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105 붉은 마랑
대지가 가벼워진다. 부서지고 깨지고 바닷물이 차오른 얼음의 땅이 조금 떠오른 듯한 기분이 든다.
고개 돌린 재앙이 구축함을 목격한 순간,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놈이 반드시 배를 공격할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
놈을 죽이고 먹어치우는 것과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막는 것. 어느 쪽이 중요한지는 정해져 있다. 하물며 홍유리가 타고 있음에야.
발아래 닿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비늘. 그 하나하나가 잠식을 사용한 채 유지하고 있다. 이 순간조차 비늘과 발톱이 서로 먹어치우며 맹렬히 싸우고 있다.
순간, 비늘이 삼켜져 속살이 드러났다.
공허로 먹어치워 조금이나마 놈의 체력과 마력을 빼앗아와 그걸 발판삼아 달렸다. 기다랗고 커다란 바다뱀, 레비아탄이 기어코 몸을 밀어 넣자 바다가 붉게 변해갔다.
늑대가 지배하에 둔 그림자가 레비아탄을 핏덩이로 만든 것. 그 피가 물 속에서 확산한 거였다.
그 하나하나가 용혈. 마법사와 헌터들이 눈을 붉힐 비보가 아무 의미도 없이 바닷물에 스며들었고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몬스터들이 몰려와 목숨을 걸고 핥으려 했다.
드러난 속살에 발톱을 박아넣은 늑대는 레비아탄을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헤엄치는 레비아탄의 목적지는, 그 방향이 가리키는 곳엔 분명 구축함이 있었다.
화풀이 혹은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가만히 둘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발톱을 박아넣은 늑대는 수압에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폭풍을 둘렀다. 수압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지만, 바다의 재앙이 움직이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마치 물살이 자신을 때리고 지나가는 듯하다. 아니, 그건 착각이 아니다. 이곳은 바다. 즉, 놈의 영역이자 해신의 지배 아래라는 것. 놈만이 물에 저항을 받지 않고 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수중에서의 레비아탄은 지상에서의 자신보다 더 빠르다. 그에 밀려 나간 물이 수면 위로 계속 떠오르며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만든다.
공허를 일으켜 비늘을 더 먹어치우던 늑대는 전신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직진하던 놈이 더 깊은 바다로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새 수심 3000m. 놈의 길이가 13km가 넘어간다는 건 곧게 섰을 때, 바다 어느 곳에서도 완전히 잠길 수 없다는 뜻이다. 심해에서 수면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몸. 바닥 근처를 헤엄치며 늑대는 수 없는 몬스터들을 보았다.
눈이 없고 감각 기관이 멀어버린 괴물들. 그것들이 레비아탄이 파헤친 물살에 벽과 바닥에 부딪힐 때까지 밀려나거나 혹은 죽었다.
그 덩치만으로 재앙. 하지만 심해 몬스터들에게 찾아온 재앙은 늑대에게 있어 호재였다.
서로 잠식을 가지고 있기에 공허를 사용해서도 체력과 마력을 빼앗아오기 힘들었다.
그걸 여기서 보충한다. 탐욕스레 뻗은 영량이 죽은 몬스터를 향해 빠르게 뻗어 나가 단숨에 집어삼켰다. 끌려가다 마침내 심해 바닥까지 닿자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온 바다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해신의 힘과 수압이 더해져 옥죄어온다. 결정적으로 몸을 비튼 레비아탄이 자신을 바닥에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늑대는 깊게 박아넣은 발톱을 떼어놓았다. 휩쓸리면서도 어떻게든 놈에게서 떨어졌고 레비아탄은 홀로 바닥에 충돌했다.
그린란드해 전체를 울리는 충격. 그 힘을 거꾸로 이용해 떠오른 늑대는 순식간에 수면까지 나아갔다. 오르는 도중 미처 먹지 못했던 몬스터를 다시 삼키면서.
