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103 재앙 (2)
시간이 더 흘러 3월의 중순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이 안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고원과의 연락이 두절됐으니까. 아직 비밀리에 감추고 있지만 머잖아 퍼져갈 소식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라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점. 세베로모르스크. 콜로 반도의 가장 큰 도시가 말이다. 완전히 부서진 건물과 소금기 남은 폐허가 극한의 추위에 얼어붙은 곳. 거기가 고원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건 있다. 마지막 남은 바다의 재앙.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건지 의문이었다.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을까.
"……이게 있으니까."
강태준은 곱게 갈린 푸른 가루를 만졌다. 이렇게나 갈렸는데 여전히 거칠거칠한 감촉이 남아있다. 며칠이 지나 조사가 끝난 홍유리가 가져왔던 푸른 가루. 조사라고는 했지만, 비늘 가루란 것만 알게 됐지 밝혀낼 순 없었다. 늑대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는 혜견은 홍유리가 예상했던 대로 이것이 바다의 재앙의 비늘이라 말하고 있었다.
"……."
다만, 이해 가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 탕아들을 설립한 것이 만상의 주인인 이상 비늘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녀가 원한다면 비늘 정도가 아니라 바다의 재앙 자체를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의문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
왜 비늘을 갈았으며 이걸 어디다 쓰려고 했을까.
바다의 재앙이 도시를 파괴한 것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걸까. 자기 비늘에 이끌리는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강태준이 묻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놈들이 바다의 재앙을 부르거나 조종할 수단이라고 봐야 한다.
"……."
가장 쉬운 건 직접 시험해보는 것이리라. 정말 이 가루에 바다의 재앙이 이끌리는지를.
"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필요가 있다. 정말 바다의 재앙을 부를 수 있다면 놈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어서 강태준은 몇 가지 사진을 보여주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뒤늦게 촬영한 영상에 더해서.
"일단… 수색해 볼 생각이다. 고원의 흔적이라도 찾아야 할 테니까. 같이 가겠나?"
강태준의 물음에 늑대는……
***
여왕의 방에 들른 늑대는 침대에 가만히 누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에 띄게 악화한 몸은 이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이게…"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여왕은 누운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몸이 약해져 죽음이 다가오는 것도 아픔과 고통도 그녀에겐 다소 생소한 감각일지 모른다.
늑대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그러지 말렴. 모든 것엔 끝이 있는 법이란다."
"아시잖습니까."
"미안하구나."
왜 사과하는 걸까. 원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가진 정수를 취하면 비록 영혼의 격에는 부족할지라도 얼마든지 연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 정수가 영혼과도 같은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날 방법이 있는데도 죽음을 택하는 그 모습이 늑대에게 있어선 너무나 덧없게 보였다.
어쩌면 자색의 흑호가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서로가 다른 점은 자신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자색의 흑호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
그 과거를 일부나마 엿보았기에 차마 그러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답답한 심정이었다. 나을 리 없단 걸 알면서도 쾌유하란 말과 함께,
"고맙구나."
소리 나지 않게끔 문을 닫고 나왔다.
"여왕님은?"
홍유리의 물음에 늑대는 슬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스스로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손쓸 수 없다. 그녀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리라. 그녀의 아이들, 환수들만이 가능한 일일 테니.
"그래……?"
홍유리는 볼살을 씹었다. 몇 번인가 만나본 바로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신이라거나 환계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게 실감 날 리는 없다. 단지 알파가 씁쓸해하는 걸 공감할 뿐.
"어떻게 할 건데."
"……가야지."
강태준이 말한 폐허가 된 도시의 수색. 거기엔 자신이 있어야만 하니까. 만약에라도 바다의 재앙이 나타났을 때,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일 테니까.
그마저도 확신이 있는 건 아니나 가능성은 자신뿐이다.
"괜찮겠어?"
"너도 갈 게 아닌가."
"그야 뭐."
수색대는 꾸려지고 있다. 거기에 추적의 마안을 가진 홍유리가 포함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섬뜩했다. 만약 그녀가 돌아오지 않고 고원과 끝까지 함께했더라면 바다의 재앙에 휩쓸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백소율을 받아들인 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열 받은 홍유리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홍유리 본인에게 할 말은 아니니까.
"괜찮겠어?"
정말 따라와도 괜찮겠냐는 말에 늑대는 무겁게 끄덕였다.
"여기 있는다고 호전되는 게 아니니까."
자신이 있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면 달라질 수 있는 곳에 가야만 한다. 답답한 건 알지만… 해야 할 일을 팽개칠 순 없으니까.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면……"
그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다못해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평온한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맞이하는 그런.
"……."
***
"그런가."
알고 있었고 예견된 일이었다. 여왕의 죽음이 다가올 거란 것을. 발굽으로 천천히 바닥을 긁은 백록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리로 모셔와 주겠나?"
"때가 되면."
요정과 요정용 정도라면 몰라도 백록이나 오래된 용 같은 환수가 인간의 도시를 버젓이 돌아다니는 건 저항이 있을 터. 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충돌을 온전히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결국 그녀의 몸이 더 악화해 시간조차 벌 수 없게 된다면 환수들에게 인도하는 게 도리이리라.
