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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66화 (266/407)

〈 266화 〉 #116 돌입

돌아온 늑대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홍유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이미 어둑해져 집으로 곧장 돌아왔기 때문에.

"……뭐야. 진짜 갔다 온 거 맞아?"

믿기 어렵다는 듯한 눈에 늑대는 끄덕였다. 예상보다 빨리 돌아와 보이는 반응인 듯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구를 일주해봤자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즉, 자신이 빠른 것일 뿐이다.

"뭐해? 안 들어오고."

알딸딸한 술 냄새, 혼자 맥주캔을 뜯은 모양이었다. 이미 굴러다니는 캔이 무안한지 눈을 돌리면서. 촉수를 뻗은 늑대는 말없이 캔을 구겨 정리했다.

"아, 어차피 나중에 치운다니까."

늑대는 가만 끄덕거렸다. 실제로 마시고 치우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넓은 방이라도 캔이 굴러다니는 건 찜찜해서 정리하는 것뿐이다.

"한 잔?"

캔을 내미는 홍유리를 가만 바라보던 늑대는 가만히 받아들었다. 아무리 마셔봐야 취할 리가 없겠지만, 자신이 마시는 만큼 홍유리는 덜 취할 테니까. 어쩌면 독 내성을 얻은 이유가 술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시는 타입이기도 했고.

"……그래."

원래 세계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브랜드의 맥주였지만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마셨지만, 거의 들이붓는 수준이었다.

TV로 튼 영화는 웬 공포 영화. 심지어 21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는데, 21세기를 뜻하는 건가 했더니 21번째 시리즈라는 게 믿기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홍유리는 무서워하긴커녕 깔깔 웃으며 캔 속의 내용물을 들이 마셔갔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헌터로 뼈가 굵은 데다가 환계의 던전에서 보았던 음산한 숲의 괴물도 비슷한 분위기였으니까.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좋아라하는 홍유리. 어쩌면 이런 게 그녀가 원하는 일상인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머리칼을 쓰다듬고 말았다.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려 자신을 보며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냥이라고 답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가 손끝에 올올이 흩어진다. 그녀의 옆에서 TV 화면을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데 왜 공포 영화를 보는 건가 하고서.

"뭐…… 그냥?"

물어보니 정작 그녀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근데 왜? 쫄아서 안겨주기라도 바랬냐?"

말과는 반대로 자신을 끌어안은 홍유리의 웃음이 진해졌다.

"하여간 귀여운 구석 있다니까. 응?"

"……."

"왜? 안 그래서 아쉬워?"

히죽거리는 태도가, 볼을 잡아당기는 행동이 대놓고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마치 꼬드기는 것만 같은 모습에 늑대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울상짓게 만들어보고 싶다고.

강태호나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이따금 홍유리는 사람을 부추기고는 하니까. 까놓고 말해서 괴롭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거다.

……애써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별일은 없었나?"

"별로. 왜?"

겨우 하루인데 무슨 일이 있겠냐며 족발을 까먹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미 카레와 라면을 비롯해 제법 먹은 뒤였다.

대식가 같은 게 아니라 헌터가 소비하는 에너지가 많으니 일반인보다 많이 먹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건 이해하고 있지만 저 작은 몸 어디로 전부 들어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늑대는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먹어서가 아니라, 먹고 있는 음식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바로 순한 맛이라는 점.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히…… 딱히 매운 걸 먹은 걸 본 적은 없다. 깔깔거리는 홍유리는 TV를 보느라 늑대의 눈이 붉게 빛나는 걸 보지 못했다.

영화는 곧 클라이맥스에 다다랐고, 별다른 내용 없는 진부한 엔딩이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지 끄덕거린 홍유리는 소파 위에 완전히 몸을 뉘었고 덕분에 옆으로 누워 서로를 바라보게 됐다.

"……."

잠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코끝에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떼 졌다. 가벼운 버드키스. 늑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홍유리는 픽 웃었다.

"원래 같았음 시끄러웠을 건데."

"……."

대놓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달려들기도 하니까. 단둘만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까 허전하다……."

그래. 페리의 이야기. 우화하는데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오래된 용이 이전에 말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그럼 이번에 페리가 원하는 모습은 어떠할까.

"완전히 바뀌면 어떡해?"

"어떤 식으로."

"종종 그런 거 있잖아. 옛날이야기 같은 거. 동물이 사람 된다거나."

잠깐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두 팔 벌려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웬 꼬마의 모습. 하지만 그러다 위화감이 생겼는데, 페리의 성별이었다. 늘 함께 지내고 다른 요정용들도 많이 봐왔지만 그네들의 성별을 구분할 방법이 없으니까. 생식기나 특징 같은 게 없다는 뜻이다. 같은 종이라도 개체마다 외견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도 했고. ……물론 행동거지를 보면 대충 짐작은 가지만.

"어떻게 될라나 모르겠네."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놀라게 해주겠다는 건지. 머잖아 돌아올 페리를 기대하며 취해 곯아떨어진 홍유리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그 곁을 지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

[그런가요]

이은하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고백한 사실이나 또 그걸 거부했다는 말을. 그런데도 백소율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이은하의 등을 떠민 건 그녀라는 뜻이다.