―――37레벨. 심해의 몬스터를 먹기도 했지만, 바다의 재앙 레비아탄의 일부를 먹으며 성장한 것. 다시 체력을 회복한 늑대는 저 아래 레비아탄이 다시 몸부림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힘들다. 따라서 그럴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스킬 포인트 58]
64개의 스킬 포인트까지 고작 여섯 걸음. 동시에 무려 여섯 걸음이기도 하다. 거기까지 다다르면 혹시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억지로 참아왔다.
흑호를 쓰러뜨릴 때도 새로운 스킬을 가졌다면 훨씬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을 터. 그럼에도 하지 않았다.
그 너머에 있는 헛된 가능성을 믿고 싶어서.
알고 있다. 그저 바람이었을 뿐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그래. 잘 알고 있다. 시스템이 줄 수 있는 스킬은 이미 멸망한 세계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스킬뿐이니까. 그 외에 스킬들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획득 가능 스킬 목록]
……
2653. 겁화(A)
2654. 구현화(A)
2655. 광폭화(A)
2656. 무령(A)
2657. 공절(A)
―
전부는 아니지만, 눈에 익은 스킬들이 있다.
한때는 포기했지만 역병을 쓰러뜨리기 위해 익힌 겁화. 환상조차 현실로 만들어내는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의 구현화. 원작의 주인공인 단세혁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인 무령과 공간 자체를 절단하는 힘인 공절.
스킬의 계보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이전과는 달리 자격이 없어서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끝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은 스킬이 있을 테고, 스킬 목록의 스킬들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잃어버린 자들이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스킬일뿐.
무수히 많은 끝을 맞은 세계의 주민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A등급의 다음인 등급 외 스킬을 획득하진 못했다. 격의 상승으로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길에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킬 포인트로 획득할 수 있을 리 없다.
등급 너머에 있는 힘은 그리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설령 가지고 있는 스킬을 다시 획득해봤자 격의 상승을 꾀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닿지 못한 미답의 영역은, 격의 상승은 그렇게 넘어서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레비아탄이 구축함을 향해 나아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광폭화(A)를 획득했습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26]
―――늑대의 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팀장님. 와요! 오고 있어요!"
"알고 있으니까 닥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그 커다란 덩치가 사라졌으니까. 마지막에 고개를 돌렸던 걸 생각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전부 끝. 스퀘어 마스터? 천 명은 있어야 승산이 생기리라. 겨울의 주인은 진작부터 주문을 외고 있었다.
"―――Se înroșesc."
그 뒤를 따라 홍유리 또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놈이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대마법이어야만 한다. 아니, 대마법으로조차 닿지 않으리라.
"Acoperit în foc negru."
순식간에 읊어진 주문은 2, 3절에 이어 4절까지 도달했고 마지막 주문을 뱉는 것보다 좀 더 빠르게 요동치는 물살에 구축함이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다.
뒤가 아니라 앞에서. 영리한 놈은 도망칠 길을 막듯 기껏 돌린 뱃머리의 앞까지 다가왔다.
"오, 올라와요!"
그리고 그 머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
"În iarna eternă totul va îngheța!"
"Iarna rece va îngheța totul și o va opri!"
겨울의 주인과 그 혈족이 미리부터 읊고 있던 대마법이 바다를 얼어붙게 했다.
염원에 담긴 바람은 영원한 겨울. 계절이 바뀌며 언젠가 찾아올 봄마저 삼켜 얼리는 혹한의 추위. 물결이 얼고 움직임이 사라지고 열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듯했다.
역병조차 얼어붙게 했던 그 마법은.
"……!"
바다의 재앙에 이르러 단 1초도 멈추지 못한 채 깨지고 말았다. 처참하게 부서진 얼어붙은 바다로부터 기어코 재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구축함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는 괴물. 그 때문에 모두가 바닷물로 몸을 적셨지만, 멍하니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성큼 다가왔는데도 이 자리의 모든 인간이 넋을 잃었다.
화살에 시위를 건 궁수도 창칼을 집어 든 헌터도 주문을 영창하는 마법사까지 모두. 두 번째 조우임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Arde în abis și transformă-te într-o suliță neagră―!"
