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113 고백
클랜으로 출근했을 때, 강태준의 부름에 들른 늑대는 집은 괜찮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다행이군. 내일 출발인 건 잊지 않았겠지."
끄덕이자 강태준은 일부러 인화한 한 장의 사진을 건넸다. 절벽과 울창한 숲이 펼쳐진 곳. 아니, 울창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전부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아무리 러시아라지만 4월에 접어들었는데 혹한의 대지 그대로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곡과 비슷한 크기의 거대한 코끼리… 아니, 매머드였다. 다만 그 크기가 비정상적인 화산각룡과 엇비슷한 크기에 연한 하늘색의 털빛을 가진 짐승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사진 속에 찍혀있는 놈. 그게 여명에 도움을 청한 이유이리라.
"더 궁금한 건 있나?"
모습만 확인했으면 됐다. 어차피 먹어 치울 테니 이 이상 관심을 쏟을 필요는 없다. 바다의 재앙은 멸망의 끝. 그리고 던전과 몬스터는 멸망의 일부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 냉정하게 생각해 이제 와 위협이 될만한 몬스터가 있을 리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클랜장실을 나온 늑대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기다리고 있던 이은하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전화로 오늘 시간이 있냐고 물었으니.
"……괜찮나?"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다. 풀린 다리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어색하게 웃은 이은하는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요즘 대련을 하는 듯하더니 역시나… 그래도 용케 왔다 싶었다. 잠깐 벤치에 앉아 쉬다가 숨을 돌린 그녀가 고맙다고 말해왔다.
쉬고 기다리다 상태가 괜찮아졌을 무렵, 심호흡한 이은하가 한 말은,
"지리산에 가지 않을래?"
***
높은 하늘에서 달리자 휘둥그레 눈뜨며 자신에게 엎드려 붙잡은 이은하가 달달 이를 떨었다.
"저, 전보다 빨라진 거 아냐?!"
그거야 당연히. 촉수로 단단히 붙잡아 고정하고 폭풍으로 바람을 훑으며 달려 지리산까지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후아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은하의 모습. 무사히 도착한 데 안심한 듯했다. ……어차피 정말 위험할 거라면 천천히 가서라도 했을 텐데.
그나저나 왜 여기에 온 걸까. 그 이유를 묻자 이은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같이 와보고 싶었어."
종종 환수와 요정들을 만나 그네들이 재잘거리곤 했다. 심지어는 요정이 호들갑을 떨며 동물들과 놀다가 맷돼지에게 들이받아질 뻔하고 있었다.
"으아앙~!"
그나마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 구해주려던 늑대는 그러기 전에 커다란 곰이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멧돼지가 멀찍이 사라져갔다.
"곰…?"
반달가슴곰. 묘한 익숙함을 느낀 늑대가 빤히 바라보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한쪽 다리에 꿀통… 벌집을 들고 핥아 보인다. 그 통통하게 살찐 곰이 다가오더니 자신을 핥자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꾸워엉!!"
우렁찬 울음소리에 확신이 들었다. 분명 예전에 잠깐 함께했던 그 곰이리라. 건강히 있었으면 했지만 건강해도 너무 건강해 보인다.
워그와 자신이 사라진 땅에 새로운 왕이 되기라도 했다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 거기에 이은하도 뒤늦게 눈치챘는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사이. 곰이 멧돼지를 쫓아 구해준 요정은 늑대도 익히 알고 있는 요정이었는데, 세 번째 겨울의 아이였다. 유독 백록이 아끼는 녀석이 왜 혼자 여기 있는지 조금 의아했지만, 요정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을 생각해보자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울상 짓던 녀석이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껴안아 왔다.
"으앙~ 늑대야!"
하다못해 요정용과 함께 있었다면 안전할 텐데 굳이 혼자 있어야 했을까. 울음이 그칠 때까지 훌쩍이는 녀석을 달래주었지만, 도저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갸웃거리던 곰이 꿀통을 내밀었다.
잠깐 보다가 촉수를 꿀통에 담가 내미니 달콤한 냄새를 맡았는지 조금씩 울음이 그치더니 금세 헤벌쭉한 얼굴로 할짝댔다.
헤헤, 웃는 얼굴이 된 요정에게 이은하가 싱겁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귀엽다. 그치?"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요정이나 이은하나 그리 다르진 않은 것 같은데…… 주로 얼빠진 모습이 말이다.
곰에게 달래진 녀석은 아까 멧돼지에게 당한 건 깜빡 잊었는지 까불거리며 곰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환수들이 있는 곳까지 동행하는 게 맞겠지만 설마 이 녀석이 요정을 잡아먹진 않으리라.
그새 의기투합한 둘을 놔두고서 이은하와 함께 산중을 거닐었다. 요즘 따라 자주 돌아오는 지리산. 종종 올 생각이었지만, 하루 만에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이은하가 오고 싶었던 곳이 여기일 줄은 몰랐다.
