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107 밑져야 본전
고작 하나의 차이가 전황을 뒤바꿔놓았다. 여태까지 누르고 있던 재능이 별것 아닌 계기로 개화해 꽃을 피워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나간다.
영창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구현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번에 하나씩 가능했던 마법이 수도 없이 이어진다.
수도꼭지 하나에서 틀어지던 물이 여러 개로 늘어나고 하물며 구현의 속도도 빨라진다.
손을 휘저음에 따라 가시, 말뚝, 왜곡이 제멋대로 흩날린다.
그 하나하나가 마력으로 구현한 현실. 아무도 이끌어주지 못해 스스로 나아가야 하는 영역을 개척하자 비로소 세상이 달라졌다.
상식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비상식의 영역으로.
"―――!"
울부짖는 괴물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쓰러진다. 위력이 부족하다면 더 많이. 맞지 않아도 더 많이.
아직 컨트롤은 미숙했지만 그게 의미 없을 만큼 몰아붙이자 기세를 잃은 무리가 차츰 발을 빼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은 헌터들은 놈을 몰아내고선,
"기다려요."
추적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당연한 일. 괜히 추적했다가 더 깊은 곳의 몬스터를 불러모으면 골치 아파지니까. 힘을 아끼고 교전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일단락된 상황에서 이은하는 자신을 향하는 묘한 시선들을 느꼈으나,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붕붕- 흔들다가 핑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족쇄를 벗어던진 구현. 다만, 올바른 길을 찾은 발상의 전환이었지 마력량이 늘어난 건 아니기에 정신 고갈이 빨리 찾아오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틀비틀, 시야가 빙그르르 돈다. 사람들 얼굴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 옆으로 갸우뚱 쓰러지다가.
"뭐 해?"
한심하다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축해주었다.
"하여간에 지 혼자 춤을 추네. 신나서 주체도 못 하고 잘하는 짓이다. 등신. 첨부터 창질만 안 했어도 당하지도 않았을 거를."
언제나처럼 자신을 혼내는 말. 그러나 이은하는 혀를 끌끌 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눈을 빛냈다.
"뭐, 왜?"
퉁명스러운 말에도 굴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무언의 압박에 홍유리는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휴. 잘했어. 잘했다고. 근데 담부턴 적당히 해."
혼미한 와중에도 칭찬만큼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헤헤 웃더니 기대어 쓰러진다.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에…"
이 얼빠진 년.
그녀가 만든 틀을 닦은 건 자신. 마력을 주문과 영창과는 상관없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사용하는 모습에 기가 질렸을 정도다. 그런 게 가능한 이는 달리 없었으니까. 아니, 가능은 해도 그렇게 정교하지는 않다. 그건 자신이라한들 마찬가지.
그래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냥 마법을 가르쳐도 됐겠지만, 그 독자적인 길을 버리기 아까워 확신 없는 길을 걷게 했다. 어쩌면 욕심에 실패로 끝났을지도 모르지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알 수 있었다. 이은하가 가진 재능은 생각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고.
마력을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힘. 그 방향성은 환영의 나비의 마법과 실로 닮아있었다. 온갖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게 그녀의 힘이었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더 간편하다는 것.
마력을 환상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구현하는 환영의 나비의 방식과는 달리 환상이라는 과정이 없었으니까.
"……."
홍유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기준과 하연을 비롯해 가르친 이는 많다. 하지만 이번엔 다소 감회가 새롭다. 이 얼빠진 년이 이젠 사람구실 하게 됐으니까.
개화한 재능은 닫지 못하던 영역을 넘어 단숨에 A클래스 헌터 이상의 수준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문제가 있다면 딸리는 마력량인데… 그건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여명의 헌터가 쓰러진 빈자리는 결국 다른 이들이 채우게 된다. 좌중의 묘한 시선이 기절한 이은하에게 모이는 걸 보고 가리듯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
"……?"
