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 #102 대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 평소엔 총탄 소리와 화약 냄새가 가득한 군의 주둔지 격벽과 철조망 너머 몬스터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춰간다. 헌터와 병사들은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에 삼켜지고 무수한 가시에 꿰뚫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삼켜지고 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에 있는 어떤 몬스터도, 사람도 저것엔 대항할 수 없다는 거다.
수천의 헌터, 수만의 군인이 막아내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가지 신기한 건 헌터와 몬스터가 아니라 몬스터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 아니, 싸움조차 아니다. 알파라는 미증유의 괴물의 일방적인 학살일 뿐. 심지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서.
상대도 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나서야 여명의 발표를 이해했다. 저 존재야말로 자색의 흑호를 쓰러뜨린 괴물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만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려."
네 개의 별을 견장에 달고 수많은 무공훈장을 지닌 노장군의 말에 강태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저 강아지 말이오. 알파라고 했소?"
"진짜 강아지는 아닙니다."
"나도 눈이 있소."
강태준은 끄덕거렸다. 다행히도 반응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 고작 외형이 강아지일 뿐인데 이렇게나 다르다. 겁먹은 이들도 있지만, 나머지는 그냥 멍하니 보고 있을 뿐. 외형이 외형인지라 적대감은 적어 보인다.
"생각보다 귀여운데."
"어디까지나 외적인 모습만 그럴 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실감 나지 않아 그렇소."
노장군의 말에 강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담컨대, 알파가 본신을 드러내기만 해도 헌터를 포함해서 대부분 쓰러지지 않을까.
네버랜드에서 봤던 알파는 존재 자체만으로 심령을 제압하던, 감정으로도 엿볼 수 없는 구획 보스급의 괴물이었다. 정예중의 정예로 이루어진 공략대의 헌터들조차 얼어붙었을 정도로 끔찍한 살기를 내비친 가늠할 수 없는 별격의 존재.
거기서 한 차례 더 진화한 지금의 알파라면 내성이 없는 이들은 보기만 해도 미쳐버릴지 모른다. 일반인이라면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감 나지 않는단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는 사이, 3.8선 인근의 몬스터들은 죄다 사라졌고 그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됐다. 피나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게걸스레 먹어 치운 것이다.
알파는 어느샌가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와 있었다. 창선의 시험에서 느꼈지만, 지금의 알파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보고도 못 믿겠군."
노장군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무시한 알파가 꺼낸 말은.
"더 깊은 곳으로 가고 싶은데."
"지치진 않나?"
도리도리 고개만 젓자 강태준은 알겠다고 답했다. 노장군 강아지가 말한다는 게 어지간히 신기한지 빤한 시선으로 늑대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뜬금없는 여명 로드의 방문에 의아했지만, 이런 거라면 환영이다. 요 며칠 골치를 썩이게 만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는 것에야.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는 좀 더 강한 몬스터가 있기만을 바랐다. 역병 정도 되는 몬스터라면 모를 수가 없을 테니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화산각룡 수준의 몬스터가 어딘가 숨어 있기만을 바랄 뿐. 그 정도라면 부족한 경험치를 충당할 수 있을 테니까.
――21레벨. 아직 50레벨까지는 턱없이 멀고 점점 더 힘들어질 게 분명하다. 50레벨로 끝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소. 덕분에 한동안 편하겠구려."
"제가 아닙니다."
"알고는 있는데……"
눈을 감은 노장군은 뻣뻣한 고개를 숙였다. 촉수를 휘휘 저어 인사를 받은 알파는 강태준에게 고갯짓했고 둘은 강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 참."
다가온 부관이 괜찮느냐고 묻자 노장군은 대강 끄덕였다. 조용히 처리해도 됐을 걸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했나?"
"녹화해뒀습니다. 그런데…"
부관이 슬쩍 병사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자 노장군은 끄덕였다.
"내버려 두게. 일부러 그런 것이니. 장병들이 알아서 퍼뜨려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
더 깊은 곳. 묻는 말에 늑대는 잠깐 생각했다가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 환계 붕괴로 인해 나타난 곳곳의 몬스터를 먹어치우기 위해 며칠간 돌아다닐 셈이었는데, 강태준의 요청에 따라 38선과 압록강 아래. 즉, 북한이 잃어버린 영토인 이곳이었다.
"굳이 드러내야 했나?"
"네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이들도 많으니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에 따라 알파라는 환수가 실존하긴 하느냐는 의혹과 자색의 흑호가 실은 죽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심. 그걸 넘어 여명이 무언가 꾸미고 있는 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에 따라 비가시화를 사용한 채 조용히 쓸어버리려 했던 늑대는 강태준의 부탁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 비록 본신을 드러내진 못해도 힘의 편린을 보인다면 그걸로 충분하리라.
낭설은 묻혀 사라지리라.
둘은 말없이 걸었다. 그날, 늑대는 압록강 이남의 몬스터를 전부 쓸어버렸다.
***
―――16:04 무르만스크 공항.
역시 아직은 쌀쌀한 날씨. 두꺼운 옷을 입고 공항에 도착한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핸드폰을 부숴 먹어서 연락도 못 해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동안 백소율과 알파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상상만 해도……!
바득바득 이를 가는 홍유리를 제지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돌아갈 텐가?"
어지간하면 무시했겠지만, 차마 창선의 물음에 그럴 순 없었다. 조급함을 누르고 몸을 돌려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럴 생각입니다."
"수고했네. 자네 덕에 한결 편해졌어. 놈들도 이젠 괴멸했다고 봐도 좋겠지. 적어도 이전 같은 일은 못 할걸세."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아직 쫓을 생각이네. 그리고…"
창선은 무르만스크의 마지막 아지트에서 찾은 푸른색 가루를 건넸다.
