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103 재앙
소금기가 가득한 도시. 짭짤한 바닷냄새가 코를 찌르자 고원의 클랜원이 침음했다.
"정말 여기가 맞는 건지…"
"틀림없습니다."
어렴풋이 남은 흔적을 따라서 왔지만, 문제는 여기가 폐허라는 점. 지도상에는 분명 기록돼있는 도시가 이렇게 변해있었다.
역병이나 질병이 쓸어버린 곳이었을까. 아니, 그랬다면 그들이 모를 리 없다. 도시가 망가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으리라. 그들의 선두, 한 자루 창을 짊어진 노인이 바닥을 쓸었다.
해일이 덮친 뒤처럼 소금이 묻어나온다.
"창선 님?"
의아하다는 듯한 부름에 창선은 한숨 쉬었다. 그는 궁수가 아니다. 하지만 헌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시절, 훈련되지 않은 맨몸으로 살아남아 싸워야 했다. 지금의 전문적인 궁수들만큼은 아니지만, 당연히 기본적인 추종술 정도는 익히고 있다.
아니, 그런 것조차 필요 없다.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가세나."
클랜원들을 추슬러 길을 재촉한 창선이 바닷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보인 건 갑주를 두른 사내였다.
"왔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틈도 없이 갑주를 두른 사내가 붉은 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 단지에 담긴 푸른 가루를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이제 전부 끝났네. 투항하게."
하염없이 가루를 뿌려 대던 그를 향해 창선은 창을 겨누었다.
"우리 전부를 상대로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갑주의 사내, 강훈은 되돌아보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A클래스에 달하는 고원의 정예들. 창선 하나만 해도 쉽지 않은데 그들까지 상대하다간 패하는 건 자신이리라. 강훈은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투항하겠나."
그러나, 다시 묻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서 투항할 순 없으니까. 그랬다간 여태 해왔던 모든 일에 의미가 사라진다.
아니, 이미 상당히 앞당겨졌으리라.
강훈의 뇌리에 어떤 마랑의 모습이 그려졌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존재였다. 네버랜드에서 보았던 마랑은 귀찮을 뿐이지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이 흘러, 마랑은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려 전부 망쳐버렸다.
마랑은 멸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했고, 종말을 앞당기고야 말았다.
"……투항이라."
강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염없이 푸른 가루를 뿌리면서.
"그럴 순 없네."
종말이 찾아와 모든 게 끝나는 것보다 그녀가 종말을 죽이는 걸 기대하는 게 낫다. 그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할 만큼 희박한 가능성이긴 했으나, 0보다는 낫다.
따라서,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마랑이 없애버린 만큼 멸망을 불러일으키면, 종말이 오는 속도가 늦춰지리라. 강훈은 계속해 푸른 가루를 뿌렸다.
그 때문에라도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으니까.
"그럼 여기서 죽겠는가!"
웅혼한 기운이 퍼져 나온다. 그를 보고 누가 칠십을 넘은 노인이라 생각할까. 어느새 고원의 클랜원들마저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오는군……"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강훈은 혼자 중얼거렸다. 단지를 내려놓고 그는 바닥에 박힌 대검을 뽑았다.
"정녕 해볼 셈인가!"
일갈하는 창선이 무기를 휘두르자 일대의 공기가 변했다.
"내가 멈추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강훈 또한 대검을 들어 올렸다.
"무노를 죽였을 때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휘두른 붉은 검에서부터 상반된 색의 창염이 폭사한다. 그것을 마력을 일으킨 창이 철저히 깨부수었다. 얼음 알갱이가 흩날리는 와중에 두 영웅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
침대 위에 드러누운 이은하는 멍하니 핸드폰을 보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알파의 영상이나 사진이 뉴튜브를 비롯해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됐다.
38선 이북, 압록강 너머 등등. 가장 최근 영상은 여명에서 직접 공개한 몽골의 황야. 꽁꽁 얼어붙은 땅을 깨부수는 소 떼는 언뜻 보기만 해도 굳건하고 강인해 보인다.
처음 보는 몬스터였지만, 영상의 추가 설명란에 스틸 버팔로라고 적혀있음과 함께 정보가 있었다. B+클래스에 상응하는 몬스터… 이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폭음과 함께 소 떼가 휘청였다. 문제는 그것뿐이라는 점. 대포를 맞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모습엔 질려버리고 만다.
"와……"
소 떼에게 포화가 집중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군대의 화력을 견디며 여전히 달리고 있다. 중량과 속도에서 나오는 돌파력도 무시무시하지만, 포탄을 맞고도 휘청거리는 데 그치는 굳건함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무기이리라.
만약 자신이 상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뚝을 박는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할 테고 폭발로도 소용없을 거다. 왜곡? 잠깐이라도 멈추면 다행이리라. 그런 게 떼로 몰려온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컴컴해진다.
그렇게, 군대의 포화에도 뚫고 지나가는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이내 화면이 전환된다.
소 떼가 정면에서 달려들자 이은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안타깝게도 화면이 전환되며 화면이 어설프게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촬영자가 초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부분을 아쉬워하던 이은하는 카메라 앵글이 아래를 향할 때 언뜻 보인 붉은 검의 손잡이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의 검은… 촬영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찍으셨을 줄이야.
곧 검은 강아지, 알파가 클로즈업된다. 이미 알파의 앞으로 보이는 소 떼는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다, 그것마저 하지 못하게 됐을 때, 무언가가 뻗어갔다.
