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 #101 준비
알파로부터 온 문자에 홍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용은 제법 길었지만 짧게 요약할 수 있다.
백소율을 받아들였다. 뺄 거 빼면 대충 그렇게 된다.
"……."
으스러지라 핸드폰을 쥔 홍유리는 당장 전화를 걸려다 와짝 인상을 찌푸렸다. 발목을 잡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았다.
"어딜 손대고 지랄이야? 이 개 같은 게!"
그건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밟고, 밟고, 또 밟고. 살구색은 찢어지고 붉은색이 흘러나와 가루가 된 하얀 것들을 물들였다. 손등에서 손목까지 확실하게 으스러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돼버렸다.
비명을 지르자 홍유리는 그제야 손가락을 튕겨 꼬리를 불태웠다. 명백한 화풀이. 세로로 갈라진 동공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불꽃이 타오른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쉰 홍유리는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목이 타는 것만 같다. 전화를 걸려던 홍유리는 아까 세게 쥐었을 때 뭐가 잘못됐는지 핸드폰이 켜지지 않자 아예 부숴버렸다.
한바탕 쏘아주고 싶은데 정작 알파도 백소율도 여기엔 없다. 맘 같아선 당장 돌아가고 싶은데 고원과 여기까지 와놓고 차마 그럴 순 없다.
뺏어버린다고 했었지? 그 건방진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상상했더니 또 끓어오른다. 내게 속삭였던 말들을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말한다고?
"……!"
빠드득- 이가 갈린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부서진 핸드폰 조각이 살갗을 찢어 핏물이 새어 나왔다. 뚝뚝 떨어지는데도 상관하지 않았다.
식지 않을 것 같은 열기도 시간과 함께 차츰 식어간다. 맡은 바 임무에 과하게 충실하며 분노 다음에 찾아온 건 후회였다.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하는. 물론 알고 있다. 같잖은 동정심. 그깟 동정심이나 안쓰러움 때문에 주지 않아도 될 기회를 줘버렸고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다.
"씨발…"
알고는 있는데 막연히 상상만 하던 게 현실로 성큼 다가오자 암담해졌다. 혹시 나한테 흥미가 가셔서, 아니면 질려서 백소율을 택한 건 아닐까. 역시 계속 곁에 있어야 했던 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배신이 아닌가.
온갖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알파가 계속 의리를 지켜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기껏 알파가 끊어낸 걸 다시 준 것도 자신인데. 화낼 자격도 없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싫다.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절대로 싫다.
막연한 상상 속에서 자신은 여유로운 승자의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베풀듯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현실로 닥치니 그러지 못했다.
늘 첫 번째로 있고 싶다. 명목상의 첫 번째가 아니라 마음속의 첫 번째로 있고 싶다는 욕심에 조급해지고 만다.
악순환의 반복과도 같은 감정의 고리가 제멋대로 구르자 홍유리는 다시 이를 갈았다. 연락도 못 하고 이렇게 된 거라면 얼마 남지 않은 여정을 빨리 끝내고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
밤이 되어, 아직 쌀쌀한 춘풍을 맞으며 백소율은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으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을 듣고서 억눌린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풀려나왔다.
그래도 이제 참을 필요는 없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백소율은 알파를 끌어안았다.
"꿈은 아니겠죠?"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늑대는 답하는 게 의미 없다고 여겼다. 마음속에 들어찬 건 이미 둘이었으니까. 촉수를 뻗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 늑대는 진중히 끄덕였다.
"절대로."
끌어안은 그대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서로의 고동을 들었다.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커지는 소리. 백소율은 눈가를 훔치며 붉어진 코끝을 쓸었다.
이제야 여기까지 왔다. 뺏기고 엇갈리고 거부당하고 이래저래 돌아왔지만 마침내. 더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또 밀어내질 거라 생각했는데… 붉어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뀨우우!"
축복이라도 하는 듯 목도리에서 튀어나온 감마가 뀨뀨 울어 젖힌다. ……이제 생각해보면 갑자기 나타난 백소율도 제법 당황한 듯싶었는데 여기 오게 된 건 감마의 제멋대로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칭찬해달란 것처럼 방긋방긋 웃는 감마의 머리를 여전히 감상에 젖은 백소율을 대신해 쓰다듬어주었다.
"슬슬 들어가지. 춥지 않나?"
"……."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 불만스러워 보인다. 뭘 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미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앞으로도 시간은 있을 거다."
늑대의 말에 백소율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백소율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고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통했다면 말은 필요 없으니까.
***
흐름을 타고 있단 건 알겠지만, 그 흐름을 읽는 게 불가능하다. 파문처럼 흐르거나 혹은 산처럼 굳건하거나 때로는 구름처럼 표홀하다. 마치 자연을 따르는 듯한 움직임이 시시각각 변한다.
눈으로 보고도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오른쪽인가 하면 왼쪽. 아래인가하면 비스듬히 내려친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
"이 영감탱이가…!"
겨우 창대를 쳐낸 간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고선 이를 악물었다. 그 앞에 쓰러진 간부만 벌써 둘. 침공했던 이들의 반수가 전멸했지만, 서울을 무너뜨렸으니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다. 광휘를 빼앗긴 고원의 분노는 식지 않는다. 그 결과, 늙은 신선이 창을 들게 했다.
이제 조직은 괴멸에 가깝다. 모조 엘릭서의 기반이 되는 시설 전반이 무너졌고 아지트의 태반을 잃었다.
