔드는 모습에 촉수를 거둔 늑대는 붉어진 얼굴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는 백소율을 볼 수 있었다.

픽 웃은 늑대는 핸드폰을 켰고 화면에 보이는 날짜는 25일. 고작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받아들이건 거절하건 정말 많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답해야 하리라. 그녀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느새 졸린 눈이 된 페리를 재우고 늑대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에 어느새 부재중 전화가 10건이 넘게 와 있던 것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열 받은 홍유리가 돌아오겠다고 노발대발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날, 늑대는 홍유리를 달래기 위해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을 통화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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