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71화 (271/407)

〈 271화 〉 #119 황폐한 세계 (2)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격리된 세상처럼. 2차원의 공간을 아무리 달려봤자 3차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성까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수한 몬스터들이 기어들어 자신을 좀먹으려 한다. 고작 이런 몬스터들에 당할 리 없지만, 그건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부정형 괴이]

[체장 -] [체고 -] [체중 612.5kg]

[힘 398] [민첩 227] [체력 604] [마력 411]

[보유 스킬]

[뛰어난 경화(C)] [마촉수(C)] [뛰어난 재생(C)] [변이(D)] [위장(D)] [은신(D)] [탐식(E)] [소화(F)]

타르 찌꺼기 같은 괴이들이 온갖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숨어있는 놈들도 있었고 촉수를 뻗어오는 놈들도 있다. 하나하나가 A급 몬스터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할만한 괴물들이었다.

그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천으로 널려있다. 마치 아귀 지옥이라도 된 것 마냥 서로 집어삼키며 동족상잔의 포식을 이어나간다.

벌써 쓰러뜨린 숫자만 해도 기백. 이곳은 인류에게는 차마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땅. 만약 스퀘어 마스터가 왔더라도 뚫을 수 없는 벽이었을 거다. 한 마리 한 마리를 어떻게든 쓰러뜨릴 순 있어도 그 전에 체력과 마력이 한계를 드러내고 말 터. 자신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인세, 아니 인세조차 아닌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 그런데 우습게도 효율은 좋다. 경험치를 올린다는 목적에서는 불모지보다도 더. 그러나 고작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 어떻게든 고성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모든 건 그 이후부터 시작일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닿을 수 있지?

눈으로 보이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진작 도착해야 했을 거리가 도무지 좁혀지질 않는다. 아무리 아둔하더라도 알 수밖에 없다. 떨어져 있는 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좀 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아무리 달려도 풍경은 계속 바뀌지만 성은 그대로 거기에 있다. 마치 자신이 움직이는 만큼 도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차원이란 건 이다지도 악랄했던가?

새삼스레 여왕의 환계가 얼마나 상냥한 세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성이 가까워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각의 교란? 허상의 투영?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초월적인 시각과 영안으로 상승한 눈으로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에 지식이 부족한 자신이 알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늑대는 순순히 포기하기로 했다. 길을 헤쳐나갈 수 없다면 벽을 없애버리면 되니까. 어떤 원리에 의해서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상관없다.

아지랑이가 일어나 자신을 덮어간다. 밀봉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틈도 없이 꼼꼼하게 덮인 늑대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거면 됐다.

여전히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만약 감각을 교란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라면 공허가 전부 먹어치웠을 터. 아니, 애초에 극기를 가진 이상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상대가 초월자인 흑린이기에 확신하지 못했을 뿐이었지.

그렇다면 문제는 감각이 아닌 공간일 터. 자신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그렇다면.

달려드는 괴이를 짓밟은 늑대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폐부의 깊디깊은 곳까지 누르고 또 눌러 한계까지 압축한 공기는 잠시나마 액체가 됐을 정도였다.

그만한 숨을 담고서 호흡을 멈춘 늑대는 안에서부터 시꺼먼 불길을 일으켰다. 내외로 검은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괴이들이 움찔거리며 물러선다.

――그것은 마치 용의 숨결과도 흡사한 것. 모방에 불과하지만 그 실상은 더욱 더 지독하고 악랄한 힘이다.

압축한 공기를 단번에 뱉어내자 내부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숨결에 실려 쏘아졌다. 가로막는 것 전부를 불사르는 화염이 대기를 불태운 순간, 마치 필터를 갈아 끼우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검은 마력이 타오르자 공간이 불타오르고 마침내 올바른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이런 거라고 생각은 했다. 칠흑처럼 남은 마력의 잔향을 느끼고선 말이다. 확신은 없지만 역시 뚫고 가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 아마 마력의 잔재도 그 때문에 남아있었던 것이리라.

