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118 선고
[독 내성(D)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독 내성(D) Lv.8 → 독 내성(D) Lv.9]
개미들이 가진 마비독이 강하지 않았기에 숙련도가 오르는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머릿수가 깡패라고 꾸역꾸역 어떻게든 올라가고 있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마력으로 몰아낼 수 있지만 아주 미미하게 몸이 제한되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사자에 악어까지 전부 정리하고서 뒤를 돌아봤을 땐, 여전히 제법 많은 몬스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륙 하나가 몬스터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새삼 실감이 들었다.
경험치는 빠르게 차오르지만, 이 기세도 점차 줄어들 터. 좀 더 강하고 많은 몬스터를 필요로 한다. 아니, 경험치 만이 아니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차피 먹을 거라면 그들의 정수를 취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부분이 아쉽게 느껴졌다. 어디 하나 남기지 않고 집어삼켜도 보유한 업에는 변화가 없으니까.
어쩌면 이들이 멸망의 일부로 나타난 것일 뿐이기에 정수나 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정수까지 회수하고 싶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리라. 그도 그럴 것이 흑호는 환수들의 정수를 취했을 테니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잃어버라 자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업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즉, 그럴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있다는 것이리라.
아쉽게도 받아들인 흑호의 기억 속에서조차 그 방법을 읽을 순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해가 뜨고 하루가 지났지만, 수면과 휴식에 의미가 없는 이상 쉴 필요는 없다. 상관없다는 듯 나아간 늑대는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그러면서도 탐욕스럽고 게걸스레 몬스터를 먹어치워갔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
비슷한 시각, 이은하는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느껴진 위화감. 어쩐지 저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는 터무니없는 불안. 팀장님도 소율이도 몰랐다. 미친 척하고 환영의 나비님에게도 떠보듯 물었지만 아무도 느끼지 못한 것만 같다.
기우라고 그렇게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냥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그러나 지금도 선명하게 가려진 하늘. 회색으로 변하고 군데군데가 엉망으로 찢어져 있었다. 혹시 정신병의 일종은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알파였다. 하지만 지금 없는데 상담에 응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혹시 몰라 전화라도 걸어보려 했지만, 권외 지역이라 받지도 않았다.
뒤늦게 물어보니 아프리카로 갔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났지만, 돌아보면 그게 맞다. 우연히 만나 알려주는 거라면 모를까 굳이 찾아와서 알려줄 필요는 없는 사이. 그게 알파와 자신의 관계였으니까…….
하물며 저번에 했던 고백으로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 데다가 보더라도 예전처럼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을지도…… 어쩌면 이렇게 말 없이 점차 멀어지는 건 아닐까.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 싫어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은 채였지만 포기하기는 싫다.
그래도 그런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저 회색으로 변한 이상한 하늘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왜 저렇게 됐는지. 왜 자신만 볼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마침 그 의문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은하는 고개를 돌렸다.
"아……?"
거기에 미처 떠올리지 못한, 그리고 아마도 유일하게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
여기는 쉽게 지나갈 수 없다.
온통 막혀있는, 공간 자체가 단절된 곳. 차원과 차원까지는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물리적 거리는 의미가 없다. 광년 단위로 떨어져있으니 사람의 걸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이곳에서 벌써 며칠째 헤메고 있었지만, 이 곳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내질 않는다. 고즈넉한 성에서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환계가 잃어버린 여신의 영역이었다면 이 땅은 그녀의 것.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쳐봤자 벗어나는 건 힘들다. 영락했던 여신과는 달리 그녀는 온전한 존재였으니까.
그 존재도 정체도 기원도 밝혀지지 않은 검은 도깨비불. 다만, 자신이 아는 거라곤 본래 그녀가 타차원의 존재였을 거라는 점. 그리고 강한 감정에 이끌리고 그걸 탐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
그녀는 자신이 오는 걸 반기지 않는다. 손을 들어올린 순간, 마력이 피어올랐으나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렇게 제한받는 느낌은 언제 이후였던가. 정말 오래간 느껴보지 못했다. 대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 여기에 온 게 정답이었다고 느꼈다.
막혀 도달하지 못한다면 뚫어낼 수밖에 없다.
소녀는 한껏 마력을 일으켰다. 셀 수 없는 시간동안 모은 무한에 가까운 정련된 마력이 세계를 뒤덮었다.
***
뙤약볕이 내리쬐는 땅. 기약없는 사막. 그 면적만 무려 900만km²를 훌쩍 넘기는 지구 최대의 사막, 사하라.
한번 훑고 왔었지만 여전히 많은 몬스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척박함을 증명하듯 곳곳에 뼈와 조각들이 모래 속에 깊게 파묻혀있었다.
죽은 몬스터의 것도 있었지만 비교적 생생해보이는 것도 있었다. 사막과는 어울려보이지 않았는데 환계 붕괴로 인해 이곳에 떨어진 몬스터가 아닌가 여겨졌다.
환계에는 태양이 없으니까. 하늘 대신 떠 있는 거라고는 에메랄드빛 바다. 온도의 변화조차 있을 리 없는 공간이었으니. 설령 사막이라 한들 같은 사막일 리 없다는 거다.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 게 당연하다. 담담히 끄덕인 늑대는 그들의 시신을 그림자속에 갈무리했다. 온전하지는 않다지만 그것만으로도 경험치가 될 테니까. 쉬지 않고 레벨을 올려도 여전히 초월의 길은 멀고 멀다.