그 과정에서 부디 그녀가 마음을 돌리기만을 바랄 뿐.
"정말 신세만 지는군. 고맙네."
늑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만한 도움을 받았으니까.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거다.
"환수들은 내가 모으겠네. 자네는 자네의 일에 집중해주게나. 우릴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으니. …고맙네."
"……."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겠다 하지 않았는가. 할 일을 하게."
환계에서 살아가던 백록은 바다의 재앙이라는 존재를 모른다. 하지만 역병과 질병보다 더한 존재라면 얼마나 괴물인지 막연히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늘 그랬듯, 늑대의 싸움은 쉽지 않으리라.
"……자네는 대체 뭘 위해 그리 싸우는 겐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단순히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충분하고 남을 만큼 강해지지 않았을까. 괴물처럼 본능에 이끌려 피와 살육을 탐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분명 목적이 있다. 그 궁극적인 목표를 백록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늑대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렸다.
백록이라면 종말에 얽힌 사실의 일부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환계에 대한 진실을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음에 오겠다."
다음. 그때는 아마 여왕의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
자신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끼며 늑대는 유유히 떠나갔다.
***
수색대가 꾸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하루 만에 참여를 결정한 수색대의 면면은 화려한 것. 여명을 중심으로 신전과 스퀘어를 포함해 모이게 됐으니까.
창선의 이름을 제외하더라도 고원은 하나하나가 A클래스 이상의 정예 헌터들. 그런 전력을 잃고도 가만있을 순 없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일 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그렇게 됐다."
"조심하세요."
"그래."
집결은 무르만스크 공항. 늑대는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말했다.
"미안하다. 네게 할애할 시간이 적어서."
"네? 아…"
백소율은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해하니까요. 선생님도 있으시고요."
쓰다듬던 손이 어느샌가 자신을 들어 올려 품 안에 안았다.
"전 괜찮아요."
"……빚이 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기둥서방 같은 말에 백소율은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곧 이어진 설명에,
"받을 빚이 있다. …영약 값으로 집을 받기로 했는데 함께 오지 않겠나. 넓을 거다."
소리 내 웃어버렸다. 그러자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늑대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비웃은 게 아니라……"
"……."
"청혼인가 생각했어요."
붉게 떠오른 홍조와 대조되는 하얀 숨을 뱉은 그녀에게 늑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괴물인 자신에게 그 말이 합당한지는 몰라도 마음의 방향성은 틀리지 않다.
홍유리도 백소율도 이미 자신의 것이라고, 놓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죄송해요."
"싫은가?"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싫어하실 거예요."
"내가 돕겠다."
책임이 있으니까.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그건 늑대에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유일한 후회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요."
백소율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별이 반짝이는 밤 아래, 늘 그랬듯 여명의 옥상에 있는 건 싫지 않았다. 비록 그때 그 옥상은 아니라지만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하고 싶은 것?"
늑대의 되물음에 백소율은 끄덕였다.
"마법을 더 배우고 싶어요."
"……."
"그럼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꼭 그러지 않더라도."
백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곳. 흐릿한 별무리를 올려다보며 조금 속내를 털어놓았다.
"부러웠어요."
"……."
"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잖아요."
"그렇지는…"
"못 했어요."
단정 짓는 말이었다. 질병에게서 그를 구했을 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화산각룡과 싸웠을 때, 백록과 자신은 남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이 어땠는지 지켜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깊은 후회로 남아 있었다. 자신이 좀 더 도움이 됐더라면 선생님처럼 함께할 수 있었을 테니까. 옆에 있었음에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럴 기회가 없는 게 제일일 거예요. 그래도 만약 그런 때가 온다면."
무릎 위에 올려져 안긴 채 늑대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백소율의 눈은 여전히 좀 더 높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건 싫어요."
늑대는 넋을 잃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때 다시 말해주세요."
그 진심이 눈에 보일 듯, 손에 닿을 듯 선명하게 느껴져서. 예나 지금이나 올곧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늑대는 그 마음을 곱씹어보았다.
***
늑대가 떠난 곳에 혼자 남은 백소율은 어깨 위에 감마를 두고서 발을 차듯 교차했다.
"……."
물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순순히 알파의 말에 따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 그에게 한 말 중에 거짓은 없다. 그러나 전부를 말하지 않은 것도 사실.
백소율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새로 온 문자 하나에 미소지으면서. 알파의 마음은 아직 자신보다는 선생님에게 기울어있다. 아까의 물음은 그걸 떠보기 위함이기도 했으니까.
혼자서 알파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러하리라.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그가 마음을 할애하는 사람이 늘어나 많아진다면 틈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더 생기더라도 상관없다. 그에게 있어 첫 번째가 될 수 있다면. 선생님에게서 그를 뺏을 수 있다면.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첫 번째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기 위해서 설득했고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응. 해볼게!]
돌아온 대답, 메시지에 백소율은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