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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70화 (270/407)

〈 270화 〉 #119 황폐한 세계

'날 먹어 치우겠다고?'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단 것처럼 그것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순간, 늑대는 세계가 어두워짐을 느꼈다. 아니, 검은 불꽃이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와 같다. 뜬금없이 찾아온 흑린이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었던 대전의 밤과 마찬가지다. 늑대는 자신을 뒤덮은 검은 불길을 보았다. 언뜻 겁화와도 비슷해보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힘. 분명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권능이리라.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이 두른 공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알게 됐다. 눈치채지도 못하는 일순간에.

흑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느껴지는 시선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현격한 격의 차이가, 아득한 힘의 차이를 보여주며 이 벽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온다.

허나, 그게 어떻다고?

여태 지나온 길은 모두 그래왔다. 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기죽지 않고 송곳니를 드러내자 흑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지금 맛봐버릴까? 기대오는 걸 기다렸지만 지금이라면 억지로 눌러서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군침을 삼키고 점점 불이 거세지는 와중에 흑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지금 방해꾼이 끼어들었으니까. 여기서 쏟을 시간이 없게 되고 말았다.

'운이 좋았구나. 그래도 다음에는…'

목숨을 건졌다며 흑린이 말끝을 흐리자 세계는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늑대는 으르렁거렸다.

"말했을 텐데."

순간, 사라지기 직전의 검은 불이 타오르며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지금부터 널 먹어치우러 갈 거라고."

***

그렇게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곧잘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늑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여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아왔구나."

분명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건 모종의 일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잘 됐다. 자신 또한 그녀에게 볼일이 있었으니까. 차원을 넘는 방법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그 방법을 묻자 여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차원의 틈을 열어젖히는 법. 그걸 알고 있는 건 분명 여왕밖에는 없으리라. 그녀만이 답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거기에 돌아온 건 답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왜 알고 싶은 거니?"

이유를 묻는 말. 그러나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분명 말리려 들 테니까. 하지만 오랜 세월과 높은 격에 스며든 통찰력은 답하지 않아도 답을 도출해내고 말았다.

탄식과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녀가 걱정하는 바는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감정의 격류에 휩싸여 무리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리라.

단언할 수 있다. 아니라고.

하지만 무리한 일이라는 점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자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알려줄 필요는 없겠구나."

완곡한 거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초월의 격에 오르지 못한 자신이 흑린과 싸우러 간다는 걸 반기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런 늑대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길은 이미 열려있으니까."

팔을 들어올려 하늘을 가리킨다. 여명의 지붕과 천장이 있었지만, 둘에게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올려다보자 늑대는 이루 말하기 힘든 조그마한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작고 작아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미미한. 심지어 보고 있는 지금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만, 유추할 수는 있다. 여왕은 길은 이미 열려있다고 말했으니까. 그렇다면 저것이 차원을 넘어갈 수 있는 길임에 틀림 없으리라.

짤막한 감사를 남기고 떠나가려던 순간, 여왕이 자신을 붙잡았다.

함께 가자는 걸까. 그 마음은 고맙지만 누구도 데려갈 수 없다. 설령 일부나마 격을 회복해 자신과 같은 정신체의 영역에 있는 들어섰다 할지라도. 그 단호한 의지에 쓰게 웃은 여왕은 대신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등을 떠밀었다.

……떠밀려 나온 그녀가 데구루루 눈을 굴리며 갈팡질팡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그… 안녕?"

어색한 인삿말에 늑대는 촉수를 흔들어주었다.

"이 아이가 보고 있단다. 그것도 우리보다 더."

"……."

"길은 내가 아니라 이 아이가 안내해줄 수 있겠지."

그 말에 이번에 탄식한 건 늑대였다. 자신과 여왕마저 제대로 볼 수 없는 걸 보고 있다는 건 얼마 전부터 품었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는 것이니까.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안내해 줄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녀라는 뜻이다. 곧이어 늑대는 조용히 말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과 그녀가 보고 있을 어떠한 광경. 그 너머로 인도해달라고. 곧 무겁게 끄덕인 이은하가 자신의 털 끝을 미미하게 잡아당겼다. 그녀를 등 위에 태우고 창공의 끝까지 도달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속도에 놀란 건지 고도의 기압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1만 미터를 넘어서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자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미안…"

미안할 건 없을 텐데… 속이 울렁거리는지 입을 막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뒤따른 늑대는 이제 그것이 지척에 있음을 알게 됐다.

"힘들지는 않나?"

