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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37화 (237/407)

〈 237화 〉 #100 대답

늑대를 기다리던 백소율은 숟가락을 입에 넣고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22:07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잠깐 올해가 윤년인가 싶었으나 아니다. 답을 주는 거라면 분명 오늘이 맞다. 그런데도 어째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걸까. 초조함과 답답함에 주소록을 열자 아넬라가 눈을 부라렸다.

"절대 먼저 걸지 마요."

"……."

"두 번 말 안 해요. 절대 걸지 말라 했어요.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대체 이게 뭐예요?"

"……."

"진짜 사람, 아니지. 아무튼 잘못 봤네. 화도 안 나요? 시간이 몇 신데, 어떻게 지금까지 문자 한 통을 안 줄 수가 있어요?"

자기 일처럼 씩씩거리는 아넬라. 솔직히 그 말이 틀리진 않아 백소율로서는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개무시 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럴 거면 그냥……!"

그 말에 아차 싶었던 아넬라는 꾹 입을 다물었지만, 그 뒷말을 상상하기란 쉽다. 침울해진 백소율을 보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알파에 대한 강한 반감이 들었다.

세상에,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설마 까먹은 거라면 이 상사병 아가씨를 대신해 쏘아붙여 주리라. 만약 알고도 바람맞히는 거라면 얘기할 거리도 못 된다. 그동안 제법 정든 백소율이 슬퍼하는 건 싫었으니까.

어색한 저녁 식사가 그렇게 끝나갈 때쯤,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백소율의 안색이 단번에 밝아졌으나 들어온 건 알파가 아니라 환영의 나비.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지나친 그녀의 안색이 이상하게 좋지 않아 보였다.

요 즈음, 탕아의 간부를 심문한 건 그녀였을 터다. 그것 때문에 피곤한 걸까?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묻는다고 대답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

"…옥상에 있더구나."

다소 뜬금없는 말에 백소율은 휘둥그레 눈을 뜨고 고개를 숙였다. 황급히 그녀가 뛰쳐나가자 아넬라는 그렇게 좋을까 한숨을 쉬었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을 비벼야만 했다.

……잘못 본 걸까?

일순이나마 어머니의 손이 떨리는 것 같았는데. 착각한 거라 여긴 아넬라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넘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아넬라를 보곤, 환영의 나비는 긴 숨을 내뱉었다. 아까 강태준에게 들었던 믿기 힘든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

몇 번인가 노크하고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오자 강태준은 문고리를 돌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요정들이 거리를 두고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마치 겁을 집어먹은 아이처럼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다.

"뀨우?"

그와는 달리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정용. 알파의 애완용인 페리는 보이는데 어째선지 알파 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있으면 좋았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다.

그리고 그 너머에 그녀가 있었다.

알파가 이르기를 여왕. 지금은 몰락하고 만 신이었던 존재.

어쩌면 유일하게 모든 해답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이. 아니,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강태준은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은을 실로 뽑아낸 듯, 기다란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녀의 자태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거룩함이나 신성함이란 단어를 사람의 형태로 빚어내면 그녀가 되지 않을까. 알파가 그녀를 신이라 지칭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그런 여왕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왜 왔는지 알 것 같구나."

안에서 울리는 듯, 뇌리에 새겨지는 목소리. 과연 이번이 몇 번째 만남이던가. 세 번째였나 네 번째였나. 가만 생각하던 강태준은 여왕의 이어진 말에 이채를 띠었다.

"멸망과 종말. 진실을 알고 싶은 거니?"

"알고 계시는군요."

역시나. 마치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전부 알고 있다. 단서 하나 없음에도 통찰하는 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난 영역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스킬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건 결과는 같다.

중요한 건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으리란 거였다.

"멸망이 종말의 일부이며 재앙은 그 멸망의 일각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단다."

긍정하는 말에 강태준은 침음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럽, 대륙 하나에서 인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고작 일부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런 것에 인류가 수 천년간 뿌리내린 찬란한 문명이 고작 수십 년 만에 지워졌다는 사실에 강태준은 실소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여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강태준은 그걸 긍정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진실을 추궁했다.

"도대체 종말이란 게 뭘 뜻하는 겁니까?"