아주 잠깐 느껴진 묘한 기시감. 늑대는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육지에 정박했으니 구축함에 타고 있던 이들이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몬스터가 있기는 해도 수색대의 수준이 더 높을 테니까. 겨울의 주인과 홍유리까지 있음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강태준과 합류하고 어련히 잘 살아남으리라.
왜 온 건지는 솔직히 잘 이해 가지 않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었으리라. 그들의 일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일단 할 일부터 해야 한다.
바다의 재앙과 결판을 짓는 일 말이다.
상처를 추스르고 있는 레비아탄의 모습을 보고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멀지 않았다. 놈의 상처는 절대 얕지 않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쓰러진 적 없던 재앙을 쓰러뜨릴 수 있다.
멸망의 끝을 볼 수 있다.
놈을 쓰러뜨리고 먹어 치워 발판으로 삼고 성장을 이뤄 흑린과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어떻게든 종말을 막아낸다.
막연한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게 가장 정답에 가까울 터.
그래. 그러기 위해선…
칼날 같은 수류가 몰아친다. 바닷속은 놈의 영역. 그 안에 들어와 놓고서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어설픈 바람을 가지진 않았다.
"……!"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물어간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놈 또한 마찬가지. 경계하는 눈동자가 예의주시해 보고 있다.
분명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순순히 물러난다면 더 싸울 생각은 없다고. 보내주겠다고 말이다.
그게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알았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바다에 몸을 담그지도 않았으리라.
심해 바닥에 웅크린 놈이 꿈틀거린다. 해신의 힘으로 물살이 짓쳐들어오자 그걸 피해냈다.
그건 통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이지도 않고 닿기 전에는 느낄 수도 없는 물의 흐름. 느껴진 순간에는 이미 늦고 만다.
그런데 피했다. 그건 미래를 엿보는 예지의 영역에 닿았기에. 직감과 간파와는 달리 무수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거의 확실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100% 일치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가깝다. 오히려 여태까지보다 사용하기 쉬웠다. 미리 본 만큼 느낄 수 없어도 피하지 못할 리 없다.
수압은 견뎌야 했지만 수류의 칼날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
한없이 넓게 커져가는 용운을 보고 늑대는 다시 수면 위로 뛰쳐나왔다. 발아래 난폭한 기세로 회전하는 소용돌이. 부상으로 광폭화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놈이 저렇게 수비적인 태세로 일관한다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맞서주지 않으면 불리하다.
곧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고 소용돌이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가면 다시 용운이 몰아치리라.
"……."
싸움은 팽팽했다. 아니,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자신이 조금 더 불리한 게 사실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은데 접근할 방법도 막혔다.
주도권은 분명 놈이 가지고 있다. 상처를 전부 추수르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으리라. 여기까지 몰아붙였는데 정말 포기해야 하는가 생각하던 늑대는 문득 비늘 가루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고 있는 게 분명한 놈이 그렇게 멍청하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정말 놈에게 중요한 거라면. 어떻게든 육지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쓰러뜨릴 수 있다.
……시험해 볼 가치는 있다.
***
수색대는 얼마 가지 않아 강태준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 먼저 찾아왔기에 그런 거였지만.
"구조 요청은 했습니까?"
"그게… 하기는 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러시아의 수색대장. 강태준은 잠깐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잠깐 몰아치던 소용돌이가 다시 잠잠해져 있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위성 전화로 신호는 보냈어요. 근데 제대로 발신된 건지는 확인이 안 되네요. 아까 배가 흔들렸을 때 뭐가 잘못된 것 같아서."
그 말을 곱씹던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수리할 순 있습니까?"
"무리에요."
구조 요청은 보냈는데 과연 저들이 수신했는지는 불분명하다는 것. 잠깐 충돌한 구축함을 바라보았지만, 미친 게 아니라면 저걸 타고 탈출하자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식량과 식수는 미리 꺼내놨지만 길어야 일주일이리라.
