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102 대화 (2)
대화가 필요할 거라는 백소율의 부름에 응한 홍유리는 그녀를 자신의 방에 불렀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지금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더 급한 일이 있다지만 대놓고 도발하는 걸 참을 만큼 좋은 성격은 아니니까.
사람 봐 가면서 건드렸어야지. 잘근잘근 밟아 주겠다고 생각하며 홍유리는 팔짱 낀 채 소파에 앉았고,
"잠깐 기다려주세요. 뭐라도 가져올게요."
당연하다는 듯 백소율이 부엌으로 향하자 실소하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기 방인 줄 알 만큼 익숙한 태도가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다는 증거이리라.
"……."
손가락을 튕기며 백소율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홍유리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붉은 마력 위에 올려놓고 입에 대지 않았다.
"블루 마운틴이에요. 저번에 드시고 싶어 하지 않으셨나요?"
한 통 가득 들고 있었으면서 없다고 했던 그 커피이리라. 신경 쓰는 척하지만 누가 봐도 신경을 긁는 거였다.
"힘들진 않으셨어요? 고생하고 오셨잖아요."
"설마 지금 내 걱정?"
자신의 커피를 입에 댄 백소율이 작게 끄덕였다.
"안 다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무사하셔서요."
"……."
"일은 잘 끝났나요?"
홍유리는 실소했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도발해서 불러놓고 기껏 묻는다는 게 이딴 개소리인가 싶어서. 답답한 속에 커피를 들이켰다가 뜨거운 거란 걸 까먹고 혀를 데이고 말았다.
그 모습에 백소율은 옅게 웃었고 홍유리는 눈을 부라렸다.
"뭘 쪼개고 지랄이야? 얼른 할 말이나 하지?"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백소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
"생각, 여전히 안 바뀌셨어요?"
"무슨 생각."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백소율은 입술을 달싹였다.
"미친년."
"전 선생님이 그럴 생각인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니었나요?"
졸업식 날에. 그 말을 덧붙인 백소율은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랄하지 마."
이어 하는 말을 홍유리는 딱 잘라 말했다.
"꿈 깨. 내가 왜?"
"자신 있으신가 봐요."
"그러는 넌 자신 없어?"
"……."
비웃음을 띤 홍유리는 그나마 조금 식어 마실만 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무슨 말부터 꺼낼까 하다가 그냥 대놓고 묻기로 했다.
"너, 했어?
"했냐고요? 네."
망설이지도 않고 답한다. 사실 묻지 않아도 뻔한 거였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 그게 아니고서는 아랫배를 쓰다듬는 그딴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까.
"아~ 그래서 이렇게 깝치고 계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런 거겠죠."
뭘 믿고 까부는 건지. 홍유리는 일그러진 미소를 띠었다.
"백소율. 많이 컸네?"
백소율은 답하는 대신 홍유리를 빤히 쳐다보고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한숨 쉬었다.
"참, 이해가 안 되네요."
"뭐?"
"자업자득 아닌가요?"
"……."
"그때, 그 말만 안 하셨어도 전 혼자 끙끙 앓으면서 포기했을 거예요. 아니, 포기는 못 했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고요."
"그래서."
"동정이었나요?"
조용히 묻는 말에 홍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건 맞다. …그래. 대부분은 동정이고 연민이었다. 바로 뒤에 등신 머저리라고 자조하며 후회했을 만큼이나.
"그럼 그 동정에 감사해야겠네요.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여기까지?"
"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으신가요? 공유할 생각이요."
공유. 저번에도 아까도 입술을 달싹여 물었던 말이었다. 이번으로 세 번째. 끈질긴 물음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좋을 수도 있어요. 함께 알파의 옆에 있을 수도 있고요. 의외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알파도 그걸 원할 거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휴."
백소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시잖아요. 이게 아니면 결국 누구 하나가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요."
"네가 이길 것 같아? 빌어도 모자랄 텐데?"
"네. 자신 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기회는 주겠다고. 뺏어보라고요."
이를 갈던 홍유리는 곧 속을 가라앉히고 다시 코웃음 쳤다.
"하 그래서, 지금 뺏었다고 생각해?"
"……."
"좀 물고 빨았다고 너한테 갈 것 같아? 턱도 없어. 왜? 안 믿겨? 돌아오면 알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백소율과는 달리 홍유리의 표정은 자신감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뺏었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뭐?"
"저도 알아요. 알파가 그럴 거라는 걸."
알파는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선생님께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걸 순순히 인정하자 홍유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잘 아네. 그럼 알아서 찌그러졌어야지. 왜? 그거 말하려고 왔어?"
"……."
"기특하네. 아~ 공유? 계속 그렇게 기고 있으면 내가 안 볼 때는 봐줄 수도 있겠네. 몇 달에 한 번쯤은?"
선심 쓴다는 듯한 말에 백소율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뭐가 웃겨?"
"그럼 처음부터 그러셨음 될 텐데……"
그 졸업식 날, 뺏어보라는 말 대신에 그렇게 말했더라도 자신은 분명 그러겠다 말했으리라. 어쩌면 고맙다고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모순덩어리.
백소율의 미소가 거둬지지 않자 홍유리는 와짝 인상을 찌푸렸다.
"웃어?"
"죄송해요."
"까불지 마. 그러다 뒤져."
"그러세요."
백소율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눈꺼풀을 닫았다. 해볼 테면 얼마든 해보라는 듯한 태도. 주먹을 쥔 홍유리는 부르르 떨었지만, 차마 주먹을 내지르진 못했다.
백소율을 차마 때릴 순 없어서,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것만큼은 알파가 바라지 않을 테니까.
"…좋아.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선생님이 거절하신다면요."
공유에 대한 이야기. 홍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될 것 같아? 뺏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씀드렸잖아요. 뺏었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 아직은."