벽을 불태웠고 길이 열렸다면 망설일 건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마침 늑대가 고성을 향해 진짜 의미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가 멈추었다.

***

"……."

소녀는 흑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곱씹었다.

그건 분명, 한때 자신의 이름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버린 이름이기도 하다. 불리지 않는 이름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오랜 옛날 지워졌던 이름.

옥좌 위에서 타오르는 궁전의 주인이 불편한 심기를 거두지 않은 채 그대로 물어왔다.

"그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상대하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듯한 그런 반응.

만상의 주인은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올올이 일어난 마력이 난폭하게 풀려나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농밀한 검은 마력을 모조리 뒤덮었다.

―――반대로, 뒤덮인 흑린의 마력은 상관없다는 듯이 뒤덮은 마력에 들러붙었다. 팽팽하게 맞선다기보다는 밀착해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이었으나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마력 하나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초장부터 막히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그녀와는 다르다는 걸. 영락했던 여신과는 달리 온전한 초월자인 흑린과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력의 영역에서마저 호각을 이룰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냥 생각하던 것보다 더한 싸움이 되리라.

시간 끌 여유는 없다. 흑린이 진심을 드러내기 전에 빠르게 끝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멈추었다. 아니, 순간이 영원으로 승화했다.

***

"그딴 걸 지금 말이라고!"

책상을 내리친 홍유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은하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다.

지금,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차원? 다른 차원? 뜬금없이 찾아와 한다는 말이 다른 차원에 갔다고?

"말해. 알파가 어딜 갔는지."

으르렁거리는 홍유리의 앞에서 이은하는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알파가 어딜 향했는지 정말 몰랐으니까. 다만, 그 회색 하늘의 언뜻 보였던 균열 너머는 그토록 처참한 황폐한 세계였다.

왜 그리로 향해야만 했는지 자신은 모른다. 다만, 여왕님과 그의 부탁에 따라 인도했을 뿐― 그렇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직접 안부라도 전하고 가라고 할 걸 그래싿.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세로로 뜨인 샛노란 동공. 그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열린 입 사이로 이은하는 송곳니를 보고 말았다. …원래 저렇게 뾰족한 이빨을 가지고 계셨던가?

잠깐 그렇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그러자 자신이 한눈팔았단 걸 알았는지 다시금 으르렁거린다.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야. 마지막이니까 말해."

붉은 마력이 타오른다. 몇 번이고 보아왔던 모습이지만, 대련 때와는 달리 섬뜩한 진홍의 마력. 역시 그 때는 진심이 아니었던 거다. 작게 탄식한 이은하는 정말 수틀리면 자신을 죽여서라도 알아낼 기세라는 걸 깨달았다.

억울하다거나 밉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알아야 하겠다는 뜻이리라.

거기서 조금 부러워졌다. 역시 팀장님은 이렇게나 진심인데 하고서. 만약 자신이 팀장님이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힘들었겠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걸까.

결국 팔을 내리친 홍유리가 기어이 테이블을 부숴버리자 질끈 눈을 감은 이은하는 다시 말했다.

"전 몰라요. 다른 차원이라는 것밖에는."

앵무새처럼 답답하게 반복하는 말에 샛노란 눈이 자신을 노려본다.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라고!"

……가능하다. 아직 차원은 닫히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알파가 차원을 넘어가느라 틈새는 더 크게 열리고야 말았다. 한동안은 아무렇지 않게 오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럼!"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홍유리는 입술을 씹었고 이은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대화는 한 발자국의 진전도 없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그 황폐한 세계에 팀장님을 데려가봤자 죽고 말 테니까.

"……넌 그걸로 만족해?"

조금 감정이 가라앉은 걸까. 마력을 갈무리한 홍유리가 날 선 듯이 묻는 말에 이은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은 있는 줄 알았는데."

