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115 서리 대군주
"왔군요. 그리고 마랑은……?"
겨울의 주인이 묻자 강태준은 끄덕였다.
"이미 출발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진을 돌려준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장애물만 없으면 능히 수 킬로미터 너머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지만, 저 짙은 눈보라 속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의 극한의 추위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마랑이라면 능히 처리하고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내가 늦었군요."
"괜찮습니다."
겨울의 주인은 하얀 입김을 뱉었다.
"……."
알릴 말이 있어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마랑은 이미 출발했으니까. 그리고 설령 사진 속의 괴물이 새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들 지금의 마랑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할 테니까. 다만 조심하라는 말 정도는 알릴 셈이었건만…….
***
깨진 얼음과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압도적인 중량의 발자국. 곳곳에 널린 흔적을 따라 더 먼 길을 걸었을 때, 늑대는 바위산처럼 커다란 몬스터를 보았다.
갑주를 두른 매머드가 서리빛 상아를 든 채로 정면을 직시한다. 위풍당당한 놈의 주변으로부터 더 강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질병은 물론이고 화산각룡보다 커다랗다. 물론 바다의 재앙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작은 산처럼 느껴진다.
압도적인 존재감. 시끄럽게 울리는 대지. 만만치 않은 괴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앞선 매머드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사실. 하지만 놈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서리 대군주]
[체장 255.9m] [체고 167.5m] [체중 5.2kt]
[힘 603] [민첩 512] [체력 837] [마력 453]
스테이터스를 본 감상은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 다만, 그 무식한 체력이 어지간한 재앙을 넘어서 있을 뿐. 겨울의 주인이, 러시아가 도움을 청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쓰러뜨리기란 요원한 괴물임은 사실이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네들의 입장일 뿐이다.
힘은 그럭저럭이나 민첩은 턱없이 부족하고 마력에 이르러서는 논외. 늑대에게 있어 놈은 그저 덩치 큰 샌드백에 불과해보였다. 거대한 서리 매머드로부터 극빙의 대지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 4월이라고는 믿기 힘든 혹한은 바로 놈에게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서리 군주가 가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냉기 지배. 거기에 더해 A등급 스킬인 극한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앞에 선 순간, 놈은 자신을 귀찮은 벌레라도 쳐내듯 기다란 코를 휘둘렀다. 밀려오는 풍압에 실린 싸늘한 눈보라. 몸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 남극보다도 더 차갑게 분명 이곳의 기온은 영하 세 자릿수를 넘기고 있었다. 이 극한이야말로 놈을 쓰러뜨릴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리라. 과연 체감온도는 얼마나 낮을지.
맞서 겁화를 일으킨 늑대는 자신을 쳐내려 흉흉하게 날아오는 코에 올라타 물어뜯었다. 바위를 씹은 듯한 감각. 놈이 가진 B등급 바위 가죽의 탓이었다. 다만,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공허 앞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이빨에 씹어 먹힌 매머드는 예상치 못한 고통에 높은 울음을 토해냈다.
거기에 이어지는 건 몸부림. 발을 구르고 제멋대로 뛰어다니더니 이곳저곳을 코로 때리기 시작한다.
산과 나무가 엉망진창으로 변하고 얼어붙은 대지가 크레바스처럼 깊게 갈라졌다. 새삼 놈이 괴물이란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그래봤자 늑대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새가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듯 새삼 낭떠러지를 두려워할 리 없었으니까. 발을 구를 때마다 새로운 무저갱이 생길 정도였지만, 그 충격이 전해지는데도 늑대는 굳건히 버텼다.
체격의 차이가 있어 정면에서 맞붙는 건 힘들겠지만 스테이터스에서 압도하는 이상 충분히 감안할 만하다. 그 충격으로 내부가 진탕되는 것보다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까.
충분히 괴물이라 불릴 만한 상대였지만, 스테이터스에서 웃돌고 있으니 이렇게나 상대하는 게 편하다. 새삼 그 우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실감하게 된다.
까놓고 말해서 심안으로 수를 읽을 것도 없이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미 늑대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커다란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A등급 스킬 극한. 그 외, B등급 3개. C등급 2개. D등급 4개. E등급 4개. 스킬의 구성도 그리 대단치 않다. 탐색전은 필요 없다. 아니, 이미 끝마쳤다고 해도 좋으리라.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이글거리는 마력이 끓어오르는 동시에 붉어진 늑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마정이 펌프질하고 한껏 들이켠 숨이 용혈을 타고 혈관을 지나 산소를 운반해 세포 하나하나에 담긴 에너지를 연소하기 시작했다. 힘으로 코에 달라붙은 그대로 발톱을 세워 힘준 순간 늑대의 힘줄과 근육이 꿈틀거리며 부풀어올랐다.
"―――!!"
그러자 가죽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B등급 스킬으로 막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공허와 같은 스킬조차 두르지 않고 그저 원초적인 폭력을 휘두를 뿐인데도.
커다란 코를 휘저으며 몸부림치는 매머드. 높은 고음을 뱉으며 어떻게든 떨어뜨리려 하지만 늑대는 끈질기게 들러붙었고, 결국 기다란 코가 바닥에 떨어지며 얼음을 깨부쉈다.
