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99 상념 (4)
쪼르르, 술잔에 따라지는 맑고 투명한 액체.
여명의 클랜장실에서 늑대는 잔을 기울였다. 단맛이 감도는 이름 모를 술. 초콜릿이나 사탕과는 다른 과일의 단맛이지만, 어떤 과일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혜견으로 보면 물론 알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으니.
술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음료처럼 마셔도 좋을 것 같다. 식도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 달달한 맛과는 달리 도수는 제법 높은 듯하다. 그래봤자 취하진 않지만.
"마음에 드나?"
그 물음에 늑대는 끄덕였다. 커피와는 다른 종류의 맛이었으니. 혀가 즐겁다. 늑대가 만족하는 것을 보며 강태준은 방의 한구석을 곁눈질했다.
"인삼은 저게 전부인가?"
강태준이 묻자 늑대도 고개 돌려 보따리 위의 인삼을 살폈다. 전부 해서 91. 고작 100뿌리도 되지 않는 인삼이 뭐가 대단하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하나하나가 50년 이상 묵은 영약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
아공간에 혹시 몰라 쟁여둔 여분을 제외하면 이게 전부다.
백록과 만났을 때, 지리산에 도착해 남은 인삼을 모두 수확한 것. 이미 인삼으로 마력을 올릴 수 없는 늑대에겐 별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헌터나 마법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데다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게 영약이니까.
그걸 강태준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있어 알파는 누구보다 까다로운 상대. 비단 그 무력과 지성 때문만이 아니라 물욕이 없기 때문이다.
거래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 흥정은 어디까지나 그다음. 하지만 인간이 아닌 알파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오히려 편했을 테지만, 음식은 어디까지나 기호일 뿐이며 수면도 필요하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욕구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
'……까다롭군.'
강태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여명에도 사상자가 나왔다. 쓰러진 강태호가 그랬고 팔을 잃은 구진하가 그렇다. 부족한 전력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보충해야 하는 법. 그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영약. 그 때문에 인삼을 확보해달라고 말은 했지만, 문제는 대가를 줄 수가 없다는 점이다.
돈이나 물건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어떤 것도 알파가 바라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지.
물욕이 없는 알파라면 기꺼이 건네줄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 그러하리라. 하지만 처형자의 낫과 저번에 받은 인삼부터 받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몇 번씩이나 이런 식이어서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었기에 강태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
"아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알파를 클랜에서 머물게 한 이유는 여럿 있지만, 물욕을 새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맛을 탐구하면서도 딱 거기까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고수하는데 상대하기 껄끄럽다.
결국 이번에도 빚으로 달아둬야 하나.
"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늑대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흘러나왔다.
"집. 집이 좋겠는데."
"집?"
다소 뜬금 없는 말이었다. 의외로 집에는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아니, 본능같은 거라면 넓은 영역을 원할지도 모른다. 섬이나 임야를 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며 다음번에 참고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유를 물었다.
"홍유리가 원하더군."
"……."
"집을 새로 사야겠다면서."
떠나기 전에 들었던 말을 알리자 강태준의 멍한 시선이 향해왔다. 작게 실소하는 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말이었나? 어쩐지 강태준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 그래. 집이란 말이지."
손가락을 튕기며 생각하던 강태준은 알겠다고 말했다. 고민 없이 말하는 것에 늑대는 잠깐 요구사항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퇴실하는 알파의 뒷모습을 보며 강태준은 웃었다.
"어떤 것 같나."
"……신기하군요."
"물욕은 없어도 상관없겠지. 진심인 것 같으니. 이걸 봐야 걱정이 사라질 텐데."
여명과 고원이 상하이와 항저우로 각기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자색의 흑호가 죽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선 그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니, 여명과 고원이 자리를 지켰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았으리라.
따라서, 알파의 존재를 밝히는 건 불가피했다.
인류의 편에 선 환수라 알려진 마랑. 슬슬 환수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여론의 반응이 그리 나쁘진 않지만,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
바로 그 알파라는 존재를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당연히 불가능하지."