적잖이 실망했다는 듯한 어투. 그래도 꾹 눌러 참았다. 주먹을 쥐며 감정을 곱씹고 억눌렀다. 그러나, 그 인내는 이어진 말에 끊어지고 말았다.

"이기적인 년. 결국 그 정도였지."

같잖다는 듯한 코웃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이채가 흐르는 것을 보았지만 이은하는 눈을 부릅떴다. 턱을 잡아채는 손길에 강제로 눈을 마주쳐야 했으니까.

"하, 꼴에 열은 받아?"

"안 돼요."

"안 된다?"

"안 된다고요. 알파가 원하지 않을 거예요."

"……넌 그걸로 만족해?"

분노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일까. 언뜻 보기에 경멸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오는 것에 이은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인형처럼 흘러가는 대로 있는 게 네가 원하는 거냐고."

"……."

"그럼 소꿉놀이나 하러 가. 난 혼자라도 갈 테니까."

거세게 밀쳐내는 손. 아주 잠깐이나마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던 이은하는 어느샌가 자신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시잖아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요?!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게 그나마 도와주는 거잖아요!"

하지 않으려 했던 말.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다. 이은하는 속에 담긴 감정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가서 죽으면요? 그때도 그랬잖아요!"

수색대- 구축함에서 만났던 바다의 재앙.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놈이 떠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미 전부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또! 그때도!"

또 한 번 더. 배가 고장 나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됐을 때, 목숨을 걸고 재앙과 맞섰던 것도 알파였다. 비록 본의 아니게 따라온 거라고 하나 구축함을 멈췄더라면 알파가 위험할 일은 없었으리라.

"그런데 또 가시려고요?"

"안 가면? 아무것도 안 하고 다 떠넘기고 손 놓고 있으면 돼?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그게, 그게 방해라는 거잖아요!"

차마 그 말만큼은 하기 싫었다. 잠깐 말을 잃은 홍유리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냈다.

"인형이면요! 아무것도 안 하면요? 그럼 뭐 어떤데요! 적어도 방해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녀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슴 한 켠에 피어오르는, 팀장님처럼 알파와 함께하고 싶다는. 그를 찾아가고 싶다는 그런 타오르는 감정을 차가운 말로 꺼트렸다.

"소율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진 아세요?!"

그래. 늘 그녀를 부러워했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알파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며. 하지만 그 격차는 터무니없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전과는 다르다. 지금의 그녀조차 알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은 이은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럼 안 되잖아요. ……걱정만 더하게 하는 건데. 알아도 참아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건 무엇보다 비참하다. 하물며 화산각룡에 이어 역병과 질병에 맞서 함께 싸웠던 그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자신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민폐 덩어리였으니까. 알파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진작 죽었을 목숨이다.

물론, 자신이 옳다는 보장은 없다. 자신이 틀리고 그녀가 옳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보단 팀장님이 알파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결국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

"같이 기다려요. 돌아올 때까지. 알고 계시잖아요."

홍유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분한 듯 쥐어진 주먹과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만이 보였을 뿐. 완전히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가까스로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

자신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의식의 극히 일부나마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연이기도 했다. 고성을 향해 쏘아낸 겁화가, 자신을 빈틈없이 두른 공허가 아주 조금이나마 권능에 맞섰기 때문에. 또한, 여왕에게 들어 그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힘은 분명 만상의 주인의 것. 찰나의 순간을 영원처럼 늘리는 그녀만의 권능. 물론 알아챘다 한들 지금의 늑대에게 이 권능에서 벗어날 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극히 조금이나마 인지했을 뿐. 권능이란 게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생물종을 넘어 정신체의 영역을 넘어선 초월자라는 이들이 도대체 어떤 영역에 있는지를 일부나마 알게 됐을 뿐이다.

……몸은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원과도 같은 찰나를 인지한 늑대는 그 속에서 자신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