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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59화 (259/407)

〈 259화 〉 #110 바람 (2)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모여든 정수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모여들자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강한 빛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로라처럼 은은하게도 보인다. 그러나 결국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귀결되고 만다. 바로 이 작은 빛무리가 그들의 존재 자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여왕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돌아오지 않는 추억은 처음부터 곁에 있었다. 그녀의 곁을 떠나기는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었던 거다. 그 메마른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며 늑대는 촉수를 뻗었다.

"……안 돼."

갈라진 목소리가 그걸 거부하고 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오랜 시간 애써왔던 그녀가 정말 바라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른다. 아까 말했듯이 이젠 지쳐 쉬고 싶어 하는 게 본심일지도 모른다.

그걸 무시해서라도 바라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자신의 제멋대로인 이기심일뿐이다.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늑대는 그녀에게 손길을 뻗었다. 그 끝에 맺힌 정수의 빛무리가 들릴 리 없는 목소리를 들리게 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치고 바라고 있었다.

죽지 말라고. 살아달라고. 부탁한다고.

"나는."

여왕은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멎을 거라 의심치 않았던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고동이…

"나는…"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진작에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뻗은 손길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었다.

살아달라고 바라는 손길에 여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왕님~!"

"살아줘! 살아줘!"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잔뜩 모인 요정과 환수들의 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감정일까. 살아달라는 말을 듣고서 다시 고개 돌렸을 때, 여전히 뻗은 손길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걸 보았을 때 여왕은 자신의 마음속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나는……"

그래도 거절해야 한다. 아이들의 정수를 받아 살아남을 순 없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직전,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당당하면서도 한 맺힌 소리였다. 이건 도대체? 이 아이들이 바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인 순간,

'멸망과 종말. 전부 막고 말겠어.'

환청이란 걸 깨달았다. 왜냐면 그 목소리는 이전에 누군가가 당당히 선언했던 말이니까. 정말 오랜만에 가슴 설레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멋대로 끼어들지 마.'

뛰는 심장이, 가슴이 괴롭다. 숨을 몰아쉬던 여왕은 가장 커다란 정수가 눈앞에 맴돌자 결국 마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런 거니?"

아이들이 바라는 것. 살아달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살아서 함께 끝을 봐 달라고. 그래서 기억 속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준 것이리라.

"……그런, 거니?"

그렇다면. 정말 그걸 바라는 거라면…… 여왕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

뻗은 촉수를 붙잡은 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녀가 살아주기만을 바랐을 뿐. 같은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육신을 잃고 정수만이 남았음에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거다.

어디까지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그녀와 정수가 선택한 일이다. 곁을 떠나지 않은 것도, 살리는 것도 그녀와 함께한 정수들이다. 하지만 그거면 된다.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으니까.

그래. 그거면 족하다.

"아!"

누군가의 탄성. 촉수 끝에 맺힌 하나둘 빛무리가 여왕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영혼의 격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던 육신의 격은 정수를 받아들여 조금씩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마른 피부는 윤기와 탄력을, 빛바랜 머리카락에는 색이 되돌아온다. 결국에 빛이 강해지며 그녀를 온전히 덮은 순간,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멋대로인 바람을 그들이 이루어주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이들이 영혼을 불살라 그녀의 생을 잇는 기적을 선물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앞에 환영이 떠오르더니 검은 호랑이가 송곳니를 드러내더니 덤벼들었다.

***

[업 132.9%]

――자신에게 스며든 흑호의 정수.

비정상적인 힘. 그러나 이상할 것도 없다. 놈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기량과 경험의 차이였지 역량에서 우위를 점한 게 아니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 애초부터 흑호가 가지고 있던 업은 자신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132%. 원래 가지고 있던 걸 제외하더라도 120%가량. 이상할 건 없지만 그 압도적인 수치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흑호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느꼈다.

그 정수를 받아들이는 와중, 반드시 지키라고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아마 여왕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다른 이들과 같았으리라. 하지만 죄를 지은 자신만큼은 그녀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정수를 받아들임에 따라 놈의 감정과 기억이 일부 자신에게로 스며들었다. 소리가 들려온다. 지키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포기할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흑호의 기억을 짓누른 늑대는 다시 여왕을 보았다.

"그래. 너는…"

그 눈은 자신을 보고 있지만 그런 동시에 안에 스며든 녀석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여왕은 별안간 피를 토했다. 앞섶을 적시는 각혈에 놀랐지만, 어느새 다가온 백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검은 피일세."

걱정하지 말라고 끄덕이는 사슴의 모습. 썩어 문드러진 울혈을 토했다는 건 오히려 나아지고 있다는 징조. 아직 남은 빛무리마저 하나둘 그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 저건 대체…"

말없이 곁을 지키는 백소율. 초조하게 묻는 홍유리와 아연하게 바라보는 이은하. 아직 남아있는 셋을 보며 늑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여왕이 죽음에 다다르는 원인은 병이나 상처 같은 게 아니다. 깨지고 부서진 몸은 스스로 격을 버림으로써 치유되었다. 그 때문에 영육의 격이 맞지 않았을 뿐. 정수를 받아들여 다시 온전해진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본래의 격을 되찾는 건 무리였던 모양.

