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111 성장 (2)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돌아온 늑대는 다소 신기한 경험을 겪었다. 분명 어둑한 밤에 출발했는데 도착한 순간 아침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소모했는가. 아니, 아니었다. 레벨이 오르며 성장한 만큼 발이 빨라져 그린란드해에서 수원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보다 거리에 따른 시차가 밤낮이 바뀌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대략 7000km의 거리. 대충 계산해봐도 시속 2000km가 넘는다. 진작부터 느낀 거였지만, 생물의 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말았다.
고작 쥐 한 마리에 애먹던 이전과는 달라졌다. 스스로도 믿기 어렵지만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세계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
많은 이들의 기억과 감정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렇다 해도 자아의 확립은 분명히 하고 있어 혼동할 일은 없다.
금세 클랜까지 도착한 늑대는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유지하고 있던 비가시화를 해제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신에게 깜짝 놀란 클랜원이 기겁했지만, 퍼뜩 정신 차리고는 커피를 건네왔다.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걸 가볍게 쳐내자 아쉬움을 삼키고 멀어져갔다. 그냥 마셔도 괜찮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시던 건 좀 꺼려졌으니까.
약간의 소란을 무시하고 오른 늑대의 귀가 소리를 포착했다. 그 목소리를 착각할 리 없었기에 연무장으로 내려가던 중 백소율을 만났고 다른 의미로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그녀에게 단숨에 끌어안겨 뺨을 비벼졌다.
"이제 돌아오세요?"
끄덕이자 한껏 숨을 들이켜더니 한참 끌어안은 백소율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물론 놓아주지는 않았지만.
"페리는?"
홍유리가 어딨는지는 오자마자 알 수 있었지만 페리의 기척을 도무지 느낄 수 없어서였다. 예전 같았으면 환계에 있을 거라 여겼겠지만 지금은 아닐 테니까.
"지리산에 있어요. 가시자마자 떼 쓰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같이 갈 순 없었으니까. 같은 이유로 홍유리도 기다리게 했으니까. 닷새까지는 어떻게 달랬지만, 결국 시무룩해진 페리가 삐져서 여왕에게로 갔다는 듯하다.
"……."
제멋대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요즘 따라 페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지만…… 아직 어린 페리가 그런 걸 고려하긴 힘들 터.
"보러 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삐진 모양이라고 백소율은 그렇게 말했다. 꼬리로 때려주는 정도라면 다행이겠지만 닷새간 보지 않았다고 하면 그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수련실에 가는 길이죠?"
용케도 알아차린 모양. 걸을 필요 없이 수련실행 백소율을 타고 편하게 안겨 기다리자 홍유리와 이은하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그 여파로 돌풍이 불어닥쳤지만, 늑대의 주변으로는 조금도 닿지 않았다. 더 강한 바람이 둘려 있었기에.
투덕거리는 둘. 주로 이은하가 공격하고 홍유리가 받아주는 쪽. 그 싸움을 지켜보던 늑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둘의 싸움이 성립할 리가 없다. 둘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아이와 어른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고작 그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됐다는 거다. 지리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성장을 이뤘다. 사실상 스퀘어 마스터를 제외하곤 인류의 정점에 위치한 홍유리와 아이와 어른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 용종이 되기 전의 홍유리라면 아무리 그래도 질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일방적이진 않았으리라.
잠깐 지켜보니 이쪽을 눈치챈 홍유리의 시선이 향한 순간, 그녀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너 이!"
이은하가 구현한 마력을 순식간에 불태우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의기양양해 보이는 백소율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
또 난장판이 되겠구나 생각했더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싸울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백소율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을 넘겨주었다. 그 모습에 되레 홍유리가 의아해했을 만큼이나. 조금 놀란 눈치로 그녀를 본 순간,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이?"
"그럼 고생하세요."
고생하세요. 그 말만 남긴 백소율은 빠르게 사라져갔고 홍유리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구현한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침울해하던 이은하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에 늑대는 촉수를 흔들어 인사했다.
***
자신을 받아든 홍유리가 계단을 오른다.
싸우지 않아 다행이다. 마지막 행동은 분명 도발이었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 감내한 모양. 알게 모르게 내성이 생기고 있단 거였다.
"진짜 기회만 있으면."
확 쥐어 박아버리는 건데. 퍽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러지 않은 게 어디인가. 조금쯤은 관계가 개선……된 걸지도 모른다.
곧 옥상에 도착한 홍유리가 벤치 위에 자신을 내려놓곤 기지개를 켰다. 의외로 눈 아래 알게 모르게 다크서클이 껴 있었는데, 이은하와 대련을 받아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뭐. 왜?"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늑대는 가만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큰 것 같아서."
"뭐?"
"아니, 조금 자랐다."
갸웃거린 홍유리는 다시 일어나보았지만, 전혀 모르겠단 눈치였다. 하지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자랐다고.
용종이 됐기 때문인지 성장했다. 질병과 싸웠을 때 보아 알고 있었다. 용혈의 영향으로 그 순간만 조금 자란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0.1cm가 더 자랐다. 다른 것도 아닌 심안으로 본 것이기에 착각할 리 없다.
앞으로 0.1cm만 더 자라면 144cm… 그 말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또 그렇게 잘 알아?"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한 어투. 낱낱이 파헤쳐진다는 게 불쾌한 걸까? 그동안 지내온 늑대는 이럴 때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네 일이니까."
순간,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는 그녀를 늑대는 재밌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고작 말 한마디에 새빨개진 홍유리는 홱 고개 돌렸다.
"……개새끼."
