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109 종말의 시작
싸움을 끝까지 지켜본 소녀는 달뜬 숨을 내뱉었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과 싸웠을 때도 그렇고 희망은 늘 자신의 예상을 웃돌았다. 자색의 흑호도 원래라면 이기지 못했을 거다. 더 불리했던 질병도. 기어코 바다의 재앙마저 쓰러뜨려 끝을 보았다.
이제 희망에게 시련은 시련이 아니게 된 셈이다. 오히려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야말로 더 크게 타오르며 본의를 발한다.
그를 꺾지 못하는 시련은 오히려 그를 강하게 할 뿐.
그래. 그걸로 됐다. 희미하게 이어진 선을 쫓아 자신의 뒤를 따르리라. 조금 더 성장해 한 번 더 진화를 이룰 수 있다면 정신체를 넘어 초월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빠른 성장. 그게 희망이 가진 무엇보다 큰 무기였으니까.
"이제 그건 필요 없게 됐네."
소녀의 키득거림에 강훈은 비늘 가루를 바닥에 버렸다.
바다의 재앙은 알았을까 혹은 마지막까지 몰랐을까. 저 비늘이 동족이 아닌 끝을 맞은 세계의 또 다른 자신의 것이었단 사실을.
"……."
그러니까, 동족 같은 건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이다.
끝까지 이뤄지지 않을 헛된 희망을 품고 죽었을 레비아탄에게 소녀는 어떤 감상도 품지 않았다. 결국 종말을 죽이지 못하면 몇 번이고 되돌아올 테니까. 질리도록 해봤듯 죽여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거다.
평행 세계의 마지막. 이번에도 실패하면 더는 없다.
자신이 태어난 이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고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
심해 속에서 엉망이 된 몸이 금세 재생해간다. 재생이라기보단 새로 만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터. 뇌와 의식만 끊어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지금의 자신은 불사라고 봐도 좋다.
뭍으로 올라온 늑대는 거세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먼저 쓰러뜨렸다는 소식부터 전해야 할 테니까. 본신을 숨기고 몸을 줄인 늑대는 그네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겼다고?"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 줄지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보았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강대한 괴물인지를. 의심 다음 찾아온 감정은 기쁨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기쁨의 이유는 이제 바다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두려움의 이유는 만약 마랑의 이빨이 인류에게 향했을 때,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이유에서. 그들의 표정에 뻔히 드러난 생각을 읽고 강태준은 실소했다. 그건 과거 자신이 몇 번이나 했던, 홀로 고민하던 생각이니까.
그러나 동시에 멍청한 생각이기도 하다.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재앙을 쓰러뜨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종말이 찾아온다고 했었지.'
여왕이 보여줬던 광경을 떠올린 강태준은 한숨을 참지 못하고 뱉었다. 아무리 알파라고 한들 그런 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종말이 찾아오는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기쁨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다.
이다음을 준비해야만 하니까. 설령 그게 아무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더라도. 머릿속에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한 강태준은 좌중에 두려움 섞인 시선에 쓰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지금의 마랑에게는 검성이라는 이름조차 고작이라는 말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그것만으로 수군거림은 다소 잦아들었다.
쉽게 말해 이름값에 짓눌렸다는 거다.
"……면목 없군."
그 이름값의 값어치를 알고 있었기에 강태준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신이 그렇게 함으로써 일단 잡음을 없앨 생각으로. 거기에 늑대는 상관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돌아갈 방법은?"
늑대의 물음에 강태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냥 기다리는 것밖에 없으니까.
"아니. 신호는 보냈지만 구조가 오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배를 수리하는 것도……"
처음 충돌에 갑판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쉽지 않다. 고개를 주억인 늑대는 그들의 인원을 곁눈질로 체크했다. 전부 합쳐서 154명. 저 커다란 배에 탄 것 치고는 의외로 적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 유라시아 대륙까지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00km 이상은 항해해야 하는 거리. 하물며 몬스터가 만연하는 이 대륙에서 이상을 깨닫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계속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법.
종말에 대비해야 하는 것에 앞서 일단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맨몸으로 대륙을 건널 수 있는 이는 늑대 자신 말고는 없다. 상황을 읽고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맘 같아서는 레비아탄의 사체부터 취하고 싶지만, 일단 이들을 무르만스크까지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다. 헌터들만이라면 모를까 일반인도 있었으니까.
잠깐 먹어치우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무리 자신이라도 며칠은 족히 걸리게 될 거다. 그때마다 번거롭게 심해에서 올라올 수도 없기에 미리 묻는 것.
어디까지나 선택은 그들의 것. 원한다면 육지까지 돌려보내 주는 건 어렵지 않다. 생각해보라고 말한 늑대는 그네들을 놔두고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눈길을 돌렸다.
"야."
비록 기절한 이은하를 떠받치는 건지 백 초크를 걸고 있는지 모호하기는 했지만.
"안 다쳤어?"
혹시 자신이 다치진 않았는가 걱정부터 하는 모습에 늑대는 끄덕였다. 재생은 진작에 전부 끝내고 온 거였으니까.
"……다행이네."
퍽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홍유리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했다. 왜 그런지는 알고 있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불가항력이었다."
