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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35화 (235/407)

〈 235화 〉 #99 상념 (5)

"아, 아직인가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백소율의 모습에 아넬라는 픽 웃어버렸다. 종일 그녀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이유. 바로 자신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기다려요. 아, 토마토 먹을래요?"

백소율은 도리도리 고개만 저었다. 토마토가 아니라 뭘 주더라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혹시 어제 멋대로 가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 어이없어하진 않을까.

"다리 좀 그만 떨어요. 복 날아간다잖아요?"

"……속담도 아세요?"

"여기서 3년 살았다니까요? 서당 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백소율은 테이블 위에 몸을 엎드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알파]

주소록에 딱 하나. 하트가 적힌 그룹에 속해있는 이름. 보고만 있어도 달뜬 숨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앞으로 사흘 아니, 봄이 오기 전이랬으니 고작 이틀.

심장이 콩닥거려 터질 것만 같다. 얼른 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감과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다.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상상하기 싫어도 자꾸만 떠오른다. 물론 그가 거절하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니, 못한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이젠 도무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토악질이 치밀어 오른다. 순식간에 불쾌해진 기분을 티 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

"아직인가요?"

"자꾸 물어보지 말고 기다려요. 당겨서 안 되면 밀어야죠. 무슨 소도 아니고 미련하게 당기기만 할래요?"

"……."

"사실 이 정도는 미는 것도 아니에요. 일주일 정도는 보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아넬라는 푹 한숨 쉬었다. 눈동자에 담긴 애절함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정말 중증이구나 알려준다. 세상에, 이래서 어떻게 스퀘어에 오겠다고 한 거람? 상사병의 대상이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이해는 한다. 그래. 그건 좋은데 고작 몇 시간 참는다고 아랫입술을 질끈 무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을까.

"휴. 너무 질척거리면 미움받아요."

"……."

"반대로 생각해봐요. 알파가 이렇게 질척거리면 좋을 것 같아요?"

백소율은 곰곰이 그 모습을 떠올렸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찾아오고 요구하고 원하는 알파…?

거기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자기 전에도 자고 일어나서도 일 년 365일 52주 12달,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 내내 알파와 함께할 수 있다고……?

화아악-

자신이 들고 있는 토마토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군침을 삼키는 목울대를 보고 아넬라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진짜 중증이네."

아무것도 모르고 갸웃거리고 있는 감마의 턱 아래를 긁어줄 뿐. 하기야 따지고 보면 감마라는 이름부터가… 아넬라는 끌끌 혀를 찼다.

***

페리를 재웠을 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홍유리… 아니, 백소율이었다.

하루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오밤중에 걸어온 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달뜬 숨을 고르는 듯 심호흡하는 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모로 꺾었다.

[들리세요?]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 밤중이라 그런지 유독 그녀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든다. 음량이 큰 거라 여긴 늑대는 핸드폰의 볼륨을 낮췄다.

"그래."

[죄송해요. 어제 멋대로 가버려서…]

면목 없다고 사과하는 말을 늑대는 가만히 들었다. 굳이 사과할 것까지도 없을 텐데… 붉은 얼굴로 도망친 걸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니까.

그 이후, 통화로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물은 건 무엇을 했느냐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한 거라고는 강태준과 대화하거나 여왕을 만나고 종일 사냥만 했을 뿐이다.

새삼 실감한 거지만, 이제 어지간한 몬스터로는 경험치가 오르질 않는다. 고작해야 40%. 반나절 동안 바닷속에 들어가 먹어 치웠는데도 이렇다. 인근 해역에 있는 몬스터가 하나같이 고만고만하다는 게 문제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 이야기를 할 순 없어 그냥 몬스터를 사냥했다고만 알려뒀다.

[힘들진 않았나요?]

아무렇지도 않다. 이제는 무미건조한 사냥의 반복일 뿐이니까.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걱정하는 목소리는 순수한 안도만을 담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진심인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정말 매몰차게 끊어낼 수 있을까 하는. 한심하고 이기적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걸까. 아직 이틀이 더 남았지만…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만 한다.

[혹시 선생님은…]

망설이던 목소리가 홍유리의 안부를 묻지만 답할 수 있는 건 없다. 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백소율이 건 통화를 홍유리가 걸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문득 걱정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냥, 조금 바빠서 연락이 늦는 거라고 믿으면서.

"아직 연락은 없다."

[그런가요……]

흐린 말끝과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심정을 알려준다. 볼 때마다 싸우는 앙숙이 되고 말았지만, 이전의 모습을 알고 있는 늑대로써는 어떻게든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다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깊은 상념에 빠져있을 때,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했다.

[통화 누구야?]

[설마 백소율?]

[안 끊어? 뒤진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 걸까. 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문자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모르는 사이 부재중 통화가 제법 와 있기도 했다. 갑자기 웃자 의아하다는 듯 백소율이 물었고 홍유리의 문자라고 알려주었다.

[선생님답네요. 죄송해요. 더 끊기 싫어졌어요. 약속하셨죠? 원하는 만큼 통화해주겠다고]

"……."

