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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58화 (258/407)

〈 258화 〉 #110 바람

"진심?"

늑대는 대답하는 대신 홍유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부를 의심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냥 머리가 복잡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 게 있다면 우린."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들이 할 일이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저항하든 혹은 순응하든 그 답은 그들이 정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확신 없이 다가올 종말에 맞서는 것뿐이었으니까.

"언제부터 알았는가?"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를 산산이 깨부순 늑대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되지 않았다. 질병을 쓰러뜨릴 때까지만 해도 왜 만상의 주인이 막아서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답은 변하지 않았다.

바다의 재앙이 숨을 거둠으로써 멸망이 끝나고 종말이 시작됐다――― 그러나 언제 놈이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 쓰러뜨려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늑대는 고개를 흔들며 그 착각을 바로잡아주었다.

예를 들어, 단세혁의 세계에서는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리고 네버랜드를 막은 이후 지금으로부터 5, 6년 정도가 흘러 종말을 맞이했다.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지 멸망하지 않으면 결국 종말은 찾아온다.

하지만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렸으니 그 순간은 훨씬 앞당겨졌을 터. 거기에 대한 답은 어쩌면 여왕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켜봐 왔을 테니까. 무수히 많은 세계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알겠, 네."

숨 막힌다는 듯 아스터가 힘겹게 말하자 늑대는 눈을 감았다. 알릴 건 전부 알렸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할지는 모른다. 다만 가능하면 알리지 말라고 말했다. 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종말이 찾아올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건 지금의 자신 또한 마찬가지.

최소한 초월의 격에 올라서야만 한다.

"……."

마침 아스터가 탈 비행기가 먼저 도착했고 그는 인자해 보이는 가면을 벗어던지고서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를 업고 있지 않았더라면 더 그랬을 텐데.

***

귀국하는 동안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텐트에서 억지로 기다리고 있던 페리가 단번에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고 홍유리는 가만히 턱을 괸 채 긴긴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주로 말하는 건 이은하였는데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실감 나지 않기 때문인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티는 내지 않더라도 수색대의 분위기는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종말에 관해서가 아니라 조금 다른 이유로.

아무튼, 곧 공항에 내려 수원의 클랜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앞에 두고 강태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수색 종료. 전원 수고했다."

"……."

"알고 있겠지만 고원은 실종됐다. 희망 없는 실종. 당연히 창선 또한 마찬가지. 많은 별이 져버린 셈이다."

광휘에 이어 칠영웅의 창선과 고원 전체가 사라진 셈이다. 강태준의 말에 클랜원들은 무겁게 끄덕였다.

"곧 공표하겠지만 수확이 없는 건 아니다. 알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겠지만 마지막 남은 재앙을 쓰러뜨렸으니까."

바다의 재앙을.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어찌 됐건, 고원이 사라졌다는 건 이 나라를 수호하는 이름은 여명이 됐다는 뜻이다. 앞으로 더 바빠지고 어려워질 거다."

"……."

"그들의 책임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한다는 거다."

"……."

"평화가 찾아왔다는 어쭙잖은 생각은 버려라. 우리에게는 아니니까. 이제까지보다 더 바빠질 거고 그래야만 한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떠나라."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인 강태준은 클랜원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했다.

"……수색은 끝이다. 수고했다. 해산한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참았던 숨을 뱉는 클랜원들을 뒤로 한 늑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홍유리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

곧바로 여왕을 만나러 갔지만 볼 수 없었다. 이미 여명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백소율과 함께 지리산으로 갔다는 말에 늑대는 무겁게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부탁한 일. 그 말인즉, 여왕의 상태가 악화했다는 뜻이다. 그럴 거라 생각했듯이. 하지만 최악은 아니다. 아직 백소율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여왕이 살아있다는 뜻일 테니까.

"지리산으로 갈 생각인데…… 너는?"

말없이 끄덕이는 홍유리. 따라오겠다는 뜻에 늑대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저기압인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천천히 고개 들어 올리더니 투덜거리듯 말해왔다.

"아 쫌. 헝클어지잖아."

"……."

"하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쳐내기는커녕 오히려 끌어당기는 모습에 늑대는 실소했다. 조금은 기운 차린 모습에 계속 쓰다듬어주며 왜 그랬느냐고 물었지만,

"암것도 아냐."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얼추 짐작이 가지만 그건 자신이 위로한다고 어떻게 될만한 게 아니다. 그녀의 자존심이라면 그래봤자 결국 자괴감만 더 커질 테니까.

결국 그녀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이라는 거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옆에 있어 주는 것뿐.

잠깐 그녀를 안아주다 아직 침울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보고 문득, 한참이나 들지 않았던 장난기가 들었다.

"……너, 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을 놓친 홍유리가 드물게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귀를 가리는 그녀의 모습에 만족스레 웃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너, 너 이 개새끼!"

가만 당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뻗어온 홍유리. 적당히 피하다가 잡혀준 늑대는 그녀와 함께 소파 위를 뒹굴었다.

"이게 진짜!"

그러다 떨어져 뒤늦게 참전한 페리까지 셋이서 방을 뒹굴고 대자로 뻗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한참이나.

"출발할까?"

"……엉."

끄덕인 그녀의 얼굴엔 침울한 그림자가 걷혀있었다.

***

그녀와 안면이 있는 이들을 데리고서 지리산에 도착해 금세 그녀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설마."

나무로 만든 관과 같은 요람 위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여왕의 모습에 누군가 의문을 뱉었지만, 늑대는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다. 아직 그녀는 죽지 않았다는 거다. 대신, 기나긴 잠에 빠졌을 뿐. 천천히 다가가 살피니 이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가만 누워있는 게 보였다.

