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 #104 바다의 재앙 (4)
고장 난 배. 돌아가지 않는 뱃머리. 멈추지 않는 엔진이 얼음 섬을 향해 직진해 달리고 있었다. 출항하기 전에 나름대로 정비는 했겠지만 세월에 녹슬어 고쳐지질 않는다. 역시 해일과 문어 대가리가 결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 수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건만…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린란드의 지척까지 와 재앙의 뒷머리가 어렴풋이 보이게 됐으니까.
"씻팔."
씹어뱉듯 말한 홍유리는 주문을 읊었다.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뱃머리를 돌리기 위해서. 배의 상태가 악화할까봐 하지 않았지만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들어 올린 검지 끝에 마력이 모인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치고 주문을 뱉기 직전,
"―――Interferență."
누군가의 주문과 함께 마력에 간섭이 들어왔다. 냉정하고 차가우면서도 뛰어나다. 그 고저 없는 일정한 마력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뻔하다. 이 배 위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으니까.
"제정신이에요?"
"폭발시켜봤자 고장 날 거에요."
담담한, 가진 마력과 닮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손잡고 뱃속에 들어갈까요? 시발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지?"
"아직 시간은 남았어요. 배는 느려요. 1, 2시간은 더 걸리겠죠."
홍유리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지랄. 저 새끼가 고개만 돌려도 다 뒤지게 생겼는데 뭔 씹소리를."
"팀장님. 일단."
"놔. 할 말은 해야지."
붙잡는 팔을 거칠게 쳐낸 홍유리는 눈을 치떴다. 아무리 스퀘어 마스터라도 그렇지 무슨 개소리를. 뭐 시도도 안 해보고 다 같이 죽자는 말인가?
"아, 씨발. 그래요. 그럼."
꼬리로 바닥을 친 홍유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간섭받았던 마력이 빛을 발하며 붉게 물들어간다. 다시 지배권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홍유리가 발했던 마력이 붉고 푸르게 팽팽하게 맞선다. 거기에 좌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인이자 여명 제일의 마법사. 동시에 이름난 헌터이기도 했지만, 감히 스퀘어 마스터와 견줄 수는 없다.
인류의 정점. 마법사들의 종착지가 바로 그들이었으니.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 생각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밀리지 않고 팽팽히 맞서고 있었으니까. 믿기 어려워도 보고도 믿지 않을 순 없다.
타오르는 듯한 진홍과 차갑게 깔린 남색의 마력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마력을 빚고 짜내고 거두고 밀어내고 당기며 지배권을 가져오려 하는 마법사들의 싸움.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자 겨울의 주인은 이채를 띠었다.
얼마 전 스퀘어에서 그녀의 마법은 제법 봐 왔다.
특히, 대마법의 화력을 한데 모아 집중시킨 검은 나선의 창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고.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후계자들과 비교하는 건 무안하더라도 마스터의 영역에 들진 못했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아니, 오산이게 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해 기어코 여기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지금 당장 레드 스퀘어 마스터가 돼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그만한 힘과 자격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
겨울의 주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마력은 결국 푸르게 변해갔다.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옐로우 스퀘어를 제외하면 수십 년간 마스터의 자리를 지켜왔다는 뜻이다. 어쩌면 북풍의 주인과는 좋은 승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 놀라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 지배권은 전부 넘어왔다. 이걸로 끝…
그렇게 생각했다.
비틀린 미소를 띤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겨울의 주인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게 됐다.
"Iată moartea ta!"
한껏 외치는 주문의 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이미 마법은 완성돼있었다. 다시 간섭을 외쳐봤을 땐, 너무 늦었다.
그 당당한 선언과 뜻밖의 실력과 주문 보류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마력 싸움을 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던 것. 겨울의 주인이 이마를 찌푸렸을 때, 파도 치는 바다에 폭발이 일었다.
***
바다의 재앙과 싸우던 늑대는 먼바다에서 어렴풋이 하얀빛이 터져 나오는 걸 목격했다. 아직 먼 거리였지만, 눈에 익은 폭발이었으니. 아름답고 새하얀 빛은 분명 홍유리가 전매특허로 꼽는 마법.
폭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재앙의 꼬리를 피한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사지에 뛰어드는 건 전혀 다르다. 죽음을 불사하는 건 각오지만 의미 없는 각오라면 무모함이었으니까.
바다뱀의 비늘을 억지로 물어뜯은 늑대는 놈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끔 조금 무리한 공격을 이어나갔다.
바닷물이 출렁이고 그것들이 중력의 흐름을 거부하듯 이리저리 떠다닌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자신을 엿보고 있다.
그 개수만 무려 565. 틈을 드러내면 일제히 덮쳐오리라. 경계를 더해 뾰족하게 일어선 재앙의 비늘을 물어뜯어 아공간 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비늘 하나의 크기가 심상치 않아 딱 하나가 한계였지만.
아직 가루에 여분이 있다지만 여기서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것과는 달리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진 못했다.
당연하다. 아무리 날카로운 바늘이라 해봤자 그걸로 사람을 죽이기란 어려우니까.
"……!"
폭발에 출렁이는 바다. 조금이지만 배가 전진하는 방향이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자신은 가진 힘을 다 드러낸 것에 반해 바다의 재앙은 아직 용운이라는 힘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무수한 파편이 튀자 공허로 막으려 했으나 시야 가득히 붉은 목젖이 보이게 된 순간,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영량을 펼쳐 위치를 숨겨봤자 놈은 전부 먹어 치우고 말리라.