"……."
그다음부터 이은하의 머릿속에 생각이란 게 지워졌다. 그저 압도적인 광경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주 잠깐 스틸 버팔로 한 마리가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지만, 모자이크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붉게 피칠갑이 돼 있었다.
곧 다시 삼켜져 그림자가 걷혔을 때, 스틸 버팔로는 흔적도 남지 않게 됐다. 멍하니 보던 이은하는 홀린 것처럼 댓글 창을 열었지만, 아쉽게도 논란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닫혀 있었다.
반대로 누워 데굴데굴 구르던 이은하는 핸드폰에 출력되는 시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
겨울의 여파로 아직 추운 날씨도 슬슬 풀려가고 있었다. 슬슬 외투는 가볍게 입어도 되겠다며 좋아하던 아넬라는 문득 생각났단 것처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소율 양. 연애 사업은 잘돼 가나요?"
"그럭저럭이요."
팔을 주무르며 대답한 백소율은 시계를 보았다.
"근데 아쉽지 않아요? 기껏 거기까지 갔는데 둘이서 나눠야 하잖아요."
"글쎄요……"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선생님이 거부한 이상,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에.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 한 말에는 틀린 게 없다.
'인생은 실전이라고 하셨죠.'
정말 그 말대로다. 양보할 겨를 따위 없으니 가능한 한 발버둥 쳐야만 한다. 분명 말했었다.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겠다고. 혼자서는 불리하다.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면 된다.
"그래서 힘내고 있어요."
싱긋 웃는 모습에 아넬라는 기특하다는 듯 끄덕거렸다. 만화 같은 표현이지만 사랑을 쟁취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이 아니꼽게 보일 리 없다. 설령 그것이 남들과는 다소 다른 형태일지라도.
"필요한 거 있음 말해요. 난 소율 양 편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백소율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시간이 돼 간다.
"필요한 건 혼자 구할 수 있으니까요."
***
휘둘러지는 창을 막아낸다. 대검의 중량이 손쉽게 창을 밀어냈으나 화살을 피하고자 몸을 굴러야 했다. 다시 일어날 때는 이미 창검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집요한 연계와 추적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마력을 터뜨려 폭풍을 불러일으키자, 그들이 거리를 벌렸다. 허나, 쉽지 않은 건 그들 또한 마찬가지. 거센 폭풍 속에서 뻗어온 건틀릿이 머리를 붙잡고 있었으니까.
"……!"
시야가 가려지더라도 상관없다. 마법사와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마력의 컨트롤이 극에 이른 강훈이 그 제어를 벗어난 다룰 수 없는 폭풍을 터뜨리면서도 마력 감지를 사용한 것이다.
힘을 가하자 산산이 부서지는 머리통. 최상위 헌터인 A클래스 헌터가 이렇게 또 생을 마감했다. 어느샌가 허벅지에는 갑주를 꿰뚫고 화살이 박혀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뽑아낸 강훈은 화살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타오르는 창염이 일렁인 순간, 꿰뚫린 갑주가 복구된다.
그 순간, 맹호와 같은 기세로 창선이 달려들었다.
"원망하는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라지만, 광휘를 죽인 건 탕아의 일원이었으니까. 그 분노가 이상한 건 아니다. 낭창낭창히 휘둘러지는 궤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날의 끝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어떤 경지에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죗값은 달게 받겠네!"
창대가 허벅지를 후려친다. 균형이 어그러진 일순간, 되돌린 창의 끝이 어느샌가 심장이 있을 곳을 꿰뚫었다.
본래라면 숨이 끊어졌으리라.
"과연……"
―――인간이었다면 말이다.
"역시…"
창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장을 꿰뚫었을 창은 단단히 박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훈은 창대를 강하게 쥐었다. 그 너머로 타고 흘러오는 악귀ㆍ원령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허나, 그것들은 선명한 마력에 침범하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날아온 화살들에 강훈은 다시금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아찔한 풍압이 폐허의 잔해를 담아 고원의 클랜원들을 위협했다.
"……윽!"
침음하는 고원. 그들의 눈에 강훈이 커져가고 있다. 쓰러지지 않을 괴물로 보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일어난 괴물. 마음속에 정말 이길 수 있는가하는 의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만, 거기에 창선만큼은 속지 않았다.
"투항하게."
침착한 어조로 항복을 권유해온다. 창선은 강훈의 마력이 바닥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힘일지라도 무한하지는 않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강훈이라는 적을 앞두고 망각했던 것. 퍼뜩 깨달은 클랜원들이 다시 정신을 재무장했다.
"……."
창선의 말은 사실이다. 누구보다 강훈 자신이 느끼고 있다. 승산은 없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 동요할 필요는 없다.
강훈은 자신의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거기에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포기하고 물러난 거라고 여겼다. ―――그 장본인을 제외하고는.
"왔군."
대체 무엇이? 강훈의 말에 의아한 듯 주변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오고 있지 않다.
"자네들이 쫓아온 게 아닐세."
강훈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는 곳에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 그건 파도 같은 게 아니다.
"흔적을 쫓은 게 아니라, 내가 흔적을 남긴 것이지."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자 고원의 모두가 눈을 부릅 떴으나 그것마저 틀렸단 걸 깨달았다. 그건 해일 같은 재해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재앙이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