[그러니까 오늘은 못 보내드리겠어요]

확실히 그런 약속은 했다.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에 머리를 싸맨 늑대는 방법을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았다. 일단 홍유리의 문자에 답장부터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정 끊고 싶으시면 한마디만 해 주세요]

"……?"

[사, 사랑한다고…]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백소율. 실소한 늑대는 기꺼이 그녀의 요청에 응해주었다.

[……!]

깜짝 놀란 듯 빠르게 끊어진 통화. 잠깐 핸드폰 화면을 지그시 보던 늑대는 곧 홍유리에게 통화를 걸었다.

***

심장에 안 좋다…….

처음으로 들은 말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내 콩닥거리던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정말, 정말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망설이다가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뇌리에서 사랑한다는 그 말이 몇 번이나 재생된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선생님의 방해에 약간이나마 느꼈던 짜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왔다.

정말 해 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뒤늦게 아쉬움이 몰려왔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이라도 해두는 건데. 바보 멍청이 바보바보바보……! 내가 원래 이렇게 멍청했나 한탄하며 붉게 익어버린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켜자 그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러자 전기가 흘렀다. 어느새 거칠어진 달뜬 숨을 뱉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부족해. 이걸론 한참이나 모자라다. 겨우 베갯속에 들어 있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향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 둔 검은 터럭을 한 손 가득 꺼내 향을 맡은 백소율의 눈가가 점점 흐리멍텅해져 갔다.

***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개운하게 일어나졌다. 수련도 빼먹지 않았는데 머리는 맑고 만성피로에 말린 어포처럼 늘어졌던 몸은 활기를 되찾았다.

……왜? 특별히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컨디션이 좋나? 갸웃거린 이은하는 쌀쌀한 날씨에 걸맞게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홀짝였다.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함에 추위가 가시고 몸이 녹아내린다.

"출근하기엔 이르지 않나?"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은하는 컵을 떨어뜨렸지만, 늑대는 차분하게 받아내 다시 건넸다.

"덜 마셨군."

"아, 응. 고마워?"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지고 보면 알파가 놀라게 해서 놓친 건데 고마울 일인 걸까? 아니, 결국 놓친 건 나니까…?

아리송한 의문은 늑대가 옆에 앉은 순간 사그라졌다.

쌀쌀한 새벽녘의 겨울 날씨를 밀어내듯 맥박이 빨라졌으니까. 피가 돌아 따뜻해진다. 가볍게 뛰는 고동 소리를 리듬 삼아 즐기며 이은하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멜로디에 늑대가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글쎄? 컨디션이 좋나…?"

스스로도 갸웃거리는 말에 늑대는 미미하게 끄덕였다.

"동생이 온다는 게 오늘인가?"

"응. 혹시 바빠?"

"…괜찮다."

어쩐지 바쁘길 바라는 듯한 말. 여전히 아리송해 보이는 이은하가 고맙다며 말했다. 잠깐 말이 오가지 않자 슬슬 페리가 깨어날 시간이라 여긴 늑대는 옥상 문을 열고 내려오려 했다.

"저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혹시, 뭐 고민이라도 있어?"

머뭇거림과 망설임을 담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원래는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몇 번에 연이은 고민이 늑대의 무거운 입을 열게끔 했다. 아니 애초에 이은하도 아주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짐작이 간다는 투였다.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갸웃거리며 묻는 말에 늑대는 끄덕였다. 졸업식 날부터 지금까지 쭉 골머리를 싸매게 만든 문제였으니까. 어떤 선택을 해도 끝이 좋지 않다.

의리를 지켜 백소율을 거절한들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테고, 상처가 늘어갈 뿐이리라.

반대로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홍유리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다.

원래 이렇게 우유부단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것만큼은 정답이 없다. 차라리 몬스터와 싸우는 게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을 뿐이지 기대한 건 아니었기에 일어나려는 늑대는 옥상 문을 나서기 전, 이은하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말. 늑대는 이은하가 꺼낸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남은 하루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

제법 오랫동안 이어지는 강행군. 홍유리는 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렸다. 도대체 인원이 얼마나 많은 건지 또 얼마나 개미굴을 파놓은 건지.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걷는 시간과 고작 3시간밖에 되지 않는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쉬지도 않을 만큼의 강행군. 네버랜드 공략대를 연상케 한다.

"șarpe de foc."

간단한 영창에 홍유리의 손끝으로부터 불꽃으로 이루어진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듯 도망치는 말단을 붙잡곤 이빨을 박아넣는다.

뜨거운 불이 마치 뱀의 독처럼 파고들어 발목의 신경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홍유리는 관심 없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지트 곳곳이 불타오르는 와중에 홍유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통째로 다 태워버리고 싶다고.

"슬슬 후퇴하겠네."

아지트를 반파시킨 창선의 말에 가볍게 끄덕였다. 아지트 내에 있는 물건과 정보를 찾아야 하기에 박멸할 순 없다는 게 문제였지.

6번째 아지트를 정리했을 땐,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어지간한 헌터조차 혀를 내두를 강행군이었지만, 여기에 어중간한 헌터는 없다. 최소가 A클래스에 상응하는 인물들이었으니까.

홍유리는 가만히 노을을 올려다봤다.

어쩐지 알파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걸 보곤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빨리 밤이 찾아오면 좋을 텐데… 그래야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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