딱 한 명의 용인을 제외하고서. 질병을 꿰뚫었던 나선의 창이 최단 거리로 날아간다. 겁화를 모방한 듯한 검은 창은 정확히 레비아탄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대마법의 변형. 그 광오한 힘을 한 점에 모은 형태. 질병의 바위가죽조차 꿰뚫었던 나선의 흑창에는 레비아탄의 용린을 꿰뚫을 충분한 힘이 있었다.
"돼, 됐…!"
레비아탄이 잠자코 있었더라면. 두 주먹을 불끈 쥔 이은하는 눈을 부릅떴다. 바다가 일어나 벽이 돼 나선 창을 막았으니까.
그 전부를 꿰뚫고 용린에 닿기 직전, 홍유리의 대마법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
말을 잃은 좌중. 그렇게 배가 전복하기 직전, 홍유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걸 막아서듯 나타난 늑대가 레비아탄을 물어뜯었으니까. 이전과는 달리 온전한 본신을 드러낸 채로.
증기가 끓는 듯한 피처럼 붉은 몸―― 어째서?
"아, 알파!"
출렁이는 파도에 밀려 뱃머리가 돌아갔고 그렇게 붉은 마랑에게서 멀어져갔다.
***
전신이 불길에 달구어지듯 뜨겁게 달아오른다.
정신체에 오르며 육신의 영역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그게 육체가 사라지거나 없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주체가 육신에서 정신으로 옮겨갔을 뿐. 의존도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그것만으로 몸을 줄이고 늘이는 등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거기까지.
애당초 육신 없이 정신은 있을 수 없다. 그릇이 사라진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정신마저 희미해져 사라질 뿐. 육신과 정신은 동일하지 않으나 별개가 아니다. 단지 하나 되어 존재를 이루니까.
그리고 이 힘은 육신과 정신 양면에 작용하고 있다.
안쪽과 바깥쪽에서 열이 가해져 피가 끓어오르고 감정이 격해져 간다. 아무리 오랫동안 수행한 현자라 한들 이런 격류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할 터. A등급 스킬의 부작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그걸 늑대는 온전히 컨트롤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고행 끝에서 억누른 본능. 모든 욕구를 이겨냈는데 새삼스레 감정의 격류 따위에 집어 삼켜질 리 없으니까. 제아무리 A등급 스킬의 부작용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붉게 변한 늑대는 탄력을 이용해 레비아탄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바닷속으로 머리를 처박는 레비아탄.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는 난폭하게 비늘을 물어뜯고 갉아먹었다.
놈에게 체력의 한계가 오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잠식을 가지고 있는 한, 이 광활한 바다에서 먹어치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체력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
놈이 가지고 있는 재생은 B등급. 그 속도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파헤친 비늘 속에 드러난 속살에 늑대는 머리를 처박았다. 몸부림친 레비아탄은 한껏 소리쳤고 수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한없이 넓게 퍼졌다.
"―――!"
청각을 차단한 늑대는 바닷속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달라붙었다. 해신의 힘으로 자신을 떨쳐내려 해도 끈질기게.
피가 끓고 근육이 찢어지는 와중에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육신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쥐어짜내 끌어내는 듯하다. 광기에 물들지 않은 채 폭주해 그 힘을 온전히 컨트롤하면서.
그래도 상관없다. 아니, 바라는 바였다.
재생으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어치웠다. 이대로 근육과 뼈를 넘어 커다란 몸 속에 들어가서 놈을 끝장낼 생각이었으니까.
그걸 알고 있기에 레비아탄도 가만있지 않았다. 기다란 꼬리를 가져와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다. 물살을 헤치는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꼬리에 늑대는 황급히 떨어졌다.
단 한 번의 공격이 치명상. 186만 톤에 이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건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역부족이니까.
놈을 따라 다시 심해 밑바닥까지 내려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바닥 아래에서 레비아탄의 시선이 자신에게 온전히 향하자 늑대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는 성공. 배는 멀리 떠나가고 있을 테고, 처음으로 상처 입었을 놈은 이제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바다뱀의 눈동자가 향했을 때, 물살이 요동치며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갈라지는 게 아니다.
여태 놈이 사용하지 않았던 용운(龍沄).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