이전에도 잡을 수 없던 알파다. 심지어 역병과 질병에 이어 흑호마저 쓰러뜨린 그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진화하기 전에도 구획 보스를 쓰러뜨렸건만, 정작 자신은 지금 알파의 본신조차 보지 못했으니까.
우려하는 이유는 알고 심정도 이해한다. 당장 옆 방에 맹수가 있는데 안심하고 잠들 사람은 없으니까. 자색의 흑호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백두산에 웅크려 움직이지 않았지만, 쓰러뜨릴 수 없는 재앙이라는 이유로 두려워했다. 단순한 변덕으로 인류를 끝낼 수 있는 불합리함이었으니.
알파라고 다르겠는가. 특종 하나라도 써 보려고 매일같이 기다리는 기자들이나 아무것도 모른 채 통제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군중들이나.
하기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통제가 불가능한 이상 빚을 지우던 이유를 만들건 인류를 적대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훌륭히 성공했지 않은가. 적어도 알파와 홍유리는 서로에게 진심인 것 같으니. 그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는다면 알파가 인류에 등 돌릴 일은 없으리라.
강태준은 테이블 위에서 턱을 괴었다.
그 때문에 고민했다. 홍유리가 고원을 따라가겠다는 걸 말려야 하는 게 아닌지. 다만…
"요구는 어떻게 할까요?"
"건물을 하나 사 주는 것도 괜찮겠지. 임야가 딸린 곳에 집을 새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연의 물음에 답하던 강태준은 문득 여태 버려두고 쓰지 않은 곳이 있단 걸 깨달았다. 계륵 같은 곳이었지만 공간이 필요한 거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리라.
"놈들의 아지트 위에 새로 건물을 짓는 거로 하지. 지하에 이어지게끔."
"……그렇게 할까요?"
"그래."
하연의 물음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26일. 강태준과 담화를 마치고 여왕을 만나러 간 늑대는 몇 가지 의문점을 물었다.
종말에 대해서. 초월자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만상의 주인에 대해서.
그녀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성실히 답해주었다.
종말이라 불리는 그것의 정체. 초월자라는 격. 만상의 주인이 가진 능력까지.
"……그래서."
여왕 자신이 가진, 아니 가졌던 능력은 정지. 시간을 되감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건 가능하다, 그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무언가 있었다는 건 상황을 보고 알았지만, 그게 세계를 멈춘다는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지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겠지."
여왕의 손길이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머리가 이리저리 휘둘려졌다.
"많이 늠름해졌지만 아직이란다."
아직――― 여왕의 말에 오히려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별격의 닿지 못할 영역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흑린과 만상의 주인에게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말이었으니까.
"만상의 주인. 그렇게 불리는구나."
여왕은 곱씹어보듯 끄덕였다.
"죽지는 않았겠죠."
"분명히."
그녀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는 게 안일하다. 죽었다면 좋겠지만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낫다.
'영원…'
여왕이 알려준 만상의 주인의 능력은 그녀 자신의 대척점에 있는 힘. 촌각을 영원으로 늘리는 것. 이제야 이해하기 어렵던 몇 가지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목이 재생하는 순간을 보지 못했던 것. 촌각이 영원처럼 긴 시간이 된 거라면 재생 스킬이 작용하는 순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자신이 말뚝과 가시에 꿰뚫렸던 것 또한. 촌각에 담긴 영원처럼 긴 순간을 인식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도 알 수 없었던 거다.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니 불가해라는 이름이 그토록 어울릴 수 있을까.
"……."
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불합리하다. 여왕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면 짐작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런 힘에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마지막에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여왕과 싸우면서 지쳤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러고도 자색의 흑호가 아니었다면 도망치지 못했을 터. 여기까지 와서 성장해야 할 이유를 새삼 실감했다.
그나마 금방 돌아오진 못할 거라는 게 위안거리였다.