슬슬 이곳 풍경도 눈에 익어 익숙해져 간다. 멀리 여왕의 기척이 느껴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아니니까. 이은하도 여왕을 보러 온 건 아닌 듯했다. 지나던 와중에 뱀사골이 보여 묘한 감상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거길 지나 얼마간 더 걸었을 때, 법계사의 정문이 보였다.
"여긴…"
들어가자며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에 뒤따른 늑대에게 이은하가 말을 걸었다.
"기억나? 여기."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긴 지리산에서 했던 마지막 일. 그녀와 함께 괴물 늑대와 싸웠던 곳이니까.
"여기서 두 번째였어."
"……."
"네가 날 구해준 게."
늑대는 천천히, 무겁게 끄덕였고 이은하는 쓰게 웃었다. 어리석고 멍청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을 굳이 여기까지 돌아왔으니까. 새삼 반성하게 된다. 만약 알파가 없었다면 여기서 그냥 분명 죽게 됐으리라.
법계사의 경내.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거다.
"그래서 와보고 싶었나?"
"……응."
이은하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그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한참 동안 만나고 싶었다가 네버랜드에서 또 구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세 번. 엇갈린 오해가 풀리자 원수에서 동경으로 바뀐 그 마음은 어느샌가 또 한 번 바뀌게 됐다.
알파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휴우우!"
스스로를 분기하기 위해 심호흡한 이은하는 자신의 뺨을 치고는 늑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래."
"근데 그 전에 하나만."
하나만 확인하겠다는 말에 늑대는 끄덕거렸다.
"……두 명이지?"
두 명. 그게 뜻하는 건 명백하다. 굳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것과 긴장으로 굳어진 몸. 콩콩 뛰는 심장 소리가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 질문에 대한 답으로 끄덕인 늑대는 가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심호흡한 이은하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며 물어왔다.
"셋은 싫어?"
늑대는 속으로 실소했다. 대체 자신이 뭐라고. 사람도 아닌 몬스터일 뿐인데. 과분한 마음을 주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차마 거기에 응할 수는 없다. 이미 둘이었으니까. 둘이나 셋이나 뭐가 다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미안하다."
입술을 깨문 이은하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게 그날, 둘은 어색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이은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고 소율이도 이렇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무릎을 더 강하게 끌어안은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니까. 다른 클랜원들에게 차갑게 손도 대지 못하는 것에 반해 자신은 달랐으니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지만 이래저래 함께 한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기대했었다. 혹시 혼자만의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 하지만……
'아니었어.'
그래.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있다는 부담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도 받아줬을 테니까. 아무렇지 않게 즉답처럼 끊어내 가슴이 쓰라렸다.
[어떻게 됐어요?]
마침 소율이에게서 온 문자. 가만 보던 이은하는 빠른 타자로 답했다.
실패했다고…….
힘없이 답 문자를 보내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몸을 뉘였다. 각오하고 있었기에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답답한 기분이었다. 속에서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라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듯하다. 그냥,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알고 있었던 주제에 멋대로 기대해놓고 뒤늦게 궁상떨고 있는 자신에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자괴감에 한숨 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그냥, 그대로 잠을 청했다. ……아침까지는 그렇게 분발했는데, 자신의 어리석음과 그 때문에 차오른 무기력함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
[괜찮아요. 이제 시작이니까요]
돌아온 답장. 이은하가 그 문자를 본 건 아침이 된 다음이었다.
***
"빨리 왔네."
돌아온 늑대는 가볍게 끄덕거렸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던 홍유리는 턱을 괸 채로 퉁명스레 물었다.
"차고 왔어?"
"……?"
"이은하. 차고 왔냐고."
돌아보지도 않고 끊어 하는 말에 늑대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뭘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야. 존나 뻔한데."
그러면서도 별 흥미 없다는 듯 여전히 시선은 TV에 고정돼있었다.
"그년이 너 좋아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다혈질일 뿐이지 홍유리는 멍청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뛰어난 마법사인 그녀가 아둔할 리 없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난리 치더니, 백이면 백이지."
분발하던 모습과 어제의 전화. 유추하긴 어렵지 않다.
다만 그 어영부영한 맘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싶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백소율처럼 정말 작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포기하진 않으리라. 자기 맘도 제대로 모르던 년이 갑자기 뜬금없이 고백해왔다는 건 뒤에 누가 있다는 거고 백소율 그년 말고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더 있을까.
무슨 꿍꿍이인지도 대강 짐작은 간다.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정말 그 말대로이리라. 어떻게든 자신의 시선을 분산시킬 모양. 안 그래도 둘인데…… 셋으로?
홍유리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알파가 이은하를 거절할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라면 백소율이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은하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백소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나온다면야 자신이라고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죄책감 같은 거 갖지도 마.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도 마. 너 좋아하는 애 나올 때마다 일일이 그럴 거야?"
정곡을 찌르는 말에 늑대는 무겁게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제야 슬쩍 돌아본 홍유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면 됐어. ……수고했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러시아의 협곡으로 출발하는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