종말――― 그 이름에 떠오르는 건 끝이라는 단어. 어떤 형식으로든 인류는 언젠가 분명 끝을 맞으리라. 영원과 영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이상에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막연하다고 생각했다. 알파가 재앙을 막은 뒤에는 더더욱. 인류의 위기는 걷히고 있다 믿었다.

그런 만큼 종말이라는 말을 듣고도 실감 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다. 종말이란 게, 끝이라는 게 정말 다가온다면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며 운명에서 벗어날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종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당연한 물음에 여왕은 다소 뜬금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지는 질문을 던졌다.

"진리를 알고 있니?"

"진리 말입니까?"

참된 이치. 그 뜻은 물론 알고 있지만, 과연 여왕이 묻는 게 사전적인 뜻일까? 강태준은 의문을 품었다.

"신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두 번째 물음. 여왕을 직시했다. 신앙 같은 걸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알파가 말한 신은 그녀였으니까. 빤한 시선에 여왕은 눈을 감았다.

"나는 신이 아니란다. 그렇게 불렸을 뿐이지."

알파는 그녀를 신이었던 이라 불렀으나 정작 그녀 자신은 부정했다. 아니, 부정할 수밖에 없다…….

정말 자신이 신이라면 종말을 막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아이들을 지켜냈을 테니까.

그러지 못한 자신이 신이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불려서도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이 아는 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한없이 가까운 것은 있다. 영육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 무기질적으로 인과와 법칙을 부여하는 존재. 언뜻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것을 각기 법칙, 존재, 질서, 신, 우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으며 여왕은 그것을 진리라 불렀다.

"종말은 진리의 뒷면이자 뒷 편."

"……."

"별의 순환을 위해, 새로 탄생할 세계를 위해 오래된 세계를 무너뜨리는 불가항력."

"그게… 종말입니까?"

되묻는 말에 여왕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래. 멸망의 다음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끝이란다."

강태준은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솔직히 진실을 듣고도 막연하게 느껴져 실감이 나진 않았다.

……여왕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기 전까진.

강태준은 어느샌가 전혀 다른 공간에 있음을 알게 됐다.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 무의 세계. 아니, 아니다. 조그마한 잔해가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다.

부스러기 같은 그것들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자, 시야에 담기지도 않을 만큼 한없이 거대해졌다. 말문을 잃은 강태준은 곧 그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별이라고. 지구나 화성 같은 행성도 있었고 불타는 초신성이나 조그마한 소행성도 있었다.

다만, 산산이 부서져 잔해만 남아 이곳저곳을 떠돌 뿐.

"……."

아득한 우주. 강태준은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여왕의 눈을 빌어 엿본 이곳이야말로 끝을 맞이한 세계라는 것을. 여기까지 보고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현실이라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아득한 것이었으니까.

네버랜드? 역병? 질병? 자색의 흑호? 바다의 재앙? 인류? 멸망?

이건 고작 그런 얘기가 아니다. 여왕을 통해 알게 된 진실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감당할 수 없는 암담함. 그렇기에 실감 날 리 없다.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저 현실감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다.

스케일이 너무나 다르다. 재앙 같은 괴물이 아니라 수많은 별을 먹어치우고 끝을 가져오는 신적인 존재. 이야기 속의 신화와는 다르다. 고작 신화 속의 인격신 따위와는 전혀.

어이하여 종말이라 부르는지 알 것만 같다.

이게 끝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종말을 맞이한 세계를 보던 강태준은 자신의 눈을 파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아버린 이상 전부 덧없게 느껴진다. 어느샌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지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런 걸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던전의 출현. 몬스터의 발생. 재앙의 존재.

인류를 시시각각 끝으로 몰아가던 그 전부가 고작 종말의 일부이며, 유예와 같은 것이란 사실을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멸망을 막은 뒤에 찾아오는 게 종말이라면 재앙을 쓰러뜨리는 건 옳은 일일까. 오히려 종말을 앞당기는 게 아닐까. 강태준은 이제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태 해왔던 모든 일이 파국으로 치닫는 우행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밟고 있는 바닥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발밑, 이 세상에 대한 불안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두려움과도 다른 막연하고 아득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강태준은 힘겹게 물었다.

"알파는… 알고 있습니까?"

여왕은 천천히 끄덕였다.

"아가는 나아가기로 했단다."

