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114 서리 군주
아침이 돼 매머드를 잡기 위해 출발한 늑대는 머지않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름 울타리와 격벽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런 거로 놈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즉, 놈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 혹시나 누군가 놈에게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서이리라.
"느껴지나?"
울타리 안쪽을 잠깐 둘러본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매머드가 있었던 장소에 놈은 없다. 그야, 마음만 먹으면 이깟 울타리쯤이야 얼마든 부술 수 있을 터.
놈이 없다고 말하자 통역사가 그 말을 경비대에게 알렸고, 눈을 부릅뜬 그들이 놀람을 표하며 어딘가로 초조한 모습으로 전화를 걸었다.
"проклятый монстр……"
그게 무슨 뜻인지 당연히 알 턱이 없지만. 어투만 들어도 욕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하면 몬스터를 감시하고 있었겠지만 멸망한 유럽에 가까운 이곳은 이미 러시아가 버린 땅이나 마찬가지. 즉, 눈보라가 몰아치기까지 하는 이 땅에 이들이 머무르는 것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뜻.
체감 온도는 4월임에도 불구하고 영하 수십 도에 이른다. 이런 악천후에 놈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분명 발견한 것도 우연이리라.
"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거군."
강태준의 말에 늑대는 끄덕였다. 버려진 땅에 있었으니까. 위험이기는 해도 먼 곳에 있으니 괜찮다 여긴 것이리라.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경비대를 뒤로하고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늑대는 울타리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 갈 생각인가?"
"그래."
물론 강태준이 뛰어난 헌터인 건 사실이지만, 스퀘어 마스터가 쓰러뜨릴 수 없었다면 화산각룡과 엇비슷한 정도로 생각해야 할 테니 도움이 되진 않으리라. 도움이 필요 없기도 했고. 애초에 강태준의 역할은 절차의 확인과 감시에 가까운 것이지 전투가 아니었으니까.
놈을 쫓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도망친 게 아니다. 그 커다란 덩치가 움직인 이상, 반드시 흔적은 남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관조한 늑대는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
박살 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낭패한 이은하가 납작 엎드린 개구리처럼 바닥에 쓰러지자 누군가 한심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영 꽝이네."
이래서야 언제 마법을 쓰게 하겠느냐. 제대로 할 생각은 있는 거냐. 이따위로 할 거면 때려치워라. 핀잔 가득한 질타하는 말에도 기계적으로 "네.", "죄송합니다."로 일관할 뿐이었다. 맘 같았으면 한 대 쥐어박았으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가혹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왜? 차이니까 꿀꿀해?"
깜짝 놀란 듯 바닥에 눌어붙은 이은하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화들짝 놀란, 그러면서도 굳은 표정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홍유리는 실소하고 말았다.
"설마 알파가……"
"떠벌리겠어?"
자신이 바닥에 엎드렸단 걸 까먹었는지 붕붕 고개를 젓던 이은하의 뺨이 바닥에 부딪혔다. 하필이면 바닥의 틈새에 찝혀 아파라하는 모습에 홍유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에 얼빠져서 보고 있으면 재밌기는 하다.
"……티 났어요?"
"헤벌쭉하던데 안 나겠어?"
이은하는 혀를 빼내고 헤헤, 웃어 보였다. 무안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 모양. 나름 귀엽게는 보였지만 동시에 괘씸하기도 했다. 그 말랑 찹쌀떡 같은 볼을 잡아당기자 드러누운 그대로 질질 끌려 일어났다.
시선을 맞춘 그대로 홍유리는 눈을 좁혔다.
"근데 이게 어딜 남의 떡을 넘 봐?"
"그, 그게…"
"진짜 뒤지고 싶나."
볼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딱밤을 만들자 질끈 눈 감은 이은하는 충격이 찾아오지 않아 슬며시 눈을 떴다가,
"악!"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아픔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내 거야. 넘보지 마."
단호하게 끊는 말이 그럴 자린 없다고 끊어내고 있었다. 넘보지 말라는 말에 새삼 실감했다. 그녀와 알파가 연인이며 그사이에 끼어들 틈은 없다는 것을.
소율이도 말했었다. 절대 쉽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었고…… 그렇다고 답했었다.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알파와 함께라면 불만은 없을 테니까. 설령 다른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다. 전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해서.
그런데, 아니었다.
머리가 꽃밭인 생각이었다. 그런 거로 전부 행복해진다라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감정과 관계라는 건 그렇게 쉽지 않으니까. 소율이가 무슨 생각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마냥 좋아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리라.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팀장님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 정도가 아닐까. 자세한 내막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르고 추측하기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즉, 속내로는 어느 쪽이든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 그건 알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셋의 관계에 끼어들어봤자 누구도 좋아하진 않으리라.
"근데 왜? 부추겨져서?"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운 말에 흠칫거린 이은하는 고개를 흔들다 멈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뿐만은 아니다.
구해져서라는 뻔하디뻔한 이유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네버랜드에서 여태까지의 오해가 풀린 일이리라.