"어? 괘, 괜찮은데…"

우물쭈물 거리는 그녀의 말에 끄덕인 늑대는 힘껏 전력으로 달렸다. 이젠 방향을 알려줄 필요도 없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커져간 위화감은 이젠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높은 고도에 숨 쉬는 게 버거워 보이는 이은하를 위해 바람을 둘러주자 한결 편해진 듯 보였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우주라 불릴만한 공간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를 가로막듯 차원의 틈새가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그걸 보고 되레 용기 낸 이은하는 입술을 달싹였고.

"고맙다. 이제 돌아가 보도록."

차마 소리 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은 다정했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자신도 알고 있다. 알파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따라가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으리란 걸.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고 말하는 것밖엔 없었다.

"그래."

짧은 답과 함께 알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차원의 틈을 넘는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 압박에 전신이 눌려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길은 뚫려있다. 하지만 그 길을 차원이 스스로 메우고 있었기에 좁은 길을 억지로 빠져나와야 했다.

가까스로 틈새를 비집은 늑대는 고작 그것만으로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것이 얼마나 마력을 소모했는지 실소가 나왔다. 직접 길을 뚫은 것도 아니고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온 것에 불과한데도 이러하다. 만약 자신이 직접 차원을 뚫어야 했다면 아예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흐릿해진 눈에 비친 건 적막하고 황폐한 땅이었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 같은 장소였다. 바람에 엮인 혈향이 올올이 흩어지고 단말마와 흡사한 괴성이 들려온다.

푸르스름한 환계와는 반대로 붉은 세계와 황폐한 땅. 또한 숨 막힐 정도로 농도 짙은 마력이 호흡할 때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본 늑대는 아프리카의 불모지와는 비할 수조차 없는 기괴한 형상들을 보았다. 곳곳에 널린 몬스터가 그랬고 몬스터인지 알 수조차 없는 것들이 그랬다.

그리고 저 너머, 홀로 고즈넉한 성에 늑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곳은 누구의 세계인가. 그렇다면 이 황폐한 대지에 어울리지 않는 성은 누구의 것이겠는가.

달려드는 촉수를 물어뜯고 짓밟은 늑대는 그것을 씹어삼키고는 다시 고성을 올려다보았다.

잃어버린 체력과 마력 일부를 잠식에 의해 회복하며 주변의 몬스터를 집어삼켰다. 흑린을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설프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전력에 심혈을 기울이더라도 승산은 한없이 낮다. 어쩌면 일말의 가능성조차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와 같았다면, 말이다.

차원의 문을 연 건 누구였겠는가. 그리고 이 타르처럼 농밀한 검은 마력 중에서도 유독 검게 느껴지는 칠흑의 잔향은 누구의 것인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연 살아있을 거라 알고 있었지만, 만상의 주인이 여기에 있다는 거다.

또한, 그 목적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초월자.'

여왕에게 그러했듯 엘릭서를 완성하기 위함이리라.

즉, 흑린과 만상의 주인이 충돌할 거라는 뜻. 어쩌면 이미 그리됐거나…… 정말 그렇다면 기회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약에라도 종잡을 수 없는 두 초월자가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서. 검은 마력의 잔향을 뒤따라 늑대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한산한 복도에 울려 퍼진다.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최상층에 오른 소녀는 그 문을 짚었다.

분명 이게 마지막 문이리라.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미로같이 복잡한, 법칙을 무시하고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공간과 곳곳에 도사린 온갖 괴물들. 아무리 그래도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건 없었지만 정신체였던 건 있었다.

애초에 그 바깥의 괴물들조차 격을 달리한다. 분명 자신이 아니었다면 고성에 다다르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 이곳은 분명 처음 와보는 세계였지만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정체도 기원도 불명한 존재였지만, 자신은 분명 그녀를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희망에게 그러하듯 아주 오랜 옛날, 흑린이 자신을 찾아왔던 적도 있었으니까.

문을 열기 전, 소녀는 옷에 묻은 피와 먼지를 털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고성에 어울리는 어두운 궁전과도 같은 장소. 그 누구도 다다르지 못했을 이곳에 다다른 소녀는 문득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마치 마왕의 성 같다고.

그럼 이곳에 제 발로 찾아온 자신은 용사라도 된다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런 건 자신이 아니라 수도 없이 시련을 넘나든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고결한 이가 칭송받아 마땅할 말이니까. 그래. 자신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우습게도 뇌리에 떠오른 모습은 검과 방패를 들고 정의를 부르짖는 이가 아니라 송곳니와 발톱을 지닌 어떤 짐승의 모습이었다.

그 상념을 깨듯 비스듬히 붉은 해골로 이루어진 옥좌에 앉아 턱을 괸 그것이 마치 무언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기라도 한 것처럼'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만상의 주인. 아… 아니지."

곧, 흑린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달리했다.

"이은하. 분명 그거였지? 네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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