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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72화 (272/407)

〈 272화 〉 #120 흑린의 성

찰나의 영원. 멈춰버린 세계.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스킬도 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만이 남아 멈춘 세계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찰나는 길게 늘어져 영원이 돼 있었고, 영원은 곧 셀 수 없는 시간. 자신으로서는 이 영원을 무너뜨릴 수 없다. 기약 없는 시간. 심지어 자의가 아닌 타의로 다시 시간이 흐르게 될 언젠가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건 창살 없는 감옥이자 깨어나지 않는 악몽과도 같다.

자신의 육신에 갇혀 정신만이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뭣 모르는 이들은 행운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건 행운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천분의 1초도 흐르지 않았지만, 체감상으로 늑대가 느낀 시간은 닷새가 지나있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히 기다리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고성으로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부의 관조. 일견 명상과도 비슷하지만, 훨씬 더 깊은 내면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한계가 있다. 결국엔 도피와 같은 행동이었으니까.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때, 늑대는 지루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루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별것 아닌 감정이었지만 그게 시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루함의 독은 서서히 자신을 좀먹어가리라.

그 어떤 맹독보다도 치명적인 무료함의 저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고 여긴 늑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가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그 방법은 감정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무료함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몰두하는 것.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찾고 교정할 만한 충분한 시간. 그래. 부족했던 건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의 전환은 영원의 감옥을 기회의 창으로 바꾸어놓았다.

급격한 상승을 이룬 스테이터스. 통합된 스킬과 펼쳐진 가능성. 정신체라는 격이 의미하는 것들을 온전히 갈무리할 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간을 선물 받은 순간, 자신에게 몰두해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한 늑대의 안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기 시작했다.

***

홍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 안 된다고. 방해만 된다는 그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싫었다. 자신이 걸림돌이란 걸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알파는 너무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빠르게 오고 말았다. 알파가 하는 일에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증거가 자신을 부르지 않은 것. 여유가 있다면 자신에게 알렸을 테니까. 그러지 않았다는 건 따라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나도 알아."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차며 데구루루 굴러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정곡을 찔려서. 그래서 괜히 지랄하면서 나왔지만 이은하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자신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 정말 함께하고 싶다면 강해져야 한다. 훌쩍 떠나버린 백소율처럼 마법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강해져봤자 한계는 선은 그어져 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선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인류는 역병조차 쓰러뜨릴 수 없었는데, 지금의 알파라면 역병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노력해봤자 알파는 멀어질 테고, 격차는 벌어지기만 할 거다. 즉, 무의미한 발버둥이라는 것. 이런 경험은 없었는데 의욕이 송두리째 꺾이는 것만 같다……. 힘없이 주저앉아 땅이 꺼지라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인형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비참함이 자신에게 드러난 현실이었으니까. 노력이나 재능 따위로 극복할 수 없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선명한 차이. 즉, 이게 자신의 현실이었다.

홍유리는 그날, 종일 멍하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몰두했다.

***

스킬도 몸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부를 관조하며 어그러진 균형을 다잡아가고 있었다.

예컨대, 급격한 상승을 맞은 스테이터스를 미세조정할 수 있는가? 최근 등급이 오른 스킬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가. 또 더 나은 방법은 없는가.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떠올려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낭비가 생겨있었다. 예전 환계에서 백록이 그리도 강조했던 효율의 문제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봐야 알겠지만, 머릿속에서 가다듬어진 움직임은 최적화를 이루어갔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고 1년이 지나자, 스테이터스 상의 변화는 없더라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원래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터. 모든 것을 상정하고 머릿속에서 상상한다는 게 마냥 쉽지 않아서였다.