한기가 피어오른 순간, 매머드의 머릿속에 들어찬 생각은 도망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짧아진 코를 갈무리하며 늑대가 떨어져 가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 찢어진 코와 함께 추락해야 했을 늑대는 발판을 밟고 탄력을 발해 뛰어올랐으니까. 매머드의 눈에 두려움이 차오른 순간, 두 눈이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매머드는 공포에 떨어 발악해 달렸고, 눈을 잃어 앞의 절벽을 보지 못했다. 그 아래는 무저갱과 같은 한없는 낭떠러지. 아무리 매머드라 한들 떨어지면 무사하긴 어려우리라. 끝도 없이 추락하기 직전, 매머드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오싹한 열기가 앞을 막고 있다. 눈이 없어도 알 수 있다. 가죽이 타오르는 것만 같아 매머드는 침을 삼키고야 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낮게 끓는 울음이 전신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매머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지고 있는 스킬을 한껏 사용하는 최후의 발악뿐이었다.
포식자에게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
[좀 더 생각해볼게]
메시지를 전송한 이은하는 빨대를 입에 물고 가만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리고 꼭 셋의 관계에 끼어들어야 하는지.
넘보지 말라던 팀장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나 알파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반대로 자신은 어떠한가. 팀장님처럼 연인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율이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바람은 다 같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거였으니까.
그래. 다 같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면 이 마음은 틀린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괜스레 끼어들어 방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마음은 고이 접어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쓰라려 왔다. 입안에 쓴맛이 감돌고 싫은 감정이 차오른다. 적어도 자신이 알파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 뜬금 없이 웃음이 나왔다. 사실, 진작 했어야 할 고민을 막연한 생각으로 미뤄둔 거였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나는 정말 셋의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끼어들고 싶은가. 그리고 정말 다 함께 행복할 수 있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어느새 내용물인 커피는 다 마신 뒤였지만 자각하지 못한 채 빨대를 계속 물고만 있었다.
***
차디찬 극한의 추위가 몰아쳐 대기 중의 수분을 얼리고 구성요소를 바꿔 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단 한 줌의 싸늘함조차 닿지 못한 채 덧없이 사라지고야 만다. 붉은 마랑의 위에 덧씌워진 아지랑이와 검은 불꽃의 격은 서리 매머드가 가진 극한의 격보다 높은 데 있었으니까. 애초부터 싸움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쓰러뜨리는 데는 역시 제법 시간이 걸린다. 방어에 특화한 스킬과 무식하리만치 높은 체력 그리고 천연의 갑주를 둘렀기 때문에.
단단하고 질긴 샌드백- 그 감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 이 정도라면 가죽을 벗겨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홍유리나 백소율……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왕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순간, 이은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홍유리는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여전히 자신에게 얼간이 같은 부분이 남았음에 실소가 나왔다.
……일단 나중에. 지금 당장은 놈을 쓰러뜨리는 걸 우선시해야 한다. 발톱과 이빨에 물어뜯겨 자잘한, 혹은 깊은 상처가 하나 둘 늘어나고 서리빛의 매머드는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상아도 수많은 흠집과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 하얀 뼈가 드러났을 때, 서리 매머드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상처 때문이 아니다. 그건 어떠한 현상. 맷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마력이 늑대의 잠식에 빼앗기며 정신고갈의 전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 눈에 띄게 느려진 움직임은 이젠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마침내 눈보라가 멎고 거대한 괴물이 지면에 몸을 뉘였다.
그렇게 싸움은, 아니 사냥은 다소 허무하고 또 일방적으로 끝을 맺었다.
***
시간이 흘러 늑대가 돌아오자 강태준은 눈짓으로 물었다. 사실 돌아왔다는 점에서 결과는 보나 마나 한 것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두 마리 다 처치하고 왔다."
"……두 마리?"
의문 섞인 물음.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것에 강태준은 잠깐 겨울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일의 경위를 묻자 그녀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랬군요. 확신까지는 아니었어요. 저 너머는 미처 탐사하질 못했으니까."
극한. 놈에게서 비롯된 추위 때문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혼자 탐사할 수는 없었을 터. 늑대는 가만히 끄덕였고 강태준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발자국을 봤죠. 그리고 사진 속의 개체가 성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늦었다고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납득한 강태준은 그 말을 곱씹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의심이 가는 거라면 적어도 사전에 알렸어야할 테니까.
"미안해요."
여전히 숙인 고개. 그러나 늑대는 담담하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괘씸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뜻하지 않은 득을 본 느낌이었으니까.
"대신 보수는 추가로 지급하겠어요.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는 없군요."
거기에 강태준은 의문을 가졌다. 보수의 추가 지급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그린란드에 고립돼 뒤늦게 들었던 수색대의 일부터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구축함에 올라탔던 건 사진 속의 괴물- 아니, 그 성체를 쓰러뜨리기 위해 도박을 했다고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아니, 사실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역병과 질병에 함께 맞섰을 겨울의 주인이 알파의 성품을 모를 리 없을 터. 도움을 청했다면 기꺼이 응했으리라. 그런데 겨울의 주인은 왜 그러지 않았을까. 또한 스퀘어 마스터의 신분인 그녀가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물론 조국에 애국심을 가질 수는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마치 어딘가에 정신 팔린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
강태준의 의문 섞인 눈빛에, 묻지 않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 감사를 표한 그녀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석연치 않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긴 채로.
***
[최후의 희망(재를 거두는 자) Lv.77]
두 마리를 먹어치우고 6레벨이 상승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라 만족스러웠지만, 아직이다. 여왕은 자신이 조만간 초월의 영역에 발 디딜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을 그녀의 기준에서 조만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신뢰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번 사냥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분명 자신은 강하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기도 하다. 종말에 맞서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고 강한 몬스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단 생각해둔 건 있다. 진작에 버린 땅에 불모지가 됐을 그곳이라면 충분한 몬스터가 자생하고 있을 테니까. 대륙 하나를 완전히 쓸어버리면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늑대는 반대편에 있는, 보일 리 없는 머나먼 대륙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