욕이지만 투덜거리는 말이었기에 여느 때처럼 웃은 늑대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태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디가 얼굴인지 머리칼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붉어졌던 얼굴도 차츰 색을 되찾아갔다.
"그래서, 왜 이제 오는데?"
퉁명스레 늦었다고 알리는 말에 바다의 재앙을 먹는 데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린란드해 인근의 몬스터까지 집어삼키기도 했고. 먹었다는 말에야 그게 실감 난 건지 홍유리는 실소하고 말았다.
그 커다란 괴물이 이젠 흔적도 남지 않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늑대가 연 아공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으니까. 그걸 잘라내더니 자신에게 건넸다. 정말 끝부분만 자른 것 같지만 자판기보다 커다란 것에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잠깐 불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덮여있던 녹조류가 깔끔하게 불태워지고 본래의 푸른 빛이 드러난다. 두말할 것 없이 재앙의 비늘이었다.
그걸 건네받고도 얼떨떨한 듯 보던 홍유리는 선물이라는 말에 반색했다. 용의 모든 건 희귀하니까. 바다의 재앙의 것이라면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거다.
애초에 한 장의 비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이것마저 잘라 아공간에 넣어둔 거였지만. 자르지 않은 비늘은 옥상을 가득 채울지도 모른다.
비늘을 옆에 두자 고개를 끄덕거리는 홍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똑똑히 들렸다.
웃어버린 늑대는 낮의 햇살을 즐겼다. 뒤늦게 자신을 찾은 클랜원이 강태준의 부름을 알리기 전까지.
***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서, 성과는 있었나?"
망설이지 않고 끄덕였다. 그런가 하던 강태준이 밀봉이 뜯긴 편지를 책상에 스치듯 밀며 던졌다. 가볍게 받아든 늑대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요약하건대, 몬스터가 있으니 해치워 달라는 것. 이걸 왜 자신에게 보여 주였는지 이유는 명확하다. 생각 있느냐는 것이리라.
"……."
문제는 발신일이 열흘 전이라는 것. 자신이 떠난 그 날까지 굳이 답장하지 않았다는 건 처리하기 난처한 몬스터라는 뜻이리라.
"어떤 놈이지?"
"정보는 받은 이후에 주겠다더군.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부탁할 생각인 것 같더군. 급해 보이진 않아도 만약을 대비할 셈인 듯 보인다."
자신의 추측을 알린 강태준의 말. 즉, 요약하자면 쓰러뜨릴 수 없는 몬스터가 러시아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리고 알리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처리해 달라는 것. 구축함을 띄워 홍유리까지 굳이 휘말리게 한 행동은 괘씸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경험치가 부족한 와중에 쓰러뜨리기 어려운 몬스터라면 충분한 경험치가 될 테니까. 한시가 바쁜 와중에 오히려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럼 그렇게 알리겠다."
이야기가 끝나 방으로 나가던 늑대에게 강태준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네가 부탁한 건. 집이 완성됐다. 위치는 나중에 알려주지."
거기에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
강태준과 대화를 마치고 해가 중천으로 넘어갈 즈음 늑대는 페리를 찾으러 지리산을 향했다. 거기에 더해 여왕의 상태가 어떤지도 봐야 할 테니까. 발판을 밟고 비가시화를 사용한 채 지리산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주변을 둘러보니 동물과 환수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로 동물들이 환수를 뒤따르는 쪽으로. 괴물 늑대와 경쟁하듯 먹어치우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동물들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거다. 아직 이곳의 생태계가 다 회복한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여왕이 있는 곳을 금세 찾아낸 늑대는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완전히 건강해져 혈색을 되찾은 그녀가 백록의 등에 타 환수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아직 영육의 격은 어긋나있지만, 전처럼 불안정하지는 않다. 일단은 자신과 같은 정신체였으니까. 자색의 흑호나 바다의 재앙 같은 괴물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리라.
……딱 하나 걱정되는 게 있다면 만상의 주인. 몰락한 여왕을 새삼 노릴 것 같진 않지만 여태 의뭉스레 행동했던 그녀에게선 무엇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가능하면 여왕이 자신의 눈길이 닿는 곳에 있었으면 한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왕이 손을 흔들었고 그녀가 타고 있던 백록 또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깊은 여왕의 눈이 한참이나 자신을 바라본다. 늑대는 숨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 업에 가려진 실체가 드러난 순간, 그녀는 놀랐다는 듯 입을 가렸다.
"돌아왔구나. 그리고… 머지않았어."
머지않았다는 말에 늑대는 자신을 관조했다. 그녀의 말대로 최대 레벨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을 거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최대 레벨까지 오르는 데 필요한 무식한 경험치량.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업. 그 두 난관을 극복한 뒤에야 초월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
지금은 만상의 주인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지난 열흘간, 받아들인 기억 속에 검은 호랑이의 마지막 순간을 보았으니까.
그 최후는 만상의 주인에게 숨이 거둬진 것.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녀가 죽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
'모조 엘릭서.'
그걸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아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원작에서는 침묵하는 입이 마셨지만 만상의 주인은 무수한 평행 세계를 탐방했을 테니까. 남아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 기적 같은 힘의 물약이 말이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페리는 어디 있습니까?"
백소율도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삐졌다고 했던가. 그래서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보이지 않는다. 그 질문에 여왕과 백록은 잠깐 서로를 보는 듯하더니 조금 떨어진 곳을 주시했다.
"허물을 벗고 있단다."
"……?"
"두 번째 탈피에 들어갔다는 뜻일세."
첨언한, 예상치 못한 백록의 말에 늑대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