그만한 힘을 썼으니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터.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그 유예와 같은 시간 안에 같은 반열에 올라야만 한다.
여왕마저 스러져가는 지금, 그녀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달리 없으니까.
지금 이대로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 없다. 승산 이전의 문제. 자신이 수십 명 있더라도 마찬가지. 다음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감사합니다."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그 능력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같은 반열에 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네게 짐을 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면목 없다는 듯 여왕의 속눈썹이 내리깔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잘못일 리가 없다. 온전한 모조 엘릭서를 건넸더라면 분명 승리한 건 그녀였으리라.
만상의 주인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절반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지만 새삼 아쉽게 느껴졌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하고서.
"후회하지 말렴. 아가는 최선을 다했잖니? 오히려…"
"미리 알고 모조 엘릭서를 넘겼더라면 달라졌을 겁니다."
"그걸 누가 알 수 있었겠니? 환계를 지키지 못한 건 주인인 내 부덕이란다."
"징조는 있었습니다. 단서는 부족했지만 추론할 수 있었을지도…"
그런 말이 몇 번이고 오가자 여왕이 웃음 지었다. 멍하니 올려다보니 입을 가리고 재밌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 미안하구나."
사과하면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비슷한 말을 하며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우스운 상황에 여왕이 손사래 쳤다.
"이렇게 가다간 끝이 없겠어."
"……."
"정말, 마지막에 아가를 만나 다행이야. 맘 놓고 갈 수 있게 해주겠니?"
여왕이 자신을 끌어안은 것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고서 여왕은 처연하게 말했다. 낮은 음색의 목소리로 부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후, 환수들을 지켜달라고. 아이들을 부탁해도 되겠느냐고.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대답을 듣고 여왕은 안심했다며 웃었다.
이미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고 덧없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거스르려고 하지 않고서. 마음먹으면 그럴 수 있단 걸 알고 있을 텐데.
"……."
차마 정수를 취하고 격을 쌓으라고 말할 순 없었다. 이전의 격을 되찾진 못하더라도 연명할 수 있을 거라는 그 말만큼은. 여왕이 어떤 마음으로 환계를 만들었는지 아는 늑대로서는.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
어젯밤 이후 백소율은 어디 꼭꼭 숨어 있기라도 한 건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더니… 평소 같았으면 방에 와서 자신에게 어필하거나 홍유리와 싸웠을 텐데.
백소율에 대한 문제도 생각해야겠지만, 슬슬 움직여야겠다고 느꼈다.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릴 준비를.
이 넓은 바다에서 놈을 찾는 것도 힘들겠지만,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도 더 강해져야만 한다.
다행히도 그 길은 열려있다. 다음으로의 도약은 몰라도 아직 성장할 여지는 남아있으니까. 몬스터를 먹어치우고 강해져야만 한다.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히고 숙련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너머.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준비가 더 필요하다.
'흑린.'
감정을 먹는 대가로 힘을 빌려주는 검은 도깨비불. 여왕과 만상의 주인과 같은 반열에 있을 게 분명한 초월자. 또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유혹을 속삭이는 정체불명의 존재.
만상의 주인과 맞서기 위해 그것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건 바다의 재앙을 먹어 치운 다음이 되리라.
***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겠나?"
"걱정 감사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일을 그르칠 거라곤 생각지는 않네."
창선의 말에 홍유리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평소의 그녀를 아는 이들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다소곳한 모습. 여명의 클랜원이라면 입을 떡 벌릴지도 모르나, 대화하는 상대가 상대였으니 당연한 반응. 그도 그럴 것이 창선이었으니까. 칠영웅의 수좌인 그의 이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아마 여긴 없을 거라 생각하네만…… 혹시라도 그가 있다면 내게 알리게."
필경 강훈을 말하는 것이리라. 홍유리가 미미하게 끄덕이자 창선은 낮은 목소리임에도 마력을 담아 모두에게 똑똑히 들리게끔 말했다.
"준비하게. 들어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