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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56화 (256/407)

〈 256화 〉 #108 멸망의 끝

"가지 않는 건가?"

그 물음에 만상의 주인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마침 환계에서 흘러나온 마력을 대부분 받아들여 써버린 마력은 회복했지만, 여왕과 싸운 여파가 아직 남아 있다.

육신의 상처는 다 회복했지만, 영혼에 새겨진 상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몸으로 검은 도깨비불과 싸울 순 없다.

원래라면 쉽게 끝났을 텐데…… 속았으니까. 모조 엘릭서를 그렇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확신이 생겼다.

희망에게는 가치가 있다고. 미약하게나마 이어진 뒷길을 끊어놓지 않을 가치가.

그러니, 막지 않으려 한다.

희망은 보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다음이 될 자격이 있다.

재앙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정말 운이 좋다면 어쩌면……

"그럼 내가 막도록 하지."

강훈은 품속에서 푸른 가루를 꺼냈다. 다른 것도 필요 없이 이 가루를 뿌리기만 해도 바다의 재앙은 찾아오리라. 마랑을 쓰러뜨릴 필요 없이 그 싸움을 성립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먼 곳으로 바다의 재앙을 부르기만 해도 끝이라는 거다.

거기에 소녀는 키득거렸다.

"늦었어."

"……?"

"저쪽이 먼저라는 거야."

소녀가 가볍게 손을 저었을 때, 마치 거울처럼 차원이 일그러지더니 어딘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건 명백한 마랑의 모습. 본신을 드러낸 그 모습에 강훈은 침음했다. 네버랜드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지만 감히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의 마랑이라면 역병 정도는 어렵잖게 물어뜯어 죽일 수 있을 터. 그건 또 하나의 재앙과도 다름없다. 그리고 그 앞, 바다가 요동치고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건 분명 바다의 재앙이었다. 곳곳이 상처 입고 다쳤지만, 냄새에 이끌려 다가오고 있다. 거기에 강훈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비늘 가루에 집착하는 것인가. 그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하나밖에 없으리라. 강훈은 만상의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답을 구하는 시선에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글쎄…"

분명 답을 알고 있을 유일한 이는 답하는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멸망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해?"

"네가 말했지 않나. 종말의 일부라고."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올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일부. 여러 세계에서 이것저것 가져온 카피. 죽여도 죽여도 다시 만들어지는 가짜들."

"……."

"그럼 그 가짜는 어디까지 진짜일까?"

뜬금없는 물음에 강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를 들어 감정은?"

아니면 자신 이전의 카피를 자신이라 알아챌 지성은 남아있을까. 소녀는 그렇게 물었다.

***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레비아탄은 몸을 꿈틀거렸다.

또, 또다.

자신과 무척이나 흡사한 냄새. 분명 동족의 냄새였다. 하지만 이게 함정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 마랑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리라.

두 번이나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어리석지 않지만…

"……."

그럼에도 레비아탄은 웅크린 몸을 일으켰다. 그만큼 그리운 유혹이었으니까.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당할 만큼 강렬하게 달콤한.

십중팔구 가면 죽는다. 그걸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다.

그건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감정이었으니까. 누구를 찾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레비아탄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쫓았다.

그게 설사 전부 잊어버린, 몇 번째 카피인지 모를 자신이 가지기엔 과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파도가 올라오더니 푸른 안개가 바다를 덮는다. 놈이 온다는 걸 알 수 있는 징조로 파도는 해일로 변하고 있다. 여기까지 순식간에 도착해 그 거체를 드러낼 터.

다소 떨어진 곳에서 군중을 바라보던 늑대는 가만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늘 가루를 떨어뜨린 곳은 다소 떨어진 여기였으니 쉽게 피해가 가진 않으리라.

마지막이다. 뭍으로 끌어낸 만큼 승기는 자신에게 기울어있다.

"……왔다."

해일이 지상에 닿았을 때, 늑대는 기꺼이 그 물살을 받아 견뎠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재앙이 자신을 보고선 격노에 차 울부짖었다.