"아직?"
"이제 시작이에요."
"아~ 그러셔?"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전에 말했었잖아요. 공유하자고요. 아니면 후회하실 거라고요."
"미친년."
"그걸 싫다고 하신 건 선생님이에요."
홍유리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중지를 들어 올렸다. 노골적인 욕설에도 백소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까고 있네."
"……."
"그래. 가. 끝까지 가. 가보자고. 근데 너 자신 있어? 난 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자 거보라는 듯, 홍유리는 얼른 나가라며 문을 열고 등을 떠밀었다.
"자신 없어요."
문밖에서 백소율은 작게 중얼거렸다.
"……혼자서는요."
***
돌아온 늑대는 며칠 만에 홍유리를 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저래 심기 불편한 모습으로.
"……."
거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어찌 됐건 간에 백소율을 받아들인 건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페리만이 태평하게 하품하고 있었다. 어쩐지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홍유리는 다리를 꼬았다.
"요즘 몬스터 잡고 다닌다며?"
"그래."
"클랜장님이 부탁했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어차피 잡을 생각이었단 뜻이다. 자색의 흑호와는 달리 아무리 거대하지만 오대양을 누비는 바다의 재앙을 찾기란 요원하니까. 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이상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넓고 넓은 바다에선 아무리 불리해도 도망치기 어렵다. 거기에 환계가 사라진 이상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 많이 바빠?"
조심스레 끄덕인 늑대는 홍유리의 안색을 살폈다. 핸드폰이 부서졌다지만 문자를 못 본건 아닐 터. 그랬다면 저렇게 언짢게 앉아있진 않을 테니까.
늑대는 말을 조심할 필요를 느꼈다.
홍유리의 화를 가라앉히고 백소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기 위해서. 온전한 자신의 의지였음을 알리고 상심할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 그 생각이 더 빨랐어야 했다.
"그래서, 했어?"
늑대는 눈을 끔뻑였다. 마치 대화가 몇 줄은 생략된 것처럼 뜬금없는 물음이지만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생략된 주어가 백소율임을 알아챈 늑대는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어차피 들통날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미세하게 눈가가 꿈틀거리자 단숨에 소파로 뛰어올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내렸다. 시선이 교차한다. 아무 말 않던 홍유리는 별안간.
"씨발."
욕지거리와 함께 붉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걸 신경 썼다고. 이딴 쓰잘데기 없는 신경전 같은 걸 왜 해야 하는데? 성격에 맞지 않는다. 시원하게 말하는 게 훨씬 더 낫다.
심호흡과 함께 홱 고개 돌린 홍유리는 붉게 빛나는 두 눈을 번뜩였다.
"너 똑바로 들어."
"……."
"백소율 받았다고? 좋아. 일단 그건 넘어가. 근데 그전에 나한테 말이라도 했어야지. 나 없다고 찍 싸지르고 문자만 보내면 끝이야?"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뭐 난 신경도 안 쓰였어? 왜? 존나 신나게 박고 싸느라 있는 줄도 모르셨나?"
"……."
"이 개새끼야. 그럴 거면 난 왜…!"
씩씩거리던 홍유리는 화가 치밀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레 격해진 감정을 가다듬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촉수를 뻗었지만 쳐내지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둔 말은 많았고 떠오르는 변명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다.
늑대는 속으로 긴 숨을 뱉었다.
백소율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럴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유별난 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다른 이와 연인을 공유해야 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으니까.
백소율에게 기회를 준 건 홍유리다. 자신은 그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그런 사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안다. 역으로 생각해도 싫은 걸 강요하고 일방적인 이해를 요구해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 대화가 쉽게 끝날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
늑대의 생각이 깊어진 것처럼 홍유리 또한 생각이 깊어지긴 마찬가지였다.
차마, 백소율을 내치란 말만큼은 할 수 없었다. 졸업식 날에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쳐오니 참기 어려워졌다.
자기가 뭘 바라는 건지 왜 이러는 건지도 모른 채 속에 담은 감정을 말로 끄집어냈다. 한참을 소리치고 나서야 홍유리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 폭언을 내뱉었을 뿐.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백소율이 그렇게 좋으면 떠나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알파를 본 홍유리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조금 심했나? 진짜, 진짜 떠나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 혼자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이 컴컴해지고 등 돌린 알파가 천천히 떠나가고 있음에도…… 홍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멎은 듯하다. 가진 모든 게 사라져버려 이것저것 전부 빛바래 의미 없어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봐도 닿지 않는다. 몸이 굳은 것처럼 소파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 신랄한 말을 토해내던 입은 꾹 다물려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결국, 알파가 보이지 않게 되자 떨어지지 않았던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
그런 착각. 눈꼬리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홍유리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여전히 알파가 옆에 앉아 있었다.
"울지 마라. 미안하다."
면목 없다는 듯, 두 귀를 접은 알파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에 홍유리는 안도하고 말았다. 말없이 끌어안긴 그대로 코끝이 붉어지며,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뒤늦게 깨어난 페리가 갸웃거릴 때까지.
***
"이상하네…"
아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소율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시약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혹시 알아요?"
고운 가루가 담긴 조그마한 병을 들고 이리저리 보는 모습에 백소율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님이 쓰셨나?"
"무슨 약이었는데요?"
"응? 환각제랑 자백제요."
"간부 심문은 끝났다던데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응~ 그렇다기엔 좀 많아요. 이 정도면 코끼리도 말문이 트이겠는걸?"
연신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던 아넬라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머님이 쓰셨겠죠. 설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여명에 머무르고 있는 스퀘어 마스터의 거주지에 들어올 리 있겠냐며 웃어넘겼다. 식사나 하자는 아넬라의 뒤엔 백소율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