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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68화 (268/407)

〈 268화 〉 #117 불모지 (2)

"……?"

묘한 위화감에 이은하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거기 있는 건 하늘이 아니라 수련실의 천장. 잠깐 멍하니 있던 그녀는 지척까지 다가온 뜨거운 열기를 느끼곤 기겁해 몸을 굴렀다.

"아, 정말 비겁하게!"

"누가 한눈팔래? 그러다 뒤져도 모른다?"

"조금 기다려주실 수도 있잖아요!"

소리친 이은하의 손끝에 사슬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불길 너머로 빠져나갔다. 코웃음 친 홍유리가 막아내려 했을 땐, 이미 두 번째 수. 마력을 구현한 뒤였다.

무수한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불길을 짓누른다. 마른 모래에 타오르는 불길이 짓눌리자 홍유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 어디 원숭이도 아니고 매번 같은 방식에 당하진 않으리라.

다만, 한 가지 어설펐던 점은.

"그게 진짜 모래도 아니잖아."

성질과 형태는 따라 했어도 그래봤자 마력으로 구현한 모방, 가짜. 그 본질이 마력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거세진 불길이 모래를 흉내 낸 마력을 전부 녹여버리곤 쇄도해오는 사슬을 뒤쫓았다.

괜찮다, 이은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슬이 닿는 게 더 빠르다. 불길은 늦어 도착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 순간, 붉은 마력이 홍유리로부터 솟구치듯 일어나 사슬의 앞을 가로막는 벽으로 화했다.

성질도 형태도 변화하지 않았지만,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마력. 무슨 발버둥을 치더라도 사슬이 닿을 리는 없으리라. 여태까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 즉,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다.

괜찮다는 건 그런 의미. 처음부터 사슬은 미끼에 불과했으니까. 어느새 커다란 말뚝 서넛이 천장 위에 달라붙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낌없이 담은 마력. 아주 일순간만이라도 좋다. 붉은 마력을 뚫고 닿을 수만 있다면……!

힘차게 팔을 내리친 순간, 그 동작에 따라 말뚝이 하강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사슬은 전부 녹아내린 뒤. 주먹을 쥐어 공간을 왜곡하고 말뚝이 떨어지는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순간, 홍유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진작 알고 있던 거다. 자신이 몰래 준비하고 있었단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도 상관없다는 듯 기회를 준 거다.

붉은 눈에 담긴 말뚝이 점점 커진다. 크기를 부풀리는 게 아니라 그만큼 가까이 왔기에. 그리고 붉은 마력과 충돌하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 마력의 질에서 한참이나 격이 다른데 마력으로 싸워봤자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역시 이번에도 같은 결과――

"Explosion."

그럴 리 없다. 구태여 입으로 뱉은 주문은 폭발을 상징하는 것. 홍유리의 지척에 다이너마이트라도 터뜨린 듯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마력이 일렁이고 흔들린다. 아무리 대단한 마력이라 한들 미동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러나 고작 그것뿐. 잠깐의 술렁임이 끝이었다. 거기에 이은하는 안심했다. 혹시라도 폭발에 그녀가 상처 입지는 않을까 했지만 건방진 기우였던 모양.

"끝?"

태연하게 묻는 말소리가 얄미워 볼살을 씹은 이은하는 두 팔을 내려놓았다.

"뭐야, 싱겁게. 이게 끝이야?"

더 발악하라고. 어차피 더 구를 때까지 안 끝난다는 말에 도리도리 고개 저었다.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거면 충분하니까. 팔을 든 이은하는 홍유리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거기요."

왜, 뭐가 있나? 말뚝은 전부 불태웠는데……? 고개를 들었을 땐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천장이 거기에 있을 뿐.

이게 지금 사람 놀리나? 눈을 부라리고 이은하를 노려보던 홍유리의 귓가에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렸다. 그건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에 닿은 소리. 황급히 눈을 돌리자 바닥에 떨어진 건 조그맣디조그만 파편이었다. 곧 그것마저 힘을 잃고 마력의 잔재로 변해 사라졌지만, 홍유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아무 의미 없는 조그마한 파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서 떨어졌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은하의 마력이 자신에게 닿았다는 거다.

하지만… 어떻게?

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아까의 폭발. 그 작은 술렁임과 요동침에 마력이 흔들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거다. 그렇게 처참히 타오르던 말뚝이 기꺼이 자신의 마력을 뚫어내고 파편으로나마 닿았다…… 홍유리는 가만히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이를 드러내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떠냐는 듯 이은하가 묻자 천천히 끄덕였다.

납득할 수밖에 없다. 본래라면 성립할 리 없는 이 싸움의 두 가지 전제. 자신에게 영창화한 마법을 사용하게 하거나 어떻게든 닿을 것. 후자의 조건을 훌륭히 성공시켰으니까.

물론 조금 너무 방심했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좋아. 성공."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방 뛰며 좋아라하는 모습에 실소했다. 며칠씩이나 실패하고 두들겨 맞았던 주제에 고작 닿은 것뿐인데 그렇게나 좋을까.

"이제 다음은… 좋아. 나한테 마법 쓰게 하는 걸로."

아까 말했던 전자의 조건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검게 죽은 이은하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훨씬 더 어려운 나머지 하나의 조건. 그걸 뭐 대체 어떻게 하라고?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응징하듯 딱밤이 날아왔다. 이마를 감싸 쥔 이은하가 데구루루 구르고 있을 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홍유리가 물었다.

"근데."

"――?!"

물어보려다 도저히 그럴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 바닥을 구르는 게 멈출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고개는 왜 들었어?"

"아으. …네?"

"아까 한눈팔았잖아."

"아, 그거요."

여전히 이마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이은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위화감이 조금…"

"왜? 건축 자재라도 빼돌렸을까 봐?"