아니, 올리면 올릴수록 강한 직감이 들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뭔가 다른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령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다고 한들 그 너머로 도약하게 해줄 업이 부족하다.
"……."
이미 몇 번이나 해왔던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으니까.
'왜? 정말 없어?'
그리고 그런 자신을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몇 번인가 찾아온 낯설지 않은 목소리이자 이질적인 존재.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오를 수 있잖아?'
달콤한 유혹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물론 알고 있는, 그러나 걸을 리 없는 길을 걸으라고 말해오고 있다.
목소리. 흑린의 속삭임. 마지막으로 찾아온 건 언제였던가. 분명 진화하기 이전,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 고행을 이어나가던 때 찾아온 이후 처음이었다.
별안간 찾아온 흑린에게도 늑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제시한 길은 답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목소리는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 자신을 질타했다.
고작 몇 개월 후에 종말이 찾아오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걸 바라느냐고 묻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기에, 종말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존재를 흑호의 기억에서나마 볼 수 있었기에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망설이려고?'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어째서 그리하지 않느냐고. 알량한 도덕이나 질서를 쫓기 위해 전부 놓치고 말 거냐고.
'취해.'
취하라고 구태여 말로 꺼내어 속삭인다.
'전부 취해버리면 되잖아?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잖아?'
지금 널 막을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느냐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빨리 닿을 수 있는 길일 테니까.
즉, 여왕을 취하고 인류를 먹어치우라는 뜻.
비록 그녀의 육신은 몰락했어도 영혼의 격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정수를 취하고 초월에 오르라는 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죽고 싶어 했었잖아? 굳이 살려야했어? 그 정수를 취했다면 이미 도달했을 텐데.'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명 그러했으리라. 억지로 정수를 취하고 죽은 여왕의 정수마저 받아들였다면 말이다. 부정하지 않는 늑대를 보고서 흑린은 그 어리석음을 조소했다.
'아둔하기는. 알면서도 하지 않을 셈이야?'
그러나 늑대는 그 말을 부정했다.
그 말로를 알고 있었으니까.
만상의 주인- 수많은 평행 세계가 멸망하는 걸 지켜보며 종말을 막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그녀는 사람의 사정, 감정,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고 말았다.
그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훨씬 더 종말을 막는다는 것에 가까워 있으리라. 아주 잠깐은 그녀를 막아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봤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찾아온 종말을 막지 못했다. 무수한 방법을 동원하고도 닿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막을 수 없을 테니 포기한다…… 그런 게 아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옳다는 걸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건 어리석고 아둔한 고집. 단순히 끝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만상의 주인이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자신에겐 그럴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런데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왕이 죽는 모습을 보기 싫었기에 자신의 이기심으로나마 그녀가 살아주기를 바랐다. 한때, 인류와 갈등을 빚었으나 그건 이미 해소된 뒤였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됐을 뿐이지만 지켜야할 게 생기고야 말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흑린이 속삭인 그럿 길을 걷고 말았을 거다. 지치고 마모돼가던 자신이 페리와 백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결국 망가져 그리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길만큼은 걸을 수 없다.
단호한 의지를 느낀 듯, 잠깐 말을 잃은 흑린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좋아.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줄게.'
그런 속삭임과 함께 환상이 펼쳐졌다.
종말이 찾아와 별이 부숴지고 세계가 망가지는 모습. 자신이 알던 이들이 죽고 무엇 하나 살아남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말이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건 허상같은 게 아니다. 환상이나 분명히 있었던 일. 과거, 종말을 맞았던 세계였다.
지금보다 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는 홍유리. 이미 마녀로서 토벌당해 죽음을 맞은 백소율.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친 듯 보이는 단세혁의 모습까지.
그래. 그건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세계. 원작의 세계에 찾아온 끝이자 종말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그것에게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치지만 결국엔 누구 하나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야 만다. 오직 여왕과 만상의 주인만이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던 최후. 설령 초월의 격에 다다르더라도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이자 족쇄. 진리의 의지이자 그 다른 면이었으니.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이래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전부 잃어버리고도?'
그게 싫다면 선택하라고 종용해온다.
문득, 그 강요하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게 심기를 건드린 듯 흑린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뭐가 우스워?'
그래. 이런 방법으로는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든 발버둥쳐보려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걸 확신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게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초월의 격에 오르고 누구도 다다르지 못했을 그 너머에 닿아야만 가능성이 펼쳐지리라.
흑린의 말이 옳다고. 만상의 주인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깟 불모지에서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는데. 아무리 성장해봐야, 성장의 한계까지 도달해도 그 벽을 넘을 수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그럼……!'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오는 그것을 보며 공허를 일으켰다. 그 대상은 흑린이 아니라 전신에 들러붙은 개미들. 그것들을 남김없이 삼켜버린 늑대는 낮은 울음을 토했다.
"그래. 내가 틀렸다."
"……이런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군."
다음 말을 기다리는 흑린에게 늑대는 이를 드러냈다.
"기다려라."
흑린이 제시한 방법은 틀렸다.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한다는 그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다. 늑대의 뇌리에 어떠한 길이 펼쳐졌다. ―――그건 초월에 오를 수 있는 더 확실한, 그리고 또 다른 길. 설령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지금부터 갈 테니까. 널 먹어치우러."
그리고 자신이 여태 걸어온 길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항상 그러한 난관으로 점철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