……증오했었다. 오해로 빚어진 엇갈림이었지만, 한때는 알파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어떻게든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실제로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억울하고 터무니없는, 선입견과 편견의 벽에 눈을 가리고 알파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도 알파는 복수하지 않았다. 소율이를 구하려 목숨을 걸었고 기회가 있었는데도 팀장님을 죽이지 않았다. 설령 미움받더라도 묵묵히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고결함. 괴물과는 가장 동떨어진 말. 하지만 다름 아닌 그런 괴물인 알파였기에 고결함은 도드라졌다. 그런 굳은 결의를 갖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렇게, 오해가 풀린 뒤 길을 잃은 증오는 동경으로 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영약을 받고 던전에 동행하고 환계에서 수련하며 알파가 여태 해왔던 일을 백록과 요정들에게 들으며 점점 더 알고 싶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백록도 요정도 환계의 그 누구도 한 입으로 모아 알파를 칭송했을 정도로 그저 올곧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가 스퀘어에, 자신은 환계에 남은 동안 동경은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변해갔다.
더, 더 알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어렴풋한 꽃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그때의 일이리라.
자신을 죽이고 죽여서 터무니없는 모습으로 변해 정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사적인 이유가 알파에게는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얼마 전에 우연찮게 들어 알게 됐다. 세베로모르스크에서 돌아올 때 들었던 지금도 실감 나지 않는 터무니없는 진실. 종말이 찾아온다―― 처음부터 알파가 보고 있던 건 자신들과의 마찰 같은 조그마한 게 아니었던 거다. 시야가 달랐다는 거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묵묵히, 고결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했다. 사선을 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말 목숨을 걸어 그 너머에 도달하려 한 참혹한 광경은 평생 뇌리에 남아 사라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 참혹함을 보고서 동경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했다. 그 정체를 깨달은 건 아까 들은 대로 부추겨져서. 아니, 소율이에게 말을 들어서였다.
부추겨졌냐는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참이나 다물고 있는 자신에게 흥미가 식었다는 듯 팀장님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아마 처음부터 흥미 같은 건 없었을지 모른다. 그냥, 확인이나 경고 차원이었으리라. 대자로 뻗어 누운 채 이은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알파는 뭘 하고 있을까 싶어서. 천장에 그 얼굴이 떠올라 그려졌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중요한 건 여태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니까.
***
―――괴물이 쫓아온다.
그건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불합리한 존작. 자신을 뒤쫓는 검은 괴물, 끔찍한 죽음.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데도 멀어지기는커녕 가까워지고 있다.
결국엔 붙잡히고 만다. 제법 오랫동안 이 근처에서 살았지만 저런 터무니없는 괴물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진작에 도망쳤으리라.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부수고 나아간 끝―― 거기엔 절망처럼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저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라는 것을. 따라서, 뛰어넘는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의 질주를 도움닫기 삼아 벽 너머까지. 다리에 가득 힘을 주고선 단번에 뛰어올라 아슬아슬하게 건너편에 내려서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이걸로 떨쳐냈을지 모른다. 가까스로 숨을 몰아쉰 순간, 놈은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밟고 있었다.
온다. 온다. 오고야 만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순간, 그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흉측하게 웃고 있었기에.
***
"……."
설마, 이 커다란 매머드가 협곡 너머로 뛰어오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과연 몬스터는 몬스터라고 생각하며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영량으로 그림자를 지배해 쓰러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과연 놈이 화산각룡에 필적하는 괴물인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체격과 스테이터스는 근접해있더라도 스킬에서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A등급 스킬도 없고 대마력이나 용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히 무식하게 커다랗고 B등급 냉기 지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디고 스퀘어의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이유는 알겠지만, 정말 고작 이런 녀석에게 스퀘어 마스터가 고전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문이었다.
"……."
정말 쓰러뜨리지 못해 자신을 부른 걸까 하는 의문… 하기야 아예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이 눈보라 속에서 놈을 찾기도 쉽지 않은 데다가 찾았다 한들 괜히 벌집을 쑤시는 거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예 이해 가지 않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리 군주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거창한 이름을 가진 놈. 일방적으로 쫓기만 해서 그리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먹을 보람이 있는 경험치였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되돌아가던 늑대는 묘한 위화감에 걸음을 멈췄다. 엉망으로 찢긴 철조망과 수많은 발자국. 여기까지 도망치느라 무리해서 달린 놈의 발자국……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발자국의 크기가 맞지 않는다.
거기에 늑대는 실소했다.
방금 자신이 먹어 치운 놈은 어쩌면 다 자라지 않은 개체일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허공에 투영된 거울 너머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의 대지가 드러난다. 거기에 검은 무언가가 재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마력을 조정하자 검은 무언가―― 희망에게 시야가 고정됐다. 종종 이렇게 가만히 그를 보고 있으면 정말 심심하진 않다. 상황을 타개하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눈부시게 보였으니까. 누구나 덧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희망은 언제나 그 덧없는 행동에서 그 너머로 나아갔다.
"……그래도 여기까지."
영혼에 남은 상처도 이젠 대부분 회복했다. 온전한 몸 상태로 돌아가는 건 이제 일주일이면 족하리라. 그러면 끝이 찾아오기 전까지 준비하면 된다.
소녀는 다시 해야 할 일을 점검했다.
흑린을 죽이고 신혈을 채취해 그 존재를 깨운다.
이 세계에 새로이 생겨난 법칙. 그 근간이나 마찬가지인 스킬의 주체가 되는 이. 종말의 이면이자 달리 진리라 불리는 것의 또 다른 이면.
단세혁과 잃어버린 자들이 멋대로 자칭하는 게 아닌 정말로 그렇게 불리었던, 지금은 잠든 시스템을 깨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존재의 힘이 있어야만 종말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