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104 바다의 재앙 (2)
바다의 재앙이 사라지고 다시 햇살이 비치자 밤낮이 뒤바뀐 착각마저 들었다. 아까까지 있었던 일이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높은 파도에 홀딱 젖은 몸만 아니라면 꿈이라도 꿨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 없이 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 홍유리는 쌍심지를 켰다.
"이 미친년이!"
"……."
"저 씨발, 진짜 다 뒤질 뻔했네. 뭐해? 뱃머리 안 돌리고!"
길길이 날뛰며 소리치자 헛바람을 삼킨 선장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마지막에 바다의 재앙이 떠나간 이유는 모른다. 중요한 건 살았다는 것. 놈의 작은 변덕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사실 하나뿐이다.
"……."
입을 꾹 다문 수색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전진하자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물며 타국의 수색대 일부도 함께하는 마당에.
오히려 그 자신만만한 개소리에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졌다가 돌아온 만큼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왜 그들이 구축함에 탔겠는가. 스퀘어 마스터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과 여명의 클랜장을 구하면 얼굴이라도 익히지 않겠냐는 어렴풋한 기대 때문이리라.
바다의 재앙은 그 어렴풋함을 철저히 부숴놓았다. 어느새 구축함은 제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선장만이 아니라 선원들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이대로 항해를 계속할 순 없다.
구겨진 수색대장이 손톱을 깨물며 표정을 구기자 통쾌함을 금치 못했다. 사이다라도 들이킨 것처럼 속 시원한 표정을 지은 홍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닷물에 젖어서? 어느새 멀미가 가셔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아무렇지 않게 끄덕인 홍유리는 일단 옷이라도 말릴 겸 불을 일으키곤 안심하다가, 다리가 풀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원래라면 뱃머리가 돌아가야 했었다…….
"……못 해요."
잘못 들었을까? 아니, 아니었다.
"아까 그것 때문에…"
암초일까. 해일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에?
그 뒤로 선장과 수색대장이 무어라 말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저 들려온 거라고는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됐다는 것.
누구 할 것 없이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
백 미터 가까운 해일이 밀려들어 오는 걸 늑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효과는 의심할 여지 없는 모양. 저럴 수 있는 존재는 달리 둘도 없다.
바닷속 깊은 곳을 늑대의 눈이 투시해 꿰뚫어 보았다.
깊은 곳이라고는 했지만, 수면 가까이 있다. 그 거대한 몸이 깊은 곳까지 닿아있을 뿐. 생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크기다. 어쩌면 이 광활한 바다조차 놈에겐 좁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바다의 재앙(Leviathan)]
[체장 13.79km] [체고 324.3m] [체중 1.84mt]
[힘 987] [민첩 765] [체력 906] [마력 887]
그걸 보고서 늑대는 터무니없다고 느꼈다. 생물의 크기가 아니다. 아무리 공허가 있어도 저런 걸 먹어치우는 데 도대체 얼마나 걸릴까? 아니, 쓰러뜨릴 수나 있을까.
화산각룡이나 질병조차 비할 바가 아니다. 정신체인 자신과 흑호와는 다르지만 생물의 정점이 저런 것이라고 느끼고 만다.
업을 가지고 있어 비록 꿰뚫어 보진 못했지만… 산을 뽑아 들어 올렸던 흑호와 산보다 더 거대한 바다뱀.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저 거대함 자체가 무기. 그것도 터무니없는 질량병기다.
늑대가 바다의 재앙을 살필 때, 강태준은 침음했다.
"무슨……"
재앙이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자 해일이 지상에 부딪혀 깨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양의 물이 재해로 닥쳐온다. 해안에서 한참 떨어진 여기까지 닿는 건 순식간이리라. 강태준과 조종사를 들어 올려 발판을 밟은 늑대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물을 높이 뛰어올라 피했다.
"……."
어느새 그것의 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감정 없는 바다뱀과 눈이 마주쳤을 때, 늑대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느껴졌다.
곧 그 위화감마저 지워지고 길게 몸을 뻗은 재앙이 육지 깊은 곳까지 몸을 들이밀었다.
거기서 강태준은 자신이 또 한 번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7km… 아무리 커도 그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지상에서 본 바다의 재앙은 그 배는 돼 보였다.
고도 4000m? 터무니없다. 아마 그 두 배인 8000m의 고도에서도 닿았을 거다. 놈에게 있어선 이 지구라는 행성은 좁은 어항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것의 입이 한껏 벌어지자 강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미가 인간과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느껴지는 거라곤 그저 막연한 암담함일 뿐.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태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놈이 바다가 아니라 지상에 있었더라면 인류는 1년도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적어도… 바다의 재앙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까.
놈이 콧김을 뿜어내자 바닥에 검을 깊게 박은 강태준은 어느새 기절한 조종사의 뒷덜미를 잡고 견뎠다. 정신 나간 덩치인 만큼 날숨이 태풍처럼 느껴진다. 마력까지 다소 사용하고서야 버틸 수 있었다.
"……휴."
