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106 개화
몸이 무리하는 만큼 정신은 다듬어진다.
얼마나 있을까.
갈고 닦고 깎아내서 신경을 가다듬어 너무나도 얇게 이어진 선이 아슬아슬하게 끊어지기 직전,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늑대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다. 늘 그래왔던 아무렇지 않은 일. 그러지 않으면 사선은 넘을 수 없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겨우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집중하고 몰두해 가라앉은 의식이 무의식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덜컹- 덜컹―
뇌리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미지가 떠오른 순간, 마지막 편린을 찾아 여태껏 도달하지 못하고 있던 영역으로 도약했다.
[뛰어난 간파(D)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뛰어난 간파(D) Lv.9 → 뛰어난 간파(D) Lv.10]
[뛰어난 간파(D)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뛰어난 간파(D) Lv.10 → 예지(C)]
그것은 예지의 영역. 직감과 함께 늘 가까운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던 힘은 정말 예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스퀘어에서 만상의 주인을 처음 보았을 때 초감각을 얻으면서 알게 됐으니까. 원래는 하나였던 힘이 셋으로 나누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혜견(C), 초감각(C), 예지(C)가…]
그리하여 마침내 세 가지 스킬을 가지게 된 순간,
[심안(B)으로 변합니다!]
레비아탄이 끌어올린 바닷물이 흩어져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마랑과 바다의 재앙이 부딪힌 결과로 인해서.
***
"저건…"
강태준의 눈이 해안 근처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오던 구축함. 달리 검성이라 불리는 그의 눈이 몬스터의 시체를 밟고 지평선 너머의 그들을 바라보았다.
"……배, 배 맞습니까?"
조종사가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배라는 건 책이나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는 사장된 교통수단이었으니까.
그걸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이 그린란드까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바닷속에 도사리고 있을 온갖 몬스터를 지나치면서 말이다.
"가야겠습니다."
"진심입니까? 저리로 가자고요?"
"예."
강태준은 검을 집어넣었다. 주변의 몬스터는 전부 정리한 뒤. 강한 몬스터는 가능한 한 피하고 약한 몬스터 위주로 처리한 거였지만 그 수가 수였는지라 근육이 삐걱거린다.
그는 동생인 강태호처럼 무식한 힘은 물려받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어깨를 주무르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끝도 없는 몬스터를 언제까지고 상대할 순 없다. 이 그린란드에서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 전에 구축함을 타고 온 이들과 합류해야 한다. 그래야 부담이 줄어들 테니까.
어차피 바다의 재앙이 있는 한 배로 돌아갈 순 없다. 정박이 아닌 충돌한 모습을 보면 정작 그 구축함의 상태도 엉망인 모양이었지만.
그들이 온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시점에서 아웃이다. 알파를 제외하고선 누구도 와선 안 됐다.
강태준은 머리를 흔들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비늘 가루를 확인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와 사고가 난 것.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잠깐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가 안광을 번뜩였다.
"따라오시죠. 뚫고 갈 테니."
아직 우글우글 널린 몬스터의 무리를 노려보면서.
***
충돌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다. 문명이 이어져 온 이래 몬스터가 출몰하며 다시금 정립된 상식의 선을 우습게 우습게 쳐부쉈으니까. 운석이라도 떨어졌다면 모를까, 생물이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게 실현되고 말았다.
"――――――!!!"
마랑과 재앙의 포효가 겹친다. 직전까지 다물린 입은 여전히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마침내 부딪힌 순간, 구름이 걷히고 떨어지던 바닷물로 떨어진 비가 모두 몇 킬로미터는 떨어져 나갔다. 당연한 결과로 대기마저 밀려나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진동 속에서 늑대는 레비아탄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가볍게 착지한 게 아니다.
다리뼈는 가루가 됐고 늑골은 부서지고 척추는 끊어졌다. 안에서부터 터져나간 혈관에 산소를 운반하던 피가 멋대로 빠져나가며 내출혈을 일으켰다. 이마저도 경화로 피해를 줄이고 탄력으로 최소화한 것.
상태는 최악. 하지만 그걸로 됐다. 숨이 붙어있다면 충분하다. 심안으로 살핀 최고의 가능성이 이것이었으니까.
이 이상은 없다. 즉, 예상대로라는 뜻.
발아래는 부서지고 깨진 비늘로 덮여있다. 그래. 그걸로 충분하다. 어차피 부서진 몸은 곧 재생할 테니까.
충돌의 충격으로 밀려났던 대기가 다시 차오른다. 그 뒤를 따라 긴장이 엄습한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한번 뛰어오른 건 반드시 떨어지게 돼 있으니까. 심해 깊숙이 떨어질 거다. 수중에 충돌하는 충격은 분명 지금 것보다 더 심하리라. 하물며 소용돌이를 꼬리 끝에 달고 있음에야.
한껏 모아두었던 겁화의 불길을 거침없이 내뿜었다.
모든 것을 태우는 힘인 겁화. 해신과 용운이 더해져 무지막지한 소용돌이의 철퇴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아니,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해신과 용운이 더해졌다는 건 그만큼 놈에게 여력이 없다는 뜻. 지금 이 순간, 놈은 무방비하다. 부서진 비늘 사이를 파고든 검은 불길은 레비아탄의 머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고속재생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화력. 그만한 겁화를 삼키고 있었다. 아까 한 차례 뿜었던 겁화는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레비아탄의 용린과 살점, 용혈을 불태워간다. 고통에 겨워 허공에서 이리저리 몸부림치지만 늑대는 가루가 된 다리로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잘 보면 얇은 촉수가 늑대의 가죽을 뚫고 신경계를 건드리고 뼈를 보강해 엉망이 된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고 있었다.