여태까지보다 더한 분노를 터뜨리며 거대한 턱을 바닥에 박아넣더니 얼음으로 덮인 대지를 통째로 씹어 삼켰다. 그 행동으로 그린란드의 일부가 사라졌다. 지도상에 표시된 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지도를 바꾸는 괴물. 원래라면 가능할 리가 없지만, 잠식을 가진 괴물은 기꺼이 대지를 삼켰다.

"……."

그 눈동자가 괴이한 빛으로 물들어있다.

마지막 남은 재앙. 놈을 죽이면 종말은 성큼 다가오게 되리란 걸 알면서도 늑대는 기꺼이 나아갔다.

바닥에 주둥이를 처박고 있는 놈의 기다란 몸통을 서슴없이 올라탄 순간, 강한 경계와 함께 비늘이 가시처럼 돋아올랐고 그사이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늑대의 걸음을 막았다.

바다, 부딪혀 깨진 해일, 몸에 묻은 물기.

그 하나하나가 레비아탄의 지배 아래에 있다. 가장 뾰족한 송곳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해수 하나하나에 살기가 담겨 있다.

무슨 생각으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지 알 수 없는 괴물은 이빨 사이로 흘러내린 땅 부스러기를 토해내고 격정에 몸을 흔들었다.

곧바로 바닷속으로 잠수할 생각. 당연하다. 육지로 끌어낼 수는 있었어도 굳이 여기서 싸워줄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심해 깊은 곳에 있는 것과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여기선 수류가 닥쳐오고 수압이 짓누르지 않으니까.

시간이 없다 여긴 늑대의 몸이 붉게 물들어갔다.

상처가 전부 재생하진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끌어내야만 한다. 촉수가 낫지 않은 뼈와 근육을 꿰뚫어 그 역할을 대신하며 피가 증발한 붉은 증기가 끓어오른다.

어차피 체력의 한계는 오지 않는다. 놈을 부르기 전에 수색대가 쓰러뜨렸던 몬스터를 먹어 치웠기에. 그건 피차일반일 터.

마력을 고갈시킨다던가 지쳐 쓰러지게 한다던가. 그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가능한 거라고는 물어뜯고 죽이는 것뿐이다.

"……!"

늑대의 이빨이 개전을 알렸다. 발톱은 비늘을 파헤치고 송곳니로는 가릴 것 없이 씹어먹는다. 철퇴보다 더 커다란 꼬리가 레비아탄 자신을 후려친 순간, 잠깐 뛰어오른 늑대는 다시 발판을 만들어 기민한 움직임으로 거체 위에 다시 내려서려 했다.

그걸 바닷물이 막아섰다.

어느샌가 이곳저곳에 만연한 물줄기가 얇은 막을 이뤄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멈칫거린 순간, 고개 돌린 레비아탄의 입에서 마력이 솟구치며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아두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 정확히 자신을 노려오는 광범위한 공격에 늑대는 입을 벌렸고,

"―――!"

모아둔 겁화를 뿜어냈다.

푸른 숨결과 검은 불길이 팽팽하게 맞부딪친다. 적어도 늑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뿜어진 얼음의 숨결을 겨울의 주인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평생을 익힌 마법보다 아득히 강한 레비아탄의 브레스. 그걸 보고 있자면 여태 익힌 마법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대마법이 놈을 막지 못한 건 당연하다. 놈이 마력을 모은 숨결에마저 미치지 못하는 게 자신의 한계였으니.

결국 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는 거다.

"……."

앳저녁에 잊어버린 감정을 느끼며 새삼스레 감탄한 겨울의 주인은 달뜬 숨을 뱉었다.

이윽고, 마지막 발악처럼 브레스에 맞서 검은 불길을 뿜어냈으나 혹한의 숨결에 뒤덮어지고 만다.

마랑은 열심히 싸웠다. 단지 닿지 않았을 뿐. 그 위용에 짓눌려 말하지 못했지만 역시 말렸어야 했다. 일행을 향해 돌아선 겨울의 주인은 상황에 순응하며 말했다.

"더 깊숙이 들어가죠. 여기 있다간…?"

