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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43화 (243/407)

〈 243화 〉 #102 대화 (3)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훌쩍거리며 잔을 기울이는 홍유리. 늑대는 말없이 그런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생각해보면 단둘이서 술을 마신 적은 없는 것 같다. 취하지 않아 의미는 없지만 옆에서 따라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쪼르르 따라지는 술에 관심을 보이던 페리는 홍유리가 손을 젓자 시무룩하게 변했다.

"뀨웅."

마셔도 상관없겠지만 주는 게 내키진 않아 삐친 게 풀릴 때까지 쓰다듬어주던 늑대는 홍유리를 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붕붕 고개를 흔드는 그녀. 그러다 괜히 취기가 돌았는지 이마를 짚고 끙끙 앓았다.

"아니! 전혀! 존나 개같아!"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꽉 붙잡는 것에 늑대는 저항하지 않았다. 단숨에 들어 올리더니 짤짤 흔들어 보인다.

"개새끼! 존나 개새끼! 씨발 개새끼!"

머리가 돌지 않는지 평소의 다채로운 독설은 어디 가고 뻔한 욕설만 반복한다. 거기에 담긴 감정을 알기에 늑대는 구태여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울었던 걸 숨기고 싶었는지 완전히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코가 삐뚤어지게끔 마신 홍유리가 딸꾹질했다.

"너 이 개새낑. 빽소율이 그렇게 조아?"

"……."

"아쭈. 이젠 말도 안 하네!"

꼬일 대로 꼬인 혀. 늑대는 속된 말로 자신이 가불기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하면 삐질 테고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도 않을 테니까. 그냥 묵묵히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년이 오늘 나한테 모라고 했는지 알어?"

이미 백소율을 만났던 걸까. 금시초문이었다. 말해보라는 듯 시선을 주자 어지간히 억울했던지 토로해놓는다.

"공유하재! 그게, 시발 말이야 빵구야!"

"……."

"너 말해 봐!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늑대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미안하다."

"아, 말해보라고!"

"방법이 없으니까…… 미안하다."

고개 숙인 늑대는 사과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백소율을 받아들이기로 한 시점부터 이렇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이미 감정을 나누고 몸을 섞은 이상, 그녀를 끊어내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까지 간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설득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걸 아는 새끼가."

까드득 이를 악문 홍유리는 답답했는지 잔을 치워버리고 병나발을 불었다. 빈 병도 굴려 치우더니 입가를 닦으며 눈을 치켜뜬다.

"어떡할 거야?"

그렇게 물으면서도 홍유리는 생각했다. 사실, 백소율이 아주 숙이고 들어왔다면 못 이긴 척 받아줄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아랫배를 쓰다듬어?'

거기에 더해 입덧인 척까지. 블루 마운틴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건 또 어떻고? 대놓고 자신을 긁고 있는데 순순히 응해줄 만큼 좋은 성격이 아니다. 다시 곱씹어 생각할수록 괘씸해진다.

'끝까지 가자고 했지?'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 거절한 건 자신이라며.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에 홍유리는 씹어뱉듯 말했다.

"너 절대 끼어들지 마."

"……?"

"그년이랑 내가 지지고 볶든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알아들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싫으면……"

꺼져라. 차마 그 말만큼은 하지 못하고 한숨만 뱉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한 말에 늑대는 눈을 마주쳤다.

"안 된다."

"……뭐?"

"이건 내 문제니까. 빠질 수는 없다."

"지금까지 뭐 들었어?"

딱 거기서, 서로가 엇갈리고 말았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가 도랑처럼 자리하고 있다.

"홍유리."

"입 다물어."

늑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내게는 책임이 있다."

"책임?"

붉은 눈이 마주해오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 담긴 의지는 여태 꺾인 적 없다는 것을. 자신이 고집불통인 것 이상으로 알파는 타협을 모른다는 것을.

"그래. 책임."

"……."