강태준은 눈을 감고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자신이 원했으나 갑작스레 들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다.

재앙, 멸망을 막으면 종말이 찾아온다. 그런데도 알파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종말은 찾아오게 된다지만, 멸망을 막는 게 종말을 앞당기는 거라면 알파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

모르겠다…. 강태준은 이마를 짚었고 여왕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거란 걸 알면서도 담담히 받아들일 이는 많지 않다. 절망에 빠져 좌절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 저항하거나.

바로 자신이 그랬고, 단 한 번도 종말을 막진 못했다.

진리를 거부하는 것. 설령 그것이 '이단'이라 할지라도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꺾여버리고 말았다. 불가항력이라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체념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늑대의 선언은 참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종말을 막겠다는 그 포부가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체념하고 만 자신에겐 남아있지 않은 감정이었으니까.

여왕은 폐부에서 울컥 치솟은 붉은 핏물을 애써 되삼켰다. 나날이 악화해가는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자신은 그 끝을 볼 수 없으리란 것.

늑대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 결말이 어떤 것인지 보지 못한 채 사그라지고 말리라.

여왕은 자신의 아이들, 요정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천천히 고른 숨을 내쉬었다.

***

알파의 모습이 보였지만, 문이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밤중에 꾸었던 악몽이 자신을 망설이게 했다.

'주제 파악해.'

그 말이 주박처럼 사로잡는다. 누가 더 도움이 되겠냐는 비웃는 말. 그래. 선생님의 말이 옳다.

……정말 알파에게 자신이 필요했다면 그가 먼저 자신을 원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역시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막상 다가온 이 순간이 후회된다.

내게 조금만 더 주어진 시간이 있었더라면 하고서. 그랬다면 그 옆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문에서 손이 떼어져 간다.

오늘 같은 날 악몽을 꿨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여전히 벤치에 일어나지 않는 그로부터 멀어지려 한 백소율은 목도리 사이에서 고개 내민 감마가 빙긋 웃는 것에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문을 열 용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아넬라의 말이 맞으니까. 여태 연락조차 없다는 건 돌려 말한 거절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치 없이 찾아온 게 잘못일지도 모르니까. 심장이 찢기는 것만 같은 아픔 속에서 백소율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돌아가자. 돌아가서, 다음을 기약하자. 몇 번이고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뀨웅!"

그 생각은 감마의 울음과 함께 사그라졌다. 피부에 닿는 쌀쌀한 바람에 백소율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

어느샌가 알파의 옆에 있게 됐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한 얼굴로 감마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

갑자기 나타난 백소율을 보고 늑대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누군가에게 보내진 메시지. 글을 읽고 길길이 날뛸지 모를 홍유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욕먹는 정도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으리라.

그래도 감수해야만 한다. 지금부터 몹쓸 짓을 하게 될 테니까. 뒷감당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하더라도. 그래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소율이 직접 찾아온 이상 그럴 순 없게 됐다.

그렇게까지 한심해선 안 된다. 그녀가 다가온 만큼 자신도 다가가야만 한다.

비단 인간도 아닌 자신에게는 과한 마음을 끝없이 내비쳤으니까. 몇 번이고 다가와 준 그녀를 내치는 건 불가능하다.

머리가 아니라 감정이 그렇게 소리친다.

"……?!"

어떻게 된 영문인지 스스로도 놀란 표정의 백소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걸 보고서 늑대는 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백소율."

"네, 네."

긴장한 것처럼 더듬는 말.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 늑대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너 하나만을 바라보진 못할 거다."

"……."

늘 자신을 바라보는 사슴 같은 눈에 수심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조금씩 젖어가는 눈망울을 보며 늑대는 지금 생겨난 게 아니라, 쭉 마음 한구석에 담고 숨겨뒀던 감정을 꺼내어 소리 내 말했다.

"그래도 늘 너를 보고 있겠다."

"……!"

"그걸로 괜찮겠나?"

바람이 불어와 젖은 눈망울로부터 눈물을 떨어뜨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것이 계속해 흐른다. 그러나, 백소율은 만면 가득히 미소지을 수 있었다.

"…네!"

그 한마디가 여태 기다려왔던 말이었으니까.

――00:02

부푼 감정이 한없이 커져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옥상에 분 바람을 춘풍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렇게,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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