"……?"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촉수를 뻗은 늑대는 강태준과 겨울의 주인을 그녀에게만 보이게끔 몰래 가리켰다. 즉, 그녀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더라도 마찬가지. 이 싸움에서 도움이 되진 못했을 거란 소리다. 인류의 손으로 막을 수 없기에 재앙이라 불리우는 것. 새삼스레 기죽을 필요는 없다.
어설픈 위로에 홍유리는 자조했다.
"……그래. 이제 다 끝났으니까."
한심하게도 알파가 모든 재앙을 몰아내는 동안 자신이 도움 된 거라고는 정말 있으나마나한 수준.
물론 아직 몬스터가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탕아들은 사실상 괴멸한 데다가 재앙은 다 몰아냈다―― 이 시점에서 인류의 위기는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생각을 부정하듯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뭐?"
"나중에 얘기해주겠다. 그것보다… 다친 곳은 없나?"
아까 물었던 말이 돌아오자 홍유리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거기에 목이 졸렸는지 이은하가 컥컥거리며 일어나자 마찬가지로 늑대 또한 웃어버렸다.
그리고 마침 수색대가 결정을 내렸다.
***
"오는구나. …그런데."
레드 스퀘어 마스터, 아스터가 침음하자 제자인 도로시는 고개를 어깨에 붙였다.
"……?"
스승의 시선을 따라 바다 너머를 본 도로시는 까치발을 들어 올리고 손날로 햇살을 가렸다. 분명 뭔가가 오고는 있다. 시꺼먼 무언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문득, 봐서는 안 된다는 불길함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건 후계자 자리에 있는 그녀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눈동자에 마력을 담은 순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도로시는,
"아… 아."
갓 태어난 아기사슴처럼 비틀비틀거리더니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쓰러진 소녀로부터 시큼한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
어안이 벙벙한 듯 보이는 이들. 땅을 밟고는 있지만 그게 실감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커다란 배를 타고도 꼬박 이틀 가까이 걸려 도착했는데 고작 몇 시간 만에 세베로모르스크까지 돌아왔으니까. 그 방법이 조금 어이없긴 했지만… 정작 늑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된 거였으니까. 분명 약속은 지켰다.
"돌아갈 생각…"
"괜찮아? 여왕님은."
그 말에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홍유리의 말대로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그럴 시간은 없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레비아탄의 사체를 얼른 먹어치우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왕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아무리 이런 세계라도 죽은 이를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늦을 수는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녀를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의제인 이유가 아니라도 말이다.
돌아보니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목을 부여잡는 몇몇 이들이 보였다. 헌터들은 괜찮았어도 일반인들은 바람에서 보호받았어도 멀미가 심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신경 써줄 순 없었지만.
하기야 154명 대부분을 촉수로 들어 올리고 발판을 밟아 달렸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따금 호기심을 드러내는 몬스터도 있었지만 살기를 발하면 대부분 도망쳤고 느끼지 못한 채 다가오는 것들은 그림자 속에 갇혀 사라졌고.
돌아보면 바쁜 며칠간이었다. 창선을 위시한 고원은 바다의 재앙에게 먹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고 멸망의 끝이자 마지막 재앙인 레비아탄은 쓰러졌다.
이 다음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 건 이 세계에 단둘 뿐이리라.
만상의 주인 그리고 여왕. 아직 그녀에게 물어볼 게 남아 있다.
"……그래. 돌아가자."
자신의 말에 환한 표정으로 변한 홍유리와 이은하가 힘껏 끄덕였다.
***
바로 돌아가기 전,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려야 하는 수순은 어쩔 수 없었다. 홍유리의 무릎 위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던 늑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느 마법사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스터 아리스타 파블로―― 레드 스퀘어의 마스터이자 홍유리의 스승 되는 이였다.
"왜요. 영감."
"…이야기는 들었다. 난리더구나. 그럴 만한 이야기였고."
"그렇게 됐어요."
눈을 끔뻑이던 이은하가 자신에게 누구냐고 귀띔하자 늑대는 자신이 아는 대로 알려주었고 황급히 허리 꺾어 인사했다.
"그래. 네 다른 제자더냐?"
"……비슷해요. 마법은 아니지만."
비슷한 건 뭐냐며 아스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하지 말려무나. 신경 쓰지 않아도 좋으니."
"아, 넵…"
그 말을 끝으로 이은하는 꾹 입을 다물었다. 스승인 홍유리의 스승. 적어도 그녀에겐 까마득한 사람이었으니. 정작 그 제자 되는 사람은 다리를 꼬더니 퉁명스레 물었다.
"왜 왔어요?"
그런데도 인자하게 웃은 아스터는 별안간 표정을 지우더니 늑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딱딱하게 굳은 그 얼굴에 진중함이 드러나 늑대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사 인사와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소."
감사 인사는 그렇다 치고.
"묻고 싶은 것?"
"그렇소."
"……?"
뭔가 도울 일이 남아있나? 갸웃거린 늑대는 일단 말해보라며 끄덕였다.
"원래 그랬지만 이제 그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소."
"……."
"그대가 앞으로 하려는 일. 이제 뭘 하려 하오?"
진중한 그 눈빛에 늑대는 작게 한숨 쉬었다. 물론 그들이 알 리도 없고 자신이 말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착각을 이제는 바로잡을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원래는 여왕이 있는 자리에서 말할 생각인 데다가 그에게까지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이제 시작일 뿐이다. 끝으로 치닫는 시작."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