순은을 뽑아낸 듯 찬란하게 빛나던 머리카락은 빛을 잃고 푸석푸석한 흰 머리로 변했다. 윤기와 탄력을 잃은 피부는 고목처럼 말라 생기를 잃고 있었다. 마치 강한 열기에 타오르는 것처럼. 육신의 그릇이 그녀의 영혼을 견디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불타고 있었기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마지막 순간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거다.

"……오셨네요."

그 옆에 있던 백소율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해와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여왕의 주변으로 무수한 영물과 환수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있었다. 늑대가 본 적 있는 환수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분명 테헤란에 있었을 오래된 용과 요정용들마저. 흰 사슴과 눈이 마주친 늑대는 작게 끄덕였다.

곧, 길이 열렸다. 그들이 터주는 길을 따라 여왕의 앞까지 걷던 늑대는 기시감을 느꼈다. 균열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기억. 여신이라 불리던 시절의 그녀도 지금처럼 환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비록 그 당시의 그녀는 몰락해 지금 최후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들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몇몇 환수들은 아직 어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늑대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아까의 기시감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있었으니까. 자색 줄무늬를 가진 검은 호랑이가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비록 육신은 없지만, 정수로 남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이들은 죽어 내게 돌아오더구나.'

언젠가 들었던 그녀의 말이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여왕은 지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정수들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때도 지금도 늑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환생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닌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리고 계시네."

백록의 말에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앞까지 다가갔을 때, 죽은 듯이 잠든 여왕의 눈이 천천히 뜨이기 시작했다. 빛을 잃은 것처럼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분명 자신이 있는 곳을 보고서.

"왔구나."

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오자 늑대는 천천히 끄덕였다.

***

여왕과 대화하며 중요한 이야기 같은 건 나누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잡담을 들어주었을 뿐.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처음 생각하고 왔던 물음은 무엇 하나 던지지 않았다.

오늘은 무얼 했네, 기다리느라 힘들었네, 뭘 하고 왔니, 이런 일이 있었단다……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

한참이나 이야기하고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돌아갈 이들은 돌아가게 됐고 늑대를 비롯해 몇몇은 남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침보다 저녁에 더 메말라가는 그녀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정말 그녀는 잠에 들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정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아침이 되기 전에 새벽이슬과 함께 그녀는 덧없이 져버리고 말리라. 곧잘 이리로 온 건 정답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야기는커녕 그녀의 주검만을 보게 됐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숨이 새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더 깊은 밤이 됐을 때, 자신을 쓰다듬는 여왕의 손길에 한참을 생각하던 늑대는 결국 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기적인 바람을 꺼내고야 말았다.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걸 그녀라고 모를 리 없다. 그 말을 꺼낸 순간, 환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됐다.

그 눈에는 희망이 차올라 있었다.

혹시라도 여왕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냐는 희망이. 거기에 여왕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비겁하구나."

비겁하다는 말. 난처하게 웃는 그녀의 말은 잘 이해하고 있다. 환수들, 그녀의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테니까.

그래. 비겁함. 혹시라도 마음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마음과 그녀의 상냥함을 이용한 비겁함이었다.

"……알고 있잖니? 나는 이제 지쳤단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운 듯, 가까스로 페리를 쓰다듬으며 여왕은 말했다.

"더는 그럴 자신이 없어."

알고 있다. 여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녀가 만든 세계는 무너져내렸다.

아마도 만상의 주인보다도 더 많이 그녀의 세계는 끝을 맞이했을 거다. 그게 뜻하는 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환수들이 그 세계만큼 죽음을 맞았다는 거다.

고작 한 번만이 아니라 수십 수백 혹은 수천 번을 넘을 만큼 그녀의 세계는 부서졌고 매번 그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 심정이 어떤지 늑대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홍유리와 백소율을 비롯해 알고 지내는 이들 모두가 셀 수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들 하나하나가 그녀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환수들임에야.

지치는 게 당연하다. 메마르는 게 당연하다. 이젠 기력조차 남지 않아 쉬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영락하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했고 마지막까지 애써왔다.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을지는 그녀 혼자만이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런 그녀에게 살아달라고 정수를 취하라고 하는 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기적이다 못해 비겁한 일이었다.

적어도 늑대만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쉬게 해 주겠니?"

마른 웃음을 짓는 여왕의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거기에 늑대는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왕의 마음을, 환수들을 이용하려 한 건 정말 비겁한 짓이었다고.

다만, 그걸 아는 건 자신뿐이다. 페리와 홍유리. 백소율과 이은하 그리고 환수들까지 그녀가 살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그 무수한 시간 속에 이런 일조차 있었을지 모른다.

…….

떠다니는 정수 하나가 늑대의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깟 모조품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언젠가 들었던 검은 호랑이의 말. 환계를 부숴서라도 그녀를 지키려 했던 자색의 흑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에게 환계와 환수는 지긋지긋하고 덧없는 것이었으리라.

여왕을 갉아먹고 옥죄는 추억이란 이름의 모조품. 진짜도 아닌 모방한 가짜. 그게 그녀를 영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으리라.

죽음이 코앞에 가까워진 그녀를 보고서야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죄송합니다."

그래서 늑대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치고 피로한 여왕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이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바람을 그렇게 토해내고야 말았다.

"끝까지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 자신이 막지 못했던 종말을 막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자, 늑대가 뻗은 촉수 끝으로 찬란한 빛을 뿌리며 하나둘씩 정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의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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