이은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뭔가 더 커다란 스케일의 묘한 위화감이었는데……

"하늘이 갈라지는 느낌?"

"뭐래."

"우주가 막 이렇게……!"

양손을 마구잡이로 헝클어 휘젓는 모습에 홍유리는 다시 실소했다. 하기야 얼빠진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아무튼, 다음엔 그거야."

아까 말했던 조건을 들이밀자 이은하는 무겁게 끄덕였다. 할 수 있냐 없냐가 아니라 어차피 할 때까지 시킬 게 분명하니까.

"근데… 혹시 성공하면 소원 같은 건 들어주시나요?"

"소원?"

"동기부여를 위해서……?"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며 홍유리는 코웃음 쳤다.

"이게 뭐 나 좋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대로였기에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종종 속 시원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알기 쉽게 침울해진 얼굴에 홍유리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원래 자신이 이렇게 물렀나 싶어서.

"그래. 들어나 보자. 소원? 무슨 소원."

퉁명스러운 말에 화색을 띤 이은하가 무어라 말하기 시작하자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올린 홍유리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네? 제발요. 제발! 네?!"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손을 잘근잘근 짓밟으면서.

***

양과 질 양면에서 풍족한 사냥터. 여태 본 적 없는 몬스터도 많다. 네버랜드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그 아랫급 정도는 된다고 볼 수 있었다. 원체 발이 닿지 않은 곳인 데다가 환계가 붕괴해 그곳 던전의 몬스터까지 더해져 가히 마경이라 불릴 만한 장소였다.

사막 근처를 지나며 전갈을 보았으며, 모래 속에 헤엄치는 상어 같은 기괴한 몬스터들도 보았다. 그리고 사막을 벗어났을 때, 늑대는 묘한 세력 구도를 발견했다. 그건 사자와 트렌트의 무리. 그리고 강의 악어 무리와 개미들의 군세였다. 당연하지만 진짜 동물들은 아니었고 세력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들. 의외로 가장 큰 세력은 개미들이었는데, 군세라고 불리고도 남을 만한 머릿수가 위용을 발했다. 한 마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백 마리 천 마리가 희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가 그 무기였다.

작고 많은 개미―― 늑대의 눈이 그 실체를 꿰뚫어 보았다.

[레기온 엔트]

[체장 1.6cm] [체고 0.2cm] [체중 0.06g]

[힘 28] [민첩 36] [체력 96]

[보유 스킬]

[약한 마비독(E)] [미약한 독 내성(F)]

보통 개미보다 조금 더 크긴 하지만 별 차이는 없다. 평범한 개미의 외형에 머리 중앙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모르는 이들은 놈들이 몬스터란 생각조차 하지 못하리라. 일단 평범한 개미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스테이터스. 어쩌면 놈들이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오면 새로운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동안은 역병의 오염 때문에 건너오지 못한 듯싶지만 요정용들이 오염을 제거하면 그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물론, 개미의 숫자가 많고 압도적이라지만 다른 세력이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건 아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약하기에 사냥하기 위해선 둘러쌀 필요가 있는데 그 전에 도망치면 되니까.

당연하게도 늑대 자신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도리어 놈들을 전신에 붙이고 자신을 공격하게 내버려 뒀을 정도로. 자해가 아니라 아직 D등급인 독 내성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볼 사람도 없으니 본신을 드러내고 정신체로서 몸의 면적을 최대한 늘려 많은 개미에 둘러싸인 채 늑대는 사자 무리를 향해 걸었다.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경계하는 듯하더니, 살기를 드러내자 딱딱히 굳어 꼬랑지를 말았다. 담력 있는 놈들은 그렇게 도망쳤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도망친 놈들에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 자신의 위협에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정말 뛰어난 몬스터라는 증거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와해된 무리가 상대가 될 리 없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서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전부 늑대 자신의 경험치로 화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79 → Lv.80]

고대하던 80레벨. 조금 기대는 있었지만, 역시 최대 레벨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미미하게 업을 획득하기도 했는데 환계의 던전에 있던 몬스터를 먹어치워 멸망 확률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업 132.9% → 133.73%]

여태까지 1%. 자잘한 수준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감지덕지. 주변을 쓸어버린 늑대는 강으로 건너갔을 때, 아까 도망치던 사자들이 악어에게 공격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혼비백산해 정신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강 너머로 건너면 도망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망친 것에 감탄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한계였던 모양. 악어의 배를 불리는 사자들을 보고서 늑대는 강 위에 발판을 만들어 올라탔다.

물속으로 들어가도 상관없겠지만, 그랬다가는 혹시라도 개미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니까.

입 벌린 악어들이 겁 없이 달려들자 마력을 일으킨 늑대는 그것들을 쏘아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B급 몬스터를 아래로 깔아보는 놈들이었지만, 바꿔 말한다면 고작 그 정도라는 거다.

머잖아 강 속의 악어는 자취를 감췄고 늑대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여전히 C등급에서 움직일 기미가 없는 만복. Lv.9 최대 레벨에 도달한 그대로 다음 등급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바다의 재앙을 먹어치웠을 때도 마찬가지. 처음 포식이었던 잠식은 B등급이 됐지만, 소화였던 만복은…… 역시 단순히 먹어치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필요한 모양. 문제는 그 조건을 모르겠다는 거였다.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해서 가능한 거였더라면 진작에 도달했으리라. 무언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게 마냥 쉽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 덕분에 강한 직감이 들었다.

만복이 최대 레벨에 도달해 다음 등급으로 넘어가면 잠식과 함께 또 다른 A등급 스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사자와 악어에 이어 작은 숲을 이룬 트렌트들을 전부 먹어치울 때까지 늑대는 멈추지 않았고, 역시나 만복의 등급은 오르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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