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104 바다의 재앙 (3)
기절한 조종사를 둘러업고 내륙으로 걸었다. 물론 바다의 재앙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겠지만 여파는 닿을지도 모른다.
아까의 해일을 피하지 못하고 밀려든 몬스터가 여기까지 와 쓰러져 있다. 호흡기에 물이 가득 차 질식하거나 온몸의 뼈가 부러져 목숨만 겨우 건진 우스운 모양새로.
"크오―"
전광석화의 일격. 소리가 뒤따르는 속도로 찌른 검을 뽑아내자 목에서 피 분수를 내뿜으며 단말마와 함께 숨이 끊어졌다. 바닥을 본 강태준은 대충 이쯤이 안전거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해안에서 대략 15km. 건물이 없고 고도가 낮은 평지라도 바다가 보일 리 없다. 이미 지평선의 끝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탑처럼 쌓인 쓰러진 몬스터를 밟고 올라간 강태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을 만큼 놈의 덩치는 잘 보였지만. 강태준은 비늘 가루를 더 깊은 품속에 숨겼다. 놈이 찾는 건 십중팔구 이것이리라.
그 순간, 마침내 그것이 알파와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둘을 비할 순 없다. 재앙에 비하자면 검은 늑대는 초라하리만치 작았으니까. 그래도 걱정하진 않았다.
마랑에게는 물어뜯을 송곳니가 있었으니.
***
1t. 즉, 1000kg의 186만 배. 생물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질량 덩어리가 움직이자 지진이 일어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 실제로 어지간한 지진 이상의 충격이다.
대지가 반으로 갈라졌으니까.
조그마한 섬이라면 가라앉거나 조각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아무리 놈이라도 200만km²가 넘는 섬을 가라앉히진 못한다.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놈에게 이어지는 마력의 발판을 만들어 그 길 위를 달렸다. 마정이 끓어오르는 이상 마력에 대한 걱정은 접어둔 채로 촉수와 그림자를 뻗었다.
검은 장막을 만들어 그것을 또 하나의 길로 삼아 달려간다. 그러고 있는데도 바다의 재앙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알고도 무시했다는 게 더 옳으리라. 비늘 가루에 정신 팔린 놈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당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래 주길 바랄 정도다.
"……?"
뒤늦게 낌새를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꼬리 부분을 바다에 담궈둔 채 지상 깊숙이 몸을 내민 괴물의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으니까.
가능하면 뭍으로 완전히 끌어들여 싸우고 싶지만 저 덩치를 들어 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놈이 육지에 올라올 리도 없을 테고. 이대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비늘 위 늑대가 달리는 만큼 바다뱀은 검게 물들어갔다. 뒤따라 일어나는 겁화의 불길이 새까맣게 넘실거린다.
제아무리 놈이라 한들 겁화가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몸부림치며 이리저리 부딪쳐 땅과 비늘이 마찰해 얼음이 부서진다. 몸을 비튼 바다뱀이 한껏 입을 벌린 채 새액거렸다.
"―――."
하지만 바다뱀이 거대하다면 늑대는 빠르다. 거기다 이런 싸움은 수도 없이 경험해왔다.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왼쪽!'
스테이터스상의 뒤처짐을 수읽기와 폭풍을 둘러 커버하며 유리한 고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들러붙자 바닷속에 담그고 있던 꼬리가 물을 퍼 올렸다.
애들 장난과도 같은 행위가 장난과는 거리가 먼 양의 물을 일거에 쏘아냈다. 비상식적인 힘으로 끌어 올린 물은 그 자체로 거대한 철퇴나 마찬가지. 미리 읽고 피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건 어렵지 않다. 더 커다란, 더 거대한 상대와 싸우는 건 일상이었으니까. 늘 피해야 했고 읽어야 했다.
어렵잖게 피하며 몇 번인가 공격을 무위로 돌리자 바다의 재앙은 분노와 함께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직 자신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단 증거였다.
귀찮은 벌레에서 신기한 벌레… 그 정도 인식이 아닐까.
분명 겁화에 타오르고 있지만 그 비상식적인 덩치를 전부 불사르기란 쉽지 않다.
아까 물을 끌어 올린 꼬리가 이번엔 대지를 파고들었다. 얼음의 땅을 깨부수고 마치 삽이라도 된다는 듯 퍼올려 던져버린다.
늑대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과 흙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아까와 다를 게 없으니까.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그러지 못하는 건 공허를 두른 그림자 속으로 집어삼켰다.
거기서, 놈의 눈빛이 한 번 더 변했다.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입을 벌리자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
한껏 들이켠 숨에 대기가 사라져간다. 압도적인 폐활량에 놈이 부풀어 올랐다.
묘한 기시감. 화산지대에서 보았던 레서 드레이크가 떠올랐다. 그 순간, 들숨이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육감이 맹렬한 경고를 발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소리치고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브레스의 전조. 숨결이 내뿜어지기 전에 멀어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 거대한 놈으로부터 어디로 숨을 수 있다고?
맞받아치거나 아니면… 늑대는 바다뱀을 타고 달렸다. 되레 놈의 머리를 향해 정면으로.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푸른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
전부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꽁꽁 얼어붙은 섬이었던 그린란드의 부서진 대지를 봉합하듯 비어있는 곳곳을 이어놓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바다를 얼어붙은 대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만한 위력. 한기 서린 숨결이 지형을 바꾼 것이다.
스산한 한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자 강태준은 말을 잃었다. 어디에도 알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당한 걸까?
아니, 아니었다. 얼음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거기서 강태준은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진화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정작 그 본신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전 알파의 본신이 살기로 가득한 불길한 마랑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알파는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이 느껴졌다.