"받아들인 이상, 너도 백소율도 놓지 않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헛소리 말라고 일축했을 테지만,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환각을 본 뒤라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수긍한 건 아니다. 이해하기도 싫다.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뚫어지라 알파를 보았을 뿐. 홍유리는 이번엔 뻗은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아침이 밝았다.

***

아침이 밝았을 때, 홍유리는 숙취와 수면 부족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3팀으로 출근했다.

"……술 냄새 납니다."

홍유리는 보지도 않고 중지를 들어 올렸고 우택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 힘들면 휴가라도 내면 될 텐데. 저렇게 취한 채로 출근한 건 성실한 건지 태만한 건지……

"어제 맡긴 건?"

책상에 고개를 박은 채로 묻자 우택은 끄덕였다.

"조사하고 있습니다."

"언제 끝나는데."

"모릅니다. 빠르면 오늘일 수도 있고요."

홍유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의 재앙의 비늘 가루. 어떤 확신도 증거도 없지만, 용의 피가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확실한 건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놈들은 대체 왜 어떻게 그걸 갖고 있던 걸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비늘을 가루로 만들 만한 이유가 있었나?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럼 됐어. 다른 건?"

"파견 요청이 있기는 합니다."

"……어디?"

"몽골에서요."

그렇게 다소 이야기가 오가고 홍유리는 엎드린 그대로 한숨 쉬었다. 어지간하면 이 새끼들을 굴려서라도 스트레스를 풀 텐데…… 그럴 기분도 안 든다.

저기압인 홍유리가 드러누워 있자 팀원들은 안도하는 한편 갑작스레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대체 왜 저래?"

설마 일이 힘들다고 그럴 리는 없을 테니 뭔가 이유가 있을 터. 하루하루 눈치 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에 그네들은 빨리 원래 팀장인 구진하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이유를 이은하만큼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옥상에서의 알파의 태도. 소율이의 어색한 걸음걸이와 더 자고 있지 그랬냐 묻던 말. 십중팔구는 양다리, 양다리니까. 분명 거기에 화가 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하고서.

어차피 알파가 책임지지 않을 리는 없을 테고. 그냥 서로 사랑한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번잡한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흙먼지가 높게 피어오른다. 혹한의 황야를 달리는 수십 마리 소 떼. 수백 킬로미터의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한다. 총탄을 쏴 갈겨도 철갑을 두른 듯한 피부에 튕기어 나오고 만다.

"……!"

애초에 사이즈부터 소와는 거리가 멀다. 코끼리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가 이리저리 날뛰는데, 하나하나가 장갑차를 연상케 했다.

심지어는 속도도 범상치 않아 군대로도 따라잡기 벅차다. 그나마 화약 냄새를 맡았는지 도시에 들어오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몇몇 헌터가 헬기를 타고 내리긴 했지만, 어지간한 헌터들이라도 철갑을 두른 소 떼를 막기란 역부족이다. 기관총으로도 뚫리지 않는 피부에 저 중량을 어쩐단 말인가.

인명 피해도 제법 발생했다. 벌써 며칠간 시달렸기에 답도 없는 문제에 골머리를 앓으며 곳곳에 파견을 요청한 것. 그렇게 며칠이나 지나 겨우 받은 답변은 오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다만, 이제 연락이 온 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아무리 빨라도 오늘은 지나야하리라. 그 생각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무우우―――!"

큰 소리와 함께 소 떼들이 발길을 멈췄으니까. 휴식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차피 파견이 온다면 잘된 일이다. 괜히 들쑤시지 말고 시간을 벌면 되겠다고 여긴 몽골 군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붕붕- 흔들리고 시끄러운 헬기 속에서도 그의 눈에 어렴풋이 보이는 한 명의 인영. 황급히 쌍안경을 들어 확인해보니 두 자루 검을 양 허리에 차고 망토를 두른 채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철갑을 두른 소 떼를 정면으로 두고 남자는 담담히 걷고 있었다. 무모함을 넘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몽골 군인, 대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가장 유명한, 내로라하는 헌터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달리 검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명의 로드. 하지만 어떻게? 벌써 왔다고? 답변하기 전부터 출발하고 있었던 걸까?