처참하고 덧없다. 하지만 이리될 걸 예상했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슬슬 수면이 가까워져 온다.
부딪치기 직전, 촉수로 다리를 움직인 늑대는 높게 뛰어올랐고 허공에 만든 커다란 발판으로 자신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검은 불길에 타오른 레비아탄은 그렇게 추락했다.
"……."
용운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처박혀 가라앉은 재앙. 이걸로 끝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겁화는 충분한 위력이었지만 조금 부족했으니까.
두개골은 부쉈더라도 뇌는 불태우지 못했다. 고속재생이 있는 이상 시간이 지나면 결국 회복할 거다.
지금 당장 놈을 뒤따라 물어뜯고 끝을 보는 게 정답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놈보다 상태가 심각한 건 자신이었다.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터.
어느새 광폭화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촉수로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늑대는 바다 아래를 노려보았다.
다음번 싸움은 더 수월할 거다. 물러나면 다음번에는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분명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 장소도 상태도 상황도 불리하다. 다음을 기약하는 게 옳다는 걸 알면서도 늑대는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까.
만상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진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여왕이 언제 끝을 맞이할지 알 수 없으니까.
기꺼이 놈이 있을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
"쯧…"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끝이 없다. 도대체 얼마나 있는 건지. 네버랜드의 2구획을 연상케 하는 모습. 심지어 그 몬스터들도 절대 약하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버려진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몬스터가 약할 리 없으니까.
"Distort!"
공간 왜곡. 일그러진 공간이 몬스터를 옥죈다. 펼친 손목을 쥔 이은하는 주먹을 닫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생각보다 더 저항이 거셌다.
결국 왜곡을 깨부순 몬스터가 달려들자 이은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명의 옥상, 알파가 능력을 선보인 그때 공허의 편린을 보며 깨달은 안목이 미약하게나마 전투를 보조한다.
그래봤자 몬스터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순 없다. 시간이, 거리가 필요하다. 급한 대로 마력을 쥐어 짜낸 이은하는 언젠가 보았던 아름다운 창무(槍舞)를 떠올렸다.
손에 감기는 그립감. 마력으로 형상을 이룬 창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순간, 이은하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궤적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갑작스레 나타난 무기에 당황한 몬스터― 얼음으로 빚은 짐승의 형상, 글래셔 비스트는 크게 물러났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은 이은하는 계속해 놈을 몰아붙였고,
"……!"
순식간에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등에 닿는 차디찬 감촉이 정신 차리라고 하는 듯하다.
일전에 홍유리는 말했었다. 자신에게 재능은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력에 한해서였지 육체적 소양은 아니다.
늘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몸치, 몸치라고.
"……!"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갑갑함. 창대를 씹어먹으며 짐승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 어떻게든 죽이고 말겠다는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뭐해?! 이 멍청한 년이!"
그 순간, 불꽃의 탄환이 쏘아졌고 그걸 피하기 위해 글래셔 비스트가 풀쩍 뛰어올랐다.
"안 해본 짓거리를 왜 해!"
할 줄 아는 거나 하라고 일갈하는 목소리가 현실을 깨우쳐준다. 그래. 지금 하는 건 장난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 근데 해본 적 없는 일을 자신도 없는 주제에 따라 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이은하는 결국 창을 버리듯 던졌다.
"―――!"
한기가 느껴지는 울음소리.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잠깐 떨어졌던 이은하는 옆으로 구르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솟아난 가시가 밑에서부터 놈을 꿰뚫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이 생겼다. 저걸로 죽은 건 아니지만 어떻게 움직임을 막는 건 성공한 모양.
"……?"
그러다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영창했나? 행동만으로 마력이 움직였다. 단순히 마력을 다루는 게 아니라 구현한 거였는데……?
가시에 꿰뚫린 괴물이 다시 꿈틀거리자 이은하는 주먹을 쥐었다. 순간, 머릿속에 어떤 규칙 없는 제멋대로인 문자열이 떠오른 듯했다.
멍하니 손바닥을 보던 이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자신이 뱉었던 주문의 말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더 확실히 떠올리게끔 생각하던 것뿐이라고. 마법과는 달리 그걸 응용한 제멋대로인 방식, 자기류.
체계적이지 않고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사실 주문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거다.
"……아."
움직이지 못하는 괴물을 보고 이은하는 실소했다.
정말 별거 아닌 깨달음인데… 그걸로 완전히 달라졌다.
0-0
머릿속에 흐르는 문자열을 다시 이어붙였다. 거기에 의미는 없다. 다만, 여태까지와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 위에 커다란 말뚝이 떠오른다. 머릿속의 안개가 개고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느껴지는 해방감. 정말 바보같이 스스로 묶고 제약하고 있었다. 마치 사슬에 칭칭 둘러메져 감싸인 것 같은 답답함이 사라졌다.
구현의 주체가 영창에서 생각으로 변한 것. 고작 그것뿐인데 아까까지 고전하던 게 거짓말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완전히 달라졌다.
숨을 들이켠 이은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손을 털듯 가볍게 휘저은 순간, 말뚝은 그 의지에 따라 당연하다는 듯 글래셔 비스트를 꿰뚫었다.
고작 그것뿐―― 그 별것 아닌 행위가 개화에 이르러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수준 높은 헌터들로 구성된 각국의 수색대는 그렇게 몬스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