"일단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상황을 정리하고 강태준은 그들에게 간단한 감사와 사과를 표했다. 따지고 보면 오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이었지만, 자신이 그걸 지적할 순 없었으니까. 본래 얼굴을 익히기 위해 왔던 몇몇 이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데 반해서 모두가 이성적이지는 못했다.
"씨발…"
상대가 상대인지라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게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 강요한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심정이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뭐라고 해줄 필요는 없지만. 강태준은 클랜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단둘이서 여기까지 온 이들. 홍유리와 아마 이은하였던가. 눈을 감고 쓰러진 모습을 빤히 보자 정신 고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고했다."
"괜찮습니다. 다친 곳은 있으십니까?"
"아니. 이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면 되겠군. 그리고…"
조종사를 잠깐 보던 강태준의 귓가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땐, 다시 소리가 잦아들었다.
"저것들이 진짜."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홍유리는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강태준이 만류하자 답답한 속을 두드렸다. 왜 참으라고 하는 건지는 알지만 그래도 답답해서. 물도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집어먹은 기분이었다.
아니 시발,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을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꾸역꾸역 와놓고 누굴 탓해? 맘 같아선 아주 쥐어박아 버렸을 텐데.
차라리 저 수색대장처럼 아가리나 꾹 다물고 있음 말이나 안 하지. 화를 삭이던 홍유리는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하, 그래. 이제 정신 좀 차리셨나?
아니, 아니었다. 침묵의 저변에 깔린 이유는 좀 더 다른 종류의 것이었으니.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그게 그림자라는 걸 깨달은 홍유리는.
"오지 말라고 했지 않나."
늘 들어왔던 낮은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려오자 눈썹을 들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거기에 커다란 늑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파…"
그것도 상처투성이. 여기저기가 찢기고 난자된 데다가 검은 털에 진득한 피가 들러붙어 있다. 재생한다는 건 알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물며 자신들이 괜히 와서 무리시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괜찮나?"
그런데도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것에 목이 메었다. 그렇다고 답하고 싶은데…… 원래라면 입지 않았을 상처들이 자신 때문인 것처럼 느껴져서. 역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더 확실히 말렸어야 했다.
"……응."
발목만 잡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와 목을 무겁게 했다. 그 무게에 짓눌려 고개 숙였을 때, 그럼 됐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한숨이 나왔다.
시발, 이런 성격 아닌데…
"돌아갈 수 있나?"
그 말에 홍유리는 잠깐 수색대장을 쳐다보았다. 알파의 시선도 함께 따라오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그 당당하던 싸가지는 어디 가고 후들후들 다릴 떨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무섭나?
하기야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니, 조금만 솔직해지자면 이제 티는 안 내지만 밤중에 붉은 눈을 보면 아직도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긴 하다. 괜스레 조금, 아주 조금은 마려워질 만큼… 헛기침한 홍유리는 기운을 되찾고 아직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겼어?"
"숨어버렸다."
그 말에 누군가의 탄성이 들렸다. 여기 있는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그 재앙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것. 저 커다란 구축함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만한 괴물의 모습을 말이다.
대마법에도 꿈쩍하지 않은 괴물이 마랑을 피해 숨어들었다…… 세베로모르스크에서 봤던 강아지와 지금의 마랑이 정말로 동일한 존재. 그제야 자색의 흑호를 쓰러뜨린 전대미문의 괴물이란 걸 깨닫게 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어딘가 아득해진다. 마치 같은 생명체가 아니라 동떨어진, 격이 다른 느낌을 받고 말아서.
그나마 보고 있을 수 있는 건 그들이 수준 높은 헌터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들, 선장과 선원은…
"……."
부자연스레 정신을 잃은 그들을 보고서 늑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옆머리를 긁었다.
그래도 어차피 금세 깨어날 터. 강태준에게 비늘 가루를 건네받은 늑대는 놈이 웅크리고 있을 바다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올 리가 없다. 올 리가 없지만…… 먼 바다에서부터 왔을만큼 놈에겐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바,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