그러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그녀의 무표정이 처참하게 깨져나갔다.

처참하게 쓰러졌을 거란 예상과 달리 검은 불길이 재앙의 숨결을 녹여버렸으니까.

***

정면에서 겁화는 브레스를 웃돌았다.

설령 생물종 정점에 위치한 용의 숨결이라 한들 A등급 스킬의 겁화에는 미치지 못한다. 비록 그 양이 적어 브레스에 뒤덮인 듯 보였더라도 안에서부터 녹여 증발시킨 불길이 나아가야 할 길을 뚫어놓았다.

불길이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린 늑대가 도달한 곳에 레비아탄은 아직 입을 벌린 채 그대로였다.

처음부터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다. 브레스는 깨부쉈다. 남은 마력의 잔량이라고 해봐야 얼마 남지 않았을 터.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달리는 늑대의 앞에 점점 입구가 좁아지고 있었다. ――놈은 멍청하지 않다. 분명한 지성을 가지고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처음 시도했을 때조차 당하지 않았던 걸 새삼 당해줄 리 만무하다. 서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말인즉, 늑대 또한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는 말이다.

내부로 침투하는 대신, 늑대는 놈의 급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비아탄은 분명 많고 뛰어난 스킬을 가졌지만 시각은 가지지 못했다. 즉, 눈을 망가뜨리면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싸움에서 시각이 가지는 메리트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붉게 물든 늑대의 발톱이 순식간에 수정체를 찢어발기고 피와 물이 섞인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몸부림치는 레비아탄은 황급히 남은 눈이라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눈꺼풀조차 없는 뱀에게는 불가능한 일. 결국 두 눈을 빼앗기고 빛을 잃어버린 레비아탄의 발악.

"……!"

늑대는 어느새 자신이 깊디깊은 심해에 있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빼앗길 걸 미리 알아차린 레비아탄이 물불 가리지 않고 심해 밑바닥까지 머리를 들이민 것이다.

빛을 잃어도 괜찮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재생할 테니까. 그저 이 싸움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늑대는 흐려져가는 의식의 끈을 억지로나마 붙잡았다.

무지막지한 무게가 자신을 짓누른다. 척추가 이쑤시개처럼 부러진 지금 아무리 안간힘을 써봐야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기다란 혀가 바닥에 짓눌린 자신을 감싸고 단번에 휘감는다. 매끈한 혓바닥에 묻은 침이 상처 곳곳을 파고든다.

또다시 광폭화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 만큼 깊은 상처가 새겨진다. 해신의 힘으로 뒷다리가 잘려 나가고 용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벗어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거기서 포기하고 말았다.

혀가 조여드는 압력이 심상치 않다. 당장에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늑대는 자신의 전신을 포기했다.

목 아래를 직접 잘라내 가까스로 혓바닥에서 벗어난 늑대를 뒤쫓아 해신의 힘으로 바닷물이 칼날이 되어 짓쳐들어온 순간, 촉수를 뻗었고.

"――――――!"

끔찍한 비명이 늑대의 고막을 터뜨렸다. 눈을 잃으면서까지 벌리지 않던 입을 한껏 열어젖히고 고통을 호소한다.

자신의 눈구멍으로 파고들어 온 이물질―― 그래. 꼭 입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촉수를 마치 새총처럼 이용해 머리만 남은 자신을 쏘아낸 늑대는 으깨진 수정체 안으로 쏘아지면서 변이로 대신할 육신을 만들어냈다.

놈과 자신의 피 냄새가 심해 밑바닥에서 엉망진창으로 섞인다. 오히려 코를 찌르는 혈향이 싸움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런 와중에 레비아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를 들었다. 안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포효가 누구의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변이로 몸을 만든 늑대는 전력으로 달렸다.

해신의 힘으로 뚫린 눈구멍에 바닷물이 차고 올라와 자신을 뒤쫓는다. 바람을 두르고서 촉수를 뻗으며 마침내 뇌에 도달한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던 레비아탄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어 멎고야 말았다.

마지막 재앙이자 멸망의 끝이 숨을 거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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