해안에서 10km. 아무리 그래도 전신을 지상에 올리진 않을 모양이지만 여기도 안전거리는 아니다. 조종사가 기절한 걸 다행이라 여기며 늑대에게 물었다.
"할 텐가?"
강태준이 묻자 늑대는 잠깐 바다의 재앙을 쳐다보았다.
……고민하고 있다.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평지에서라면 상관없겠지만, 놈은 금세 바닷속으로 몸을 숨길 터. 깊은 심해까지 끌려가면 아무리 수륙양용이 있다 한들 어떻게 될지 모른다.
"……."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만 조심하면 싸워볼 만 하다는 것. 아니, 절호의 기회였다. 어찌 됐건 놈과 싸우면 주변에 피해가 갈 테니까. 그럴 걱정이 없는 이곳, 그린란드에서 놈과 싸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늑대는 재앙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심하네…"
인근 섬까지 떠내려와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상태… 아니, 그것도 틀렸다. 숨은 진작에 끊어졌으니까. 애초에 살아있는 이가 아니었다.
"끼기- 끼기기긱!"
망가진 얼굴로 비틀어지게 웃는다. 이것저것이 튀어나오고 소금기에 절여져 있다. 사후경직으로 진작에 딱딱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끼기긱-"
기묘하게 웃는 시체. 그러거나 말거나 육체의 지배권을 뺏은 악귀ㆍ원령을 몰아낸 소녀는 이젠 갉아 먹힌 희미한 영혼을 붙잡아 이끌었다. 죽은 이를 살리는 게 아니라 시체에 영혼을 묶어두는 것뿐이다.
영혼을 붙잡아 육체에 묶어두는 주술의 계통. 일종의 강령술이었다.
"……."
마법과 연금술에 그치지 않고 잡학과 강령술까지 영겁의 시간을 들여 소녀는 그 모든 지식을 습득해왔다. 그에 따라 곧 돌아온 영혼이 육체에 스며들자 무겁게 감긴 눈꺼풀이 떠졌다.
"아, 아. ―――. 아."
육성을 뱉는가 하면 영성이 소리친다. 그건 마치 조정이라도 하는 듯 들린다. 강훈의 음성이 돌아왔을 때, 소녀가 손을 튕기자 창염이 불타오르며 다시금 갑옷을 만들어냈다.
"……쓰러졌었나."
바다의 재앙을 부르고 마지막 순간 스크롤을 썼던 것 같은데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던 모양.
하지만 자신이 이 꼴이라면 고원의 나머지는 바다의 재앙에게 삼켜졌을 터… 고작 여파에 이렇게 된다니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자조할 거 없어."
"……?"
"바다의 재앙은 멸망의 끝이니까."
멸망의 끝――― 그 말인즉,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면 멸망에서 벗어나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 그런데도 강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멸망의 다음에 있는 것이 종말이라는 것을.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종말이 와 모든 걸 끝내기 전에 그녀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비늘 가루로 고원을 쓸어버리긴 했지만 그게 끝이다.
탕아들은 괴멸했고 남은 건 그녀와 자신뿐…
"어떡할래?"
자신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음에도 콧노래를 부르며 물어오자 강훈은 눈을 감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멸망이 멀어진 만큼 당겨오면 된다. 그 늑대를 피해서 어떻게든 인류를 절반만 없애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훈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녀는 웃고 있었다.
"어떻게?"
"비늘 가루를 사용하면……"
가능할 리가 없다. 바다의 재앙―― 놈이 끔찍한 재앙인 건 맞으나 어디까지나 바다에서일 뿐이다. 아무리 비늘 가루를 써본들 인류를 절반이나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어떻게든 멸망을 막기 위해 발버둥 쳐 왔는데, 이제는 멸망을 대신해 인류를 쓸어버리려 한다는 게. 그리고 마랑의 존재로 이젠 그것마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 어떤 수단을 써도 마찬가지이리라.
"…끝난 건가?"
그래서 물은 것이리라. 어떡할 거냐고. 종말을 막을 시간도 방법도 없다.
종말을 향해 달리는 멈추지 않는 고장 난 기차나 마찬가지.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나서지 않는가?"
눈앞의 소녀. 만상의 주인이었다.
그녀가 그럴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랑을 죽일 수 있을 터. 종말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하지 않는가.
"응. 걸었거든."
"……."
"어차피 엘릭서는 못 만들어."
시간이 있어도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신혈을 얻을 방법이 사라진 이상, 엘릭서를 만들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소녀는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그 눈동자가 이지적인 빛을 발했다.
"있어, 있어!"
희열에 찬 목소리로 소녀는 드물게 감정을 드러냈다. 환계를 침공하면서까지 바랐던 건 환계같은 게 아니라 여왕의 피. 하지만 지금 몰락하고 만 그녀의 피를 가져봤자 아무 의미도 없으리라.
그래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남아있어…!"
신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신이 아니라 신에 가장 가까운 피. 즉, 태생을 초월자로 태어난 이들의 피였는데.
"그래. 그거면…"
만상의 주인은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여왕만이 아니라 흑린이라는 검은 도깨비불이 아직 남아있다.
그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소녀는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