침묵하는 입이 있다면 몰라도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이미 연락이 두절된 간부들이 전부 죽거나 사로잡힌 거라고 치면 남은 이들은 기껏해야 한 자릿수. 고원뿐만이 아니다. 스퀘어, 전쟁의 신전, 각국의 클랜까지 들고 일어나 들쑤시고 있다.
전부 버리고 물러나야 했는데 망설인 결과가 이것. 하필이면 창선을 만나고 말았다…….
"선택해라. 사로잡힐지 죽을지."
일흔을 넘은 노인의 기백이 아니다. 이것이 칠영웅. 과거의 전설은 아직 빛이 바래지 않았다. 태산을 앞둔 기분에 간부는 마른침을 삼켰지만, 빛무리가 모여들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신발 속에 숨겨둔 스크롤을 찢었으니까.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당황한 창선은 말을 잊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빛무리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게 착각이었다.
"……?!"
스크롤은 발동했다. 제법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째서? 아니, 어떻게? 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차디찬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잘 알았다."
심장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기백에 밀려 뻣뻣이 굳은 목을 내려다보니 창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현상에 넋을 잃은 간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숨이 끊어졌다.
가볍게 창을 뽑아낸 창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 있는가, 이 친구야."
창끝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탕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변절자의 조직까지 괴멸에 가까워졌는데도 여전히 강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
커튼 너머로 비춰오는 아침 햇살. 백소율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슬슬 페리가 일어날 때가 됐으니까.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온 늑대는 마침 자신을 찾고 있던 페리와 마주쳤다.
"뀨!"
자신을 보자마자 펄럭펄럭 날아온 페리가 언제나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
?킁킁거리는 코가 냄새를 맡고선 자꾸만 갸웃거렸지만,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금세 아무래도 좋아졌는지 방긋거렸다.
실소한 늑대는 금세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홍유리를 찾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 어지간하면 어젯밤에 전화가 걸려왔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게. 하다못해 문자라도 줬을 텐데… 그만큼 바쁘거나 혹은 무슨 일이 생겼거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강훈의 존재. 만약 탕아들의 마지막 저항으로 강훈과 도망친 간부가 반격한 거라면 창선이 함께하는 고원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 이단의 탕아들이라는 조직 자체가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아무리 침공이 막혔다 한들 남겨둔 저력이 반드시 있을 테니까. 제대로 된 반격을 당했다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혼자 보낸 게 실수였을까. 아니면 강훈이라도 만난 걸까. 창선과 고원까지 있는데 당했다는 건 설마 만상의 주인이 돌아오기라도 한 건 아닐까. 고민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잠든 백소율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당장 찾아가는 것보다도 일단 확인해보는 게 우선이다. 그 길로 클랜장실에 들른 늑대는 서류에 파묻혀있는 강태준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무슨 일 있나?"
"홍유리와 연락이 닿질 않는다."
끄적이는 펜 소리가 멈췄다. 종이 뭉치 너머에서 강태준이 물었다.
"언제부터?"
"어젯밤."
"……확인해보겠다."
강태준이 고원에 연락하자 늑대는 끄덕였다.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바로 답이 돌아오진 않으리라. 조금 기다렸다가 정 답장이 돌아오지 않으면 홍유리를 찾으러 간다. 하다못해 지금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소파 위에 앉아 기다리던 늑대는 강태준이 말을 걸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
홍유리와 연락이 두절된 때? 어젯밤이라고 말했는데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리라.
"여왕에게 들었다. 멸망과 종말에 대해서."
"……."
"그런 게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여전히 멈춰있는 펜.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앙은 멸망의 일각. 멸망을 막으면 종말이 찾아온다는 건 재앙을 쓰러뜨리면 쓰러뜨릴수록 종말이 앞당겨진다는 뜻."
"……."
"그렇다면 우린 재앙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기다려서 시간을 벌어야 하는가."
강태준은 그 답을 묻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던 역병과 질병은 쓰러졌다. 남은 건 바다의 재앙 하나뿐…… 하지만 놈을 쓰러뜨리는 게 정말 정답일까?
어차피 인류는 바다를 포기했으니 차라리 좀 더 시간을 버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강태준의 생각을 늑대는 물론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바로 만상의 주인을. 늘 의뭉스러웠던 그녀의 생각을 여왕에게 모든 걸 들은 뒤에야 알게 됐다.
원작에서 종말이 찾아온 건 지금으로부터 7년 후. 엄밀히 말해 자색의 흑호는 재앙이 아닌 여왕의 세계의 생존자였으나, 실제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자색의 흑호가 쓰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조금 생각이 옆으로 샜다. 강태준이 묻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겠냐는 말이었으니.
"쓰러뜨릴 거다."
단호한 답에 은색 안경알 너머로 강태준의 눈이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으니까."
바다의 재앙으로 끝이 아니다. 아직 흑린과 만상의 주인이라는 초월자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 격에 닿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늘 그랬듯 나아가야만 한다. 먹어치워 성장해야만 한다.
강태준이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다. 한계까지 시간을 버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는 건 그 다음에 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늑대는 그걸 부정했다. 그러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나 많으니까.
만상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녀가 깨우려는 존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흑린이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른다. 거기에 자색의 흑호가 쓰러진 것을 진리가 어떻게 판단할지 모른다. 종말의 시계는 훨씬 앞당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탕아들처럼 직접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종말의 시침을 되돌릴 순 없다. 폭주하는 기관차에 올라탔다면 돌아갈 순 없다.
그래.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가."
납득했는지 아닌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늑대는 클랜장실을 나왔고 나중에 강태준으로부터 받은 연락은 홍유리의 핸드폰이 부서졌다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