발판을 여러 개 만들어 앞발로 밟은 늑대는 다리에 가득 힘을 주며 높게 뛰어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발판을 촉수가 밀어내 뛰어오르는 힘을 더한다.
폭풍을 터뜨리고 탄력을 더해 가까스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는 듯 해일이 밀어닥쳤으니까. 이미 그린란드의 얼음을 녹인 해수가 압도적인 수량으로 자신을 노린다.
정면에는 해일. 바닥에는 덜 녹은 얼음이 섞인 해수.
공허를 일으켜도 압도적인 양의 바닷물에 쓸려나가게 될 터. 그렇다고 겁화로 불태울 수 있는 양도 아니다.
그리하여, 늑대는 해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재앙의 턱은 허공을 씹었고 늑대는 난폭한 격류 속에 흐름을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대로 내륙 깊숙한 곳까지 쓸려나가 멀어지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끌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결국 해일 또한 거대한 파도에 불과하다. 금세 흐름을 찾은 늑대는 파도의 가장 높은 곳을 통해 빠져나왔다.
공허를 둘렀는데도 다소 뻐근함이 남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으리라. 서핑이라도 하듯 발판을 만들어 파도를 탄 늑대는 지면을 깨부수는 거친 흐름에서 높이 뛰어올랐다.
어느새 두 번째 해일이 밀려든다. 바닥에 부딪힌 해일이 모두 집어삼키며 파괴적으로. 문제는그런 해일이 아직 한참이나 더 밀려온다는 것.
그린란드가 아니라 다른 섬이었으면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처럼 정말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도를 타고 또 타며 그 흐름과는 반대로 역주행한 늑대는 다시 재앙을 물어뜯기 위해 뛰어올랐다.
***
해안에서 25km.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영향이 미치진 않는다. 땅울림은 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견딜 만하다.
오히려 그 진동에 기절하던 조종사가 눈을 떴다.
"여긴…?"
여전히 얼어붙은 대지. 가까운 곳까지 해수가 밀려왔지만 닿진 않는다. 해일에 떠밀려온 몬스터의 사체가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곧 안전하단 걸 깨달은 조종사는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반인인 그의 눈에 지평선 너머가 보일 리 없지만, 재앙의 끝을 모르는 거신만큼은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다. 가만 지켜보는 것밖에는.
***
폭발의 영향으로 뱃머리가 조금 꺾였다. 비껴나갈 수 있을 각도가 됐지만 아직 부족하다.
"연료는! 고장은!"
선원들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배의 상태를 점검한다. 어딘가 망가진 곳은 없는지. 혹은 연료가 새지는 않는지.
곧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어디 잘못된 곳은 없는 모양. 그럼 됐다. 홍유리는 또 한번 마법을 준비해갔다.
"그만 하세요."
차갑게 깔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제재해와도 홍유리는 무시로 일관했다.
겨울의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고 있다.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 수리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자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럴 여유가 어딨다고?
당장 놈이 눈치채고 이쪽을 보기만 해도 끝장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다.
성향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미 분위기는 기울었다. 이상 없이 뱃머리가 돌아갔으니까. 한 번 성공했다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리라 여긴 좌중이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거기에 홍유리는 기꺼이 응하며 마력을 모았다.
다시 한번 간섭하려던 겨울의 주인은 이미 분위기가 반전됐음에 한숨 쉬었다.
틀린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에나 할 선택이지 지금 했다가 실패하면 뒤가 없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랑이 싸우고 있는 만큼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강구하고……
겨울의 주인은 흠칫했다. 바로 거기서 생각의 차이가 생겼다는 걸 깨닫고서.
"스승님?"
제자이자 혈족인 후계자가 물어오자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홍유리는 다시 주문을 읊었고 겨울의 주인은 이번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저 멀리 파도를 넘어 재앙을 물어뜯는 마랑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서.
***
자신의 그림자, 영량에 닿는 그림자를 지배하는 스킬 그림자 지배.
재앙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늑대는 영량을 뻗쳐 그 커다란 그림자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건 아무리 늑대라도 여태 다뤄본 적 없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
13km가 넘는 체장과 300m 이상의 체고. 그만큼의 그림자가 지배하에 들어와 무기로 화했다. 그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건 제아무리 늑대라 한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일이 제어할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훌륭한 무기였으니. 녹조류에 뒤덮였던 재앙의 몸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공허도 겁화도 결국 먹어 치우고 불태울 뿐이지 놈에게 단번에 치명상을 입힐 위력은 없다. 아니, 위력이 아니라 크기의 문제. 저 덩치를 한 번에 어떻게 할 순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놈의 면적 그대로인 그림자라면.
"――――――!!!"
끔찍한 비명과 함께 몸을 비트는 재앙. 본래라면 그림자만으로 용린과 무식한 체력을 뚫을 위력은 없다. 그래서 레서 드레이크에게 고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허를 얻은 이후, 잠식을 비실체의 힘에 적용할 수 있게 된 이상 이야기가 다르다.
곧 마력을 일으켜 그림자를 걷어냈지만, 비늘 사이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꼭 등급이 높은 스킬만이 무기가 되는 건 아니다. 상황을 주시한 늑대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이대로 싸우면 쓰러뜨릴 수 있다. 용운의 힘은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그것만 넘어선다면 가능하다.
그렇게 여겼다.
―――바다의 재앙이 고개 돌리기 전까지.
"―――?"
그것이 기묘한 소리를 토해내며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을 때,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알고 시선을 돌린 게 아니라 불리함을 깨닫고 바닷속으로 숨어들려다가 발견한 거였으니까. 바다뱀의 눈이 게슴츠레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