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99 상념 (6)
조용한 밤. 시침은 어느새 10시를 넘어가고 있다. 좀 더 기다릴까 생각하던 백소율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보통이라면 늦은 시간이겠지만, 잠들지 않는 그에게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리라.
연결음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뛴다. 아넬라는 중증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럴수록 사랑이 깊어진다는 증거일 테니까.
[백소율?]
머잖아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소율은 꼴깍 침을 삼켰다. "네. 저예요." 하고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괜찮았겠지? 들리지 않게 심호흡하며 가라앉히다가,
[무슨 일이지?]
용건을 묻는 말에 조금 씁쓸해졌다. 이게 그가 내게 느끼는 거리감인 걸까? 설마 용건이 없으면 전화하지 말라는… 그럴 리 없단 걸 알고 있는데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만다.
정말이지, 선생님이 부럽다. 뺏어버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알파의 성격이라면 자신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가 좋으면서도 야속하다. 그러면서도 두 번째라도 좋으니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만다.
쭉 곁에 있다 보면 한 번쯤은 첫 번째가 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해서.
당장 내일로 성큼 다가온 약속의 날. 불안이 가득해져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어쩌면 또 자신을 밀어낼지도 모르는 그 목소리를.
"그냥, 그냥 전화했어요."
[……]
"안 되나요…?"
잠깐 정적에 불안해진다. 만약 귀찮다고 내치면 어쩌지? 그냥 전화하지 말 걸 그랬나. 조금 후회하고 있는 와중에 또 그의 말 한 마디에 감정이 요동치고 흔들렸다.
[괜찮다]
고작 세글자 말에 바보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한심하면서도 좋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미리 생각해 둔 화제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점점 심해진다. 그래도 그에게만큼은 바보가 돼도 좋아. 그냥, 보고 싶다… 하지 말라고 했지만, 충동이 강해져 참는 게 쉽지 않다. 애써 침대 위에 몸을 뉜 백소율은 문득 떠오르는 것을 물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떻게?]
"알고 싶어요. 제가 모르는 당신을."
[……]
"안 되나요?"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알파의 차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재밌는 이야기도 아닐 거고]
"상관없어요."
[그래?]
조심스레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 백소율은 그날, 잠들기 전까지 알파의 목소리를 들었다.
***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늑대는 반대로 그녀와 있었던 일을 되돌아봤다.
하수도의 재앙을 막음으로써 일어나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마녀의 재앙. 이단의 탕아들이 움직임에 따라 아카데미로 향해야 했던 날. 바로 백소율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나는, 나는 살아도 괜찮은 건가요? 내가, 내가…!'
자신이 노려진단 걸 깨달은 백소율은 스스로 미끼가 됐다. ……결국 붙잡히고 말았지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매일같이 꾸는 악몽이 그녀를 좀먹었으리라. 쫓고 쫓아서 꼬리와 꺾인 손가락을 쓰러뜨린 다음에야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마녀의 재앙은 끝났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작 속의 마녀가 나타나지 않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 그녀가 마녀가 되지 않고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몇 번이고 막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 약속했다. 그녀의 악몽을 없애겠다고. 울며 기다려달라는 백소율을 뒤로 하고 탕아들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다음 그녀를 만난 건 네버랜드의 일이 모두 끝난 뒤. 탕아들에게 노려지던 백소율을 여명이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자마자 자신을 껴안았던 것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떨결에 피했더니 분해하던 그녀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 호의를 보내왔던 그녀. 백소율이 아니었다면 홍유리는 사과하지 못했을 테고 파탄 난 관계가 개선될 일은 없었을 거다.
하나하나 추억을 떠올린 늑대는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제 28일. 2월의 마지막 날. 3월이 지나서도 겨울 날씨는 한동안 이어지겠지만, 봄이 오기 전이라면 오늘이 맞다.
2월에 들어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만큼 사고가 많았으니까. 탕아들의 침공으로 서울이 무너지고 자색의 흑호는 죽음을 맞았다. 만상의 주인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으나 분명 언젠가 돌아오리라.
또한, 머지않아 예정된 여왕의 죽음이 성큼 다가오리라. 이미 그녀의 몸 상태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4월이 오기도 전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가장 골치 아팠던 건 백소율. 그녀에 대해선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몇 번이나 생각해봤다.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싫지 않아서 고민이었다.
누군가의 조언이나 충고는 들을 수 있겠지만,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져야만 한다.
홍유리를 배신할 순 없고, 백소율을 상처 입히기도 싫다. 그 이기적이고 못난 모순된 생각이 계속 발목을 붙잡아왔다.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더 단순했다.
정답이 없다면 모르겠다면 감정에 맡기자고. 늑대는 심장 어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과연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고서.
"……."
감정에 맡긴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
고상하게 차를 마시는 환영의 나비. 강태준은 그녀가 알려준 사실을 곱씹었다.
며칠에 걸친 이단의 탕아들. 생포한 간부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작업은 절대 쉽지 않았다. 끝까지 입을 꾹 다물고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아 어떤 작업이 필요했다.
바로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 제법 저항이 심했지만 적당한 고문과 환영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로 얻어낸 정보는 역시 썩어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 고원이 가진 정보 말고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변절자들이 많다는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멸망과 종말이라는 믿기 어려운 진실.