별격의 존재――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마랑이 두 발로 얼어붙은 대지를 밟고 서자 뜨거운 열기에 증발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눈 사이를 좁혔다. 알파로부터 격이 다른 마력이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순도가 다르다. 마력을 농축해 정수로 만든다면 저러할까.
소리 없는 감탄을 내뱉은 가운데, 마랑과 재앙이 울부짖었다.
강태준이 생각한 거라고는 여기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 더 깊은 곳을 찾아 멀어져야 한다.
***
바다가 일어나고 땅이 얼어붙는다. 그만큼 요란하고 규모가 다른 싸움이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놈의 능력들을 곱씹으며 늑대는 이 싸움을 설계해나갔다.
급할 이유가 없다. 천천히 사냥해나가면 된다. 실수하지 않는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테고, 사선을 넘는 법이라면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움직임 하나하나를 읽지만, 역시 까다롭다. 초감각을 가진 건 자신만이 아니었으니까. 서로가 그 너머를 읽고 대비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늑대의 뒤를 받치며 지탱하고 있었다.
승산이 오른다. 확신 없었던 승기가 점점 부상한다. 지상에서라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겁화가 곳곳에서 타오르며 거대한 놈을 불태우고 있기에 재생하는 속도가 따라잡질 못하고 있다.
심장과는 또 다른 가상의 기관. 실존하지 않는 마력의 동력원인 마정이 펌프질한다.
놈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끊임없이 움직이고 한 번이라도 붙잡혀서는 안 된다. 1000에 가까운 놈의 힘에 휘말렸다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비늘 위를 달리다가도 아찔한 순간이 찾아오면 발판과 촉수를 십분 발휘하며 회피했다. 놈에게 있어 자신은 벌레와 다름없을 터. 짓누르면 끝인데 잡히지 않는다는 게 화를 돋우고 있었다.
꼬리가 물살을 쳐올리고, 얼어붙은 숨결을 뱉고. 몸을 비틀어 바닥에 짓누르려 하고. 어떻게든 떨쳐내려 하지만 늑대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이 지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닷속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기 전에 놈을 물어뜯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점. 원래라면 닿는 족족 먹어 치우며 체력과 마력을 빼앗았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다.
놈에게 마찬가지로 자신과 같은 스킬이 있었으니까.
B등급의 스킬, 잠식.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과 동등한 포식 스킬을 가진 몬스터를 보게 됐다.
아마 잠식이 스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었더라면 더 높은 등급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건 놈이었으니까. 여태껏 얼마나 많은 것들을 먹어 치웠을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쉽지 않다는 거였지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넘실거리는 아지랑이를 두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용린이 사라져간다. 비록 잠식의 등급은 같더라도 늑대에겐 공허가 있었으니까.
"―――!"
그 순간, 바다가 흔들렸다.
머리까지 달려 두 눈을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일단 눈을 멀게 하면 다시 재생할 때까지 유린할 수 있을 테니까. ―――푸른 벽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란 얘기다.
먹어 치워도 끝이 없는 그 무지막지한 수량에 밀려나고 말았다. 놈을 불태우던 검은 불길조차 바다의 벽이 덮은 순간, 씻겨나가고 말았다.
미리 보아 알고 있다. 저게 놈이 가진 A등급 스킬 해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붉은 눈을 번뜩이며 혜견으로 그 실체를 다시 한번 더 꿰뚫어 보았다.
[보유 스킬]
[용운(A²)] [해신(A¹)] [대마력(B)] [지배의 마안(B)] [수류 지배(B] [용혈(B)] [청무(B)] [신력(B)] [잠식(B)] [고속 재생(B)] [무효화(B)] [용린(C)] [초감각(C] [수륙양용(D)]
―――복잡하진 않아도 하나같이 등급이 높은 스킬들. 심지어 그동안 성장한 혜견이 엿본 스킬들 중에선 A등급이 둘. 그리고 격의 상승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실체도 보지 못한 용운은 공허와 동등한 격을 지니고 있다.
스테이터스에선 뒤처진다. 체격과 중량에서는 비교하는 게 무안할 정도다. 그런데도 스킬에서조차 크게 앞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싸움은 수치로 하는 게 아니라지만 중요한 건 바다의 재앙이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골치 아픈 상대라는 것.
게다가 역병과 질병처럼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이지를 가지고 있다. 처음 놈을 보았을 때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그것이었다. 그걸 싸우면서 깨달았다. 흑호처럼 말을 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지만…
아까까지 비늘 가루를 찾던 놈의 입으로부터 긴 숨결이 뿜어져나 온다. 고작 그것만으로 짙고 푸른 안개를 만들어낸다.
거기에 맞서 늑대 또한 검은 안개를 불러일으켰다. 흑무와 청무. 스멀거리는 검고 푸른 두 안개가 서로를 침식하며 소리 없이 맞부딪쳤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싸웠을까.
그 너머로 한 척의 배가 그린란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하지만 문제는 고작 열 같은 게 아니다. 아름다웠던 머리칼은 빛을 바래고 푸석푸석해져 간다. 피부는 수분을 잃어 모래처럼 변하고 몸 이곳저곳에는 있을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태는 최악. 식은 수건을 다시 바꾸어 주었지만 이렇게 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결국 때가 됐음을 느꼈다.
"…가셔야겠어요."
"……."
여왕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따라 자주 울먹이는 요정들은 훌쩍이며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불덩이 같은 이마와는 달리 손등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떠나기 전, 알파가 부탁했던 대로 여왕을 환수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줘야 한다.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길어야 1, 2주이리라.
……백록은 환수를 불러모으고 있다고 했다. 여왕의 마지막 순간에 다들 함께하기 위해서. 부디 그녀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다른 이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