"가져가 조사해보게."
"……."
"챙기지 못한 건지 챙기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루는 범상치 않다. 고원의 궁수들이 가진 감정으로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본래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의 비늘을 한없이 갈아 가루로 만든 것 같다고.
확신은 없다. 추측할 단서도 없다. 하지만 홍유리의 뇌리엔 어떤 존재가 떠오르고 있었다. 들끓는 피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생물보다 커다랗고 존재 자체가 재앙이나 다름없는 괴물. ――바다의 재앙의 비늘이라고.
***
다시 여명으로 돌아왔을 때, 이래저래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늙은 장성이 예상했던 것처럼 몰래 촬영한 장병들이 영상을 업로드했으니까. 정말 바보 같은 행동. 당연히 금세 들켰지만, 생각보다 처벌은 가벼웠다.
원본 동영상은 바로 삭제했지만,이미 퍼져나간 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으나 괜찮다. 애초부터 그걸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강태준이 예상했듯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이들이 백두산으로 가 직접 확인해보겠다 선언했다. 과연 그중 몇이나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손해 볼 건 없으리라.
"그랬니?"
여왕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별 거 없는 이야기에도 경청해 주는 건 감사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작 그녀의 몸 상태는 더 악화해있었다.
"……."
자신은 의사가 아니지만, 혜견으로 몰락한 여왕을 꿰뚫어보며 알 수 있었다. 끝은 머지않았노라고.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을 가만 바라보자 반대로 위로하듯, 손을 뻗은 여왕이 자신을 쓰다듬었다.
"신경 쓰지 말렴."
정해진 수순이었다며 여왕은 다가오는 죽음에 순응하고 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그녀에게 욕심이 있었더라면 얼마든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도.
"차라리…"
여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달란 것처럼.
"그것보다 아이들이 나간 것 같아 걱정이구나. 조금 찾아주겠니?"
"……알겠습니다."
요정들을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요정들에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어지간히 답답하게 느껴졌으리라. 이곳저곳 돌아다녔겠지만, 결국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요정들이 갈 곳이라고 해봤자 뻔했다.
"……!"
재잘거리는 요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눈이 핑핑 돌고 있는 이은하를 볼 수 있었다. 한 마리만 해도 정신없는데 수십 마리 요정이 달라붙으면 당연한 일이리라.
"와~! 늑대!"
떼 지어 달려드는 요정들에 늑대는 촉수를 뻗어 쓰다듬어주었다. 굳이 말로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놀아주는 게 더 편하니까.
"알파?"
광명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이은하. 아마 하루 종일 시달리지 않았을까. 요정어를 배운 걸 후회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등줄기를 타고 노는 요정들은 여왕이 걱정하고 있다는 말에 휘둥그레 눈을 뜨더니 쫄래쫄래 날아가기 시작했다.
"휴…"
안심했다는 듯 한숨 쉬는 이은하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늑대는 끄덕였다. 요정들이 악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순수한 아이 같은 성격에 그 호기심이니 셋만 모여도 하루 종일 조용할 날이 없으리라.
"많이 시달렸나 보군."
"아니… 응."
차마 부정할 수 없었는지 끄덕인다. 항상 볼 때마다 구르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슬슬 안쓰러울 지경. 아공간을 열어젖힌 늑대는 이은하에게 가지고 있던 자양강장제를 건넸다. 자신이 산 게 아니라 페리와 함께 돌아다니다 보면 쓰다듬어보겠다고 클랜원들이 바친 공물. 그래도 여왕의 부탁대로 요정들을 돌려보냈으니 걱정할 건 없으리라.
이제 며칠이나 남았을까. 늑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보지."
늑대가 조금씩 멀어져 가자 이은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물어보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알파가 아니라… 이은하는 몸을 돌렸다.
***
다음 날, 클랜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탕아들을 추적하기 위해 며칠인가 떠나있던 홍유리가 돌아왔으니까. 가장 질색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3팀의 팀원들. 좋은 날은 갔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3팀에 잠깐 들른 홍유리는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알파를 만나러 갈 테니까. 백소율을 받아들였다는 말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알파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것.
……일단 들어보자.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려던 홍유리는 걸음을 멈춰야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 것처럼 백소율이 그 길목에 앉아 있었으니까.
"선생님."
"……."
"얘기 좀 할까요?"
차분한 태도로 말을 거는 것에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홍유리는.
"알파는 지금 없어요."
알파가 없다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알파가 없단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그걸 알고 있다는 것에.
"모르셨나 보네요. 몬스터를 잡으러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몬스터?"
"네. 클랜장님이랑."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백소율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화면이 흔들리고 소란스러웠지만 보이긴 보인다.
검은 강아지가 무수한 몬스터를 먹어치우는 모습이. 어지간하면 CG 같은 거라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홍유리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진짜 알파라는 것을.
"압록강 너머래요. 아마 밤에는 돌아올 거예요."
"……."
홍유리는 무덤덤하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 환수라고 속인 게 큰 걸까. 아니면 강아지를 흉내 낸 외형 때문일까. 생각보다 불안해하는 이들은 없어 보인다. 하기야, 정작 영상의 주인공인 알파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채 홍유리가 묻자 백소율은 헛기침했다. 마치 무언가를 뱉는… 헛구역질하는 모습에 홍유리는 눈을 부릅떴다.
"너 설마…!"
"장난이에요. 그렇게 놀라실 것 없어요."
입을 가리고 웃는 백소율을 보고 홍유리는 진심으로 쥐어박아버리고 싶다 생각했다.
"그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에요. 혹시 모르죠.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
"대화, 필요한 것 같지 않으세요?"
조심스레 아랫배를 쓰다듬는 모습에 홍유리는 눈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