"……."

정수는 모두 받아들였다. 분명 육신의 틀은 벗어던졌지만, 자신과 같은 정신체의 영역에 머물러있다. 이전과 같은 초월의 격에는 닿지 못했다는 뜻이다.

전처럼 권능을 사용할 수도 없고 기적과 같은 일을 행할 수도 없다. 환계를 다시 만들 수도 없을 테고 여전히 영육의 격은 어긋나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

"―――!"

"――――――!!!"

사람이건 환수건 구분 없이 환호를 질렀다. 내막을 알 필요 없이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니까.

"고맙구나."

환수들에게 우르르 둘러싸여 울고 웃는, 이상한 표정의 여왕을 보며 늑대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새벽안개 사이로 떨어지더니 바닥에 떨어져 산중의 흙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잘 되긴 했네. 근데 더 안 있어도 돼?"

"그래. 그러고 싶으면 나중에 와도 된다. 남을 텐가?"

"아니, 괜찮은데."

가볍게 사양한 홍유리는 곧 생각에 잠긴 듯 잠잠해졌다. 아까의 광경을 보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정수라는 걸 그녀는 처음 봤을 테니까. 마법사인 그녀라면 생각할 거리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에.

"……."

작전이라도 짜는 것처럼 소곤거리는 백소율과 이은하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수색대에서 며칠간 지낸 것처럼 백소율은 이 지리산에서 계속 있었을 터.

어느새 4월이 머지않게 됐다. 하지만 많은 게 바뀌었다. 죽을 거라 생각했던 여왕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바다의 재앙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몬스터는 남았다지만 모든 재앙을 쓰러뜨렸으니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은 사실상 0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멸망의 뒤에 종말이 찾아오게 된다.

여왕에게서 물을 것도 없이 그 종말이 언제 찾아오느냐에 대한 답을 알 수 있게 됐다.

만상의 주인과 여왕을 제외하고서도 수많은 세계를 지나온 이의 정수를 받아들였으니까. 흑호의 기억 속에 그 정보가 있었다.

가장 빠르게 종말이 찾아온 경우는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그 자세한 내막을 백두산에서 움직이지 않는 흑호가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바다의 재앙의 비늘 가루. 놈에게서 비늘을 빼앗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한정돼있다. 그걸 탕아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역시 만상의 주인밖에 없다.

시험해본 것이리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재앙을 쓰러뜨리면 종말이 얼마나 빨리 찾아오는지를.

앞으로 3개월. 즉, 6월 말. 확신은 없지만 가장 빨랐던 때를 생각하고 대비해야만 한다. 그때까지 초월의 격에 오르고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제 때가 됐다. 놔두고 온 바다의 재앙을 먹어 치우러 갈 시간이 됐다는 거다.

***

"실패한 게 아니라 말도 못 꺼내셨다고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은하가 무안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소율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으으, 미안."

면목 없다며 고개 숙여오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떻게든 어필하게 해야 하는데…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전하라는 게 그렇게 힘든 거였을까. 손가락을 맞대며 꼼지락거리는 모습에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이해하기도 했다. 놀러 간 것도 아닌 데다가 선생님도 쭉 같이 있었을 테니.

거기에 바다의 재앙까지 만났다는 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남은 아쉬움에 한숨을 뱉으니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움찔거렸고, 그게 또 안쓰럽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요. 포기하진 않으실 거죠?"

"응. 응!"

거기에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그래. 그거면 된다. 어떻게든 선생님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에 알파를……?

그렇게 생각하던 백소율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문득, 어떤 불경한 생각과 함께 묘한 불길함이 엄습해왔다.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다는 강한 불안감이.

***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고 비효율적이다. 몰락해 죽어가는 신을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정수가 소모되고 말았다. 사라진 정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몰락한 신의 육신의 격이 돼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녀가 정수를 가지고 있었단 걸 모를 리 없다. 육신을 버리고 되돌아가던 흑호의 정수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정수를 취하지 않았다. 그건 희망에게 이어져야 했을 길이니까. 그 모든 정수를 취하고 초월의 격에 오르기만을 바랐다. 가능하면 몰락한 신을 먹어 치워서라도.

그런데. 그런데.

"쓸데없는 짓을."

먹어치우기는커녕 여왕을 살리는 데 써버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초월의 격에 다다르는 것도 꿈은 아닐 텐데.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 동시에 희망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잘라내지 못해 가시밭길을 걷는 모습이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거둘 걸 그랬다. 그리고 희망에게 먹어치우게 만드는 게 더 나았으리라. 애써 아쉬움을 누르고 아직 완전하지 않은 몸을 추슬렀다.

전부 다 회복되면 흑린을…… 그리고 결국엔 종말을 죽일 수 있게 되리라. 오랜 세월 바랐던 소망이 이루어질 시간이 그리 머지않았다.

점차 끝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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