어찌 됐건 잘된 일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검성이라면 능히 소 떼를 물리쳐주리라.

그러나 멈춰 선 그는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발치에 있는 무언가를 내려다보았을 뿐. 시선을 따라 쌍안경으로 확인한 대위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조그마한 검은 털 뭉치――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강아지였다.

"……?"

강아지는 천천히 소 떼에 다가갔다. 단숨에 유린돼 죽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현실로 다가온 광경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 무우우……"

물러나는 소 떼. 한걸음 두걸음 물러나더니 곧 얼어붙은 듯 그것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고작 조그마한 강아지에 군대가 애먹었던 소 떼가 얼어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대위는 근래 인터넷을 떠돌던 화제가 된 영상과 여명의 발표를 떠올리곤 아연해 했다.

"Альфа…?"

마랑 알파. 자색의 흑호를 쓰러뜨렸다는 환수. 본신을 드러내지 않고 검은 강아지를 흉내 낸 외형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순간, 대위의 눈에 알파가 수십 배 커진 듯 보였다.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 일순 보인 듯했지만, 그저 그림자가 길게 뻗었을 뿐이었다.

수십 미터나 길어진 그림자가 쭉 뻗어가더니, 소 떼와 닿은 순간 그들을 검게 물들였다.

"……!"

모습이 감춰지고 소리도 사라진다. 그저 검은 그림자에 뒤덮인 모습에 아연해 하던 군인은 그 그림자를 뚫고 고개를 내민 소를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에 피범벅으로 물들어있다. 가까스로 고개를 내밀었던 한 마리 소조차 흉악스러운 그림자가 찌르고 자르자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에, 그림자가 걷혔을 때 남은 거라곤 황야에 찍힌 발자국뿐이었다. 피와 살조차 남지 않아 모조리 사라져있다…….

"Галзуу…"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포탄으로도 뚫지 못했던 철갑을 두른 소 떼를 순식간에 지워버렸으니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색의 흑호를 쓰러뜨렸다는 건 최소한 그와 동격의 괴물이라는 뜻이니까. 그게 의미하는 건 원한다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이라는 뜻.

대위는, 조그마한 강아지의 모습에서 괴물을 보았다.

그렇게, 검성과 알파는 아무 말 없이 유유자적 사라졌고 뒤늦게 여명으로부터 통보받은 건 의뢰를 끝마쳤다는 연락뿐이었다.

***

"이번엔 좀 만족했나?"

늑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메시지를 되짚었다.

[스틸 버팔로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잠시나마 그림자를 뚫고 나왔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A클래스에 살짝 못 미치는 수십 마리 소 떼였다. 레벨업을 이루진 못했지만, 거의 직전에 도달했을 만큼이나.

이런 놈들이 더 있다면 좋겠다. 맘 놓고 본신을 드러낸 채 돌아다닐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여명에 들어오는 정보를 찾아 몬스터를 먹어 치우는 수밖에 없다.

"바다의 재앙은 언제 쓰러뜨릴 셈이지?"

"준비가 다 끝나면."

"이래저래 다가온다는 뜻이군."

강태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재앙이 끝나면 마지막에는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확신은 하나도 없지만, 기댈 거라고는 알파뿐이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보았으니까. 별이 먹혀 스러진 광경을. 여왕이 보여주었던 종말이 찾아간 뒤의 세계를.

문득, 웃음이 나왔다.

사람의 손으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모든 게 걸려있다는 것에. 가능한 한 모든 부분에서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제동 걸린 알파의 성장을 최대한 유도하면서.

그래.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다. 설령 억겁의 세월이 지나더라도 마찬가지이리라.

***

유구의 세월을 보낸 딱 한 명의 소녀가 사라진 세계에서 눈을 떴다. ……바깥은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이미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세계조차 남지 않게 됐을지도 모른다.

종말을 맞은 세계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라지만, 자신의 마지막 남은 세계마저 사라졌다면 조금쯤은 감흥이 생길지도 모른다…….

만상의 주인은 사라진 세계, 무의 공간에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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