"터무니없군요."
강태준은 실소했다.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이 세상에 갑작스레 닥친 이변의 진실. 멸망과 종말이라니. 사이비 종교에서나 믿을 법한 것을 놈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단 게 우습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단의 탕아들. 반대로 놈들의 존재가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신빙성을 불어넣는다. 고작 그런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만들어질 만큼 허술한 조직이 아니니까. 하물며 그 꼭대기에 있는 건 불가해의 존재, 만상의 주인. 그리 생각한다면……
"종말의 일부, 전조가 멸망……"
강태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환영의 나비가 알린 정보는 많지 않다.
다만, 역병과 질병마저 멸망의 일각이며 그 멸망조차 종말의 일부라는 걸 누가 쉽사리 믿을 수 있을까. 인류가 쓰러뜨리지 못한 재앙이 고작 일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사태가 멸망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그래."
"……도대체."
강태준은 침음했다. 재앙과 던전을 비롯 몬스터의 존재까지 그 전부가 멸망이라고 간부는 그리 말했다 한다. 하지만 정작 놈조차 종말의 정체는 알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멸망을 막으면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뿐.
"……."
이단의 탕아들, 놈들이 엘릭서를 만들려는 이유는 종말을 막을 어떤 존재를 깨우기 위해서…… 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존재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모르더군."
어쩌면 간부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지 그 정보조차 거짓일지도 모른다. 엘릭서를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놈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그야말로 신이라도 돼야 할 테니까.
그런 존재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 여명에 머물고 있는 누군가에게 생각이 미친 강태준은 조심스레 의자를 집어넣고 일어났다.
여왕이라 불리는, 알파가 신이었다 말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놈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답을 줄 수 있는 건 분명 그녀밖에 없을 테니까.
***
차가운 바람이 부는 옥상의 벤치에서 그를 기다리는 와중 술렁이는 마음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약속을 한 건 아니다. 확실하게 오늘이라고 기약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올 거라고 믿는다. 할 수 있는 노력은 전부 했다.
차이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싫다.
'너무 질척거리면 미움받아요~?'
놀리는 듯한 아넬라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너무 질척거렸을까? 조금 자제해야 했을까? 그래도 네가 틀린 건 아닐 거라고 알파는 그렇게 말해줬는데…….
그때쯤,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반색한 백소율은 고개를 돌렸지만, 거기에 있는 건 알파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소녀가 한쪽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노골적인 조소를 보였다.
"어쩌지? 알파 안 오는데."
"……선생님?"
어떻게? 고원과 함께 탕아들을 쫓으러 갔다고 들었는데. 설마 벌써 끝내고 돌아온 걸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왜? 될 줄 알았어?"
노골적으로 비웃는 목소리에 백소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돼. 꿈도 꾸지 마. 턱도 없어."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다 주는 것 같다. 마치 가로막는 벽을 보는 것 같다. 선생님만 없다면 부글부글, 싫은 감정이 끓어오른다.
원래는 내 자리였는데. 저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표독스럽게 볼수록 조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망이 들고 감정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등~신. 백날을 기다려 봐. 네 차례가 오는지."
"……."
"알파도 힘들지. 너한테 어울려 주느라고 시간 버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그리고 무엇보다."
"왜…"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말하기도 전에.
"너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비수처럼 꽂혀오는 말에 굳고 말았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애써 외면하던 진실을 헤집고 끄집어낸다.
"발목 잡지 말고 꺼져. 필요 없으니까."
홍유리는 본인과 자신을 한 번씩 가리키고는,
"나랑 너랑 어느 쪽이 도움 될지는 명확하잖아?"
찬 바람이 휑하니 훑고 지나간다. 부정적인 감정과는 달리 부정할 말은 없다. 말을 잃은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기다란 검지로 가슴을 쿡쿡 찌른다.
"백소율."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주제 파악 해."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백소율은 등이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불쾌한 기분이 든다.
"……꿈?"
어느새 잠들었던 걸까.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멍하니 생각하다가 머리를 짚었다.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꿈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무례 때문에. 세상에,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해놓고 멋대로 잠들다니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이 답을 받을 당일이란 걸 깨닫고 침울함이 밀려왔다.
…망했다. 환멸하게 됐을지도 몰라.
무기력하게 침대 위를 굴렀다. 깨어난 감마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한숨만 나온다. 침대에 등이 달라붙은 것처럼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기쁜 날이어야 할 텐데. 그토록 기다린 날이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실패.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것이리라.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하던데 자신이 정말 그의 옆에 서 있어도 되느냐 하는 죄의식이 고개를 든 걸지도 모른다.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하니 조금 암담해진다. 또 용기 낼 수 있을까……
"소율 양. 일어났어요?"
빼꼼 고개를 내민 아넬라가 자신을 부르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꿈은 꿈이고 일단은 씻어야지. 샤워를 마쳤는데도 노곤함이 남았다.
씻었는데도 몽롱해서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식사를 마치고 핸드폰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각은 고작 9시간. 심호흡한 백소율은 알파의 연락이 오기만을 멍하니 기다렸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