"왜 그랬나."

그래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동거하는 건 아니라지만 마음은 통하고 있다 여겼으니까. 그녀가 자신에게 짙고 무거운 사랑을 주는 대신, 자신 또한 그녀에게 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은하의 등을 떠민 건 무슨 일인가 하고서 늑대는 그 이유를 물었다.

[돕고 싶었어요]

"돕고 싶었다고?"

[계기만 줬을 뿐이에요. 선택한 건 은하 언니고요]

"……."

[늦든 빠르든 분명 그랬을 거예요]

그건 사실이다. 이은하의 맘이 변치 않는 한 언젠가는 고백해왔으리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이은하가 직접 고민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머리로 직접 생각하고 말했어야 한다.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조용히 물어오는 말. 늑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

"……구태여 말하겠다."

대답 대신 들려온 건 헛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설령 네가 원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은하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다. 바보 같았던 지리산에서 있었던 일조차 자신에게는 도움이 된 일이었으니.

"홍유리나 너 때문이 아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 조금 낯간지러운는 말이지만 사랑이란 건 이런 게 아닐 테니까. 일방적인 그녀의 마음을 받아봤자 돌려줄 수 있을 리 없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선을 긋는 게 나을 거라고 늑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가요……]

어떤 대답이 오기를 바랐던 걸까. 기뻐 보이기도 했고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단호한 답을 듣고서 백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은하와의 문제는 자신이 직접 풀어갈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이미 두 명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니까.

……마냥 쉽지만은 않을 거다. 결국, 이은하가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계속 그녀를 밀어내게 되리라. 그건 백소울과 마찬가지로 상처입히게 된다는 뜻이다. 이은하를 사랑하진 않는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

아침이 밝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으로 하루를 보냈다. 술에 쩔어 힘겹게 일어난 홍유리가 비틀거리며 출근하고 강태준과 함께 타국의 요청을 받아 몬스터를 먹어치우기 위해 이동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치와 여전히 한참이나 먼 길. 거기에 새삼스레 생각한 늑대는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이대로는 시간을 맞추지 못할 테니까."

한시라도 빨리 초월의 영역에 다다라야 한다. 더 이상 여유롭게 있을 시간은 없다는 거다. 대륙 하나를 쓸어버리면 아마 최대 레벨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프리카- 이미 버려진 대륙. 그린란드와 마찬가지지만 극한의 땅인 그곳보다 훨씬 더 상황이 열악할 거라 여겨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던전이 나타나고 5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불모지. 따라서 그곳의 상황이 지금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한 달 내로 전부."

지금의 자신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 잠도 자지 않고 달려야 할 테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게 최소한의 조건일 테니까.

종말이 찾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늦지 않고 시간을 맞춰야만 한다.

***

홍유리와 백소율을 비롯한 이들에게 아프리카로 갈 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따라가겠다고 고집부리던 홍유리는 종말이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과 자신이 방해밖에 되지 않을 거란 말에 입술을 씹으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자신의 고집과 세상의 존망을 저울에 올려놓을 순 없는 법이었으니.

"갔다 와."

끄덕인 늑대는 아침이 돼 아프리카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떠나기 전에 페리를 보고 가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고치 속에서 고동치는 페리. 돌아왔을 땐 분명 페리의 우화도 끝나 있으리라. 고치 위에 손 올린 늑대는 실소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지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니 이렇게 궁상떨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러고 있는 것보다 얼른 초월에 다다라 돌아오는 게 나으리라.

"떠날 거니?"

여왕의 물음에 늑대는 끄덕였다.

"미안하구나."

속눈썹을 내리깐 그녀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였고 그 뜬금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니었다면, 아이들은 널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그녀가 받아들인 정수에 관한 이야기. 삶을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 스며드는 것을 택한 그녀의 아이들. 여왕의 물음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부터 정수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도우려 한 건 여왕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만상의 주인을 물러나게 할 수도 없었을 거다.

오히려 그 덕에 흑호의 정수를 갈무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 초월에 필요한 업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분명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그리하여 늑대는 한 점 흐림 없는 눈으로 여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가, 너는 정말……"

긴 숨을 내쉬는 그녀. 더 오가는 말은 없다. 즉, 이젠 출발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프리카를 향해서- 늑대가 바람을 두른 채 순식간에 떠나가자 여왕의 곁에 있던 백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예전의 어리숙함을 전부 벗어던지고서 이제는 자신보다 아득히 빨라진 늑대. 심지어 저게 진심으로 달린 건지조차 알 수 없다. 강해졌다고는 물론 알았지만 힘의 차원이 다르다.

완전한 별격의 존재―― 마치 이전의 여왕처럼.

그러던 백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별격의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이제 가자고 그렇게 말하려던 백록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여왕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여느 때와 같이 태평한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보고 있음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

아무도 보지 못한 공간의 일그러짐. '누군가가 억지로 열어젖힌' 차원의 틈새가 여왕에게만큼은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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