3년이 지난 순간, 늑대는 자신의 움직임을 더 고려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그다음 톱니바퀴는 스킬. 그동안 등급이 상승한 스킬은 많았지만, 그 위력이 증대했을 뿐 새로운 사용법을 찾지는 못했었다. 예를 들어, D등급 가시 촉수는 C등급 마촉수로 변화하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심안으로 합쳐진 세 스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무엇이 변했는가. 말했다시피 스킬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속에 상을 띄우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이끌 능력이 늑대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기나긴 찰나의 영원은 언제가 돼서야 끝나는가 하는. 체감상의 시간은 3년이 흘렀다. 멈춘 시간을 센다는 건 당연히 확실하지 않다. 몇 개월 혹은 크게는 몇 년의 오차가 생겨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아직 끝나지 않았나? 이 멈춘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싸움은 이토록 길단 말인가? 아무리 초월자라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납득하기 어려운 괴리였다.

"……."

그렇다면 이 의문에는 어떤 답이 숨겨져 있는가? 자신이 모르는 숨겨진 진실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건가?

그러다 문득, 늑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초월자는 한 명이 아니다. 또한, 자신은 흑린의 힘을 보지 못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 권능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공허와 겁화를 짓누른 검은 불꽃. 그래서 겁화 이상의 힘을 지닌 불꽃이야말로 흑린의 권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것과는 별개의 힘을 더 가지고 있는 거라면?

물론, 그 가정은 만상의 주인에게도 통용된다. 어쩌면 아직 숨기고 있는 또 다른 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를 궁지에 몰았어도 밑바닥에 도사린 게 무엇인지 늑대로서는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 도대체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어떤 힘이길래 이토록 오랜 시간 싸워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멈췄냐는 듯 흐르는 세계. 달리고 있던 와중에 자연스레 다음 걸음을 내디딘 늑대만이 그 움직임을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다.

반면, 멈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잠깐 멈춘 자신을 먹이라 여기며 달려드는 괴이의 무리. 그러나 지금 그것들을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폭풍을 두르고 전력으로 달린 늑대의 다리는 계속해 땅을 박찼고 마침내 고성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내부는 삭막하다.

하지만 늑대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곳은 다름 아닌 흑린의 성.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어쩌면 자신의 색적을 벗어날 능력을 가진 적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성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이었다. 흑린과 만상의 주인이 손을 잡았다면 어쩌나 하는. 그 경우에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만상의 주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본래 누구였는지 지금에 이르러 확신하고 있지만 둘은 너무나도 다른 존재였으니까. 10년이란 시간은 강산을 변하게 만든다는데 하물며 억겁의 세월이라면야.

지금의 이은하에게서 만상의 주인을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용서할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그녀가 여태껏 저지른 행위는 죗값을 치러 마땅하니까. 탕아들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그녀로부터 시작됐다.

이전 세계에서 백소율이 마녀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이단의 탕아들이란 어처구니없는 변절자의 조직이 결성돼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었을 거다. 환영의 나비를 비롯 일일이 사건을 되짚자면 끝도 없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건 이제 남은 건 그녀 하나뿐이라는 것. 물론 강훈도 살아있겠지만, 놈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숨어다니는 정도일 터.

정말 운이 좋다면, 여기서 흑린과 만상의 주인 양측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가시화를 발하고 성내를 유유히 걷던 늑대는 쓰러진 몬스터들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그것들의 모습에 어쩐지 낯익은 구석이 있어서. 아니, 더 정확히는 기척이었다.

"……."

마치 악마와 같은 형상의 모습의 괴물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있다. 그리고 그걸 보고서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괴물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중에 자신과 같은 정신체의 영역에 들어선 몬스터도 있다는 것. 물론 그것들이 살아있더라도 질 리는 없겠지만, 새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흑린의 성. 잠깐 올려다본 늑대는 색적을 발했지만, 이 위로 더욱 짙어진 농밀한 마력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거다. 순식간에 성장의 한계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흑린과 만상의 주인이 있을 성의 최상층. 지금 그곳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터. 절호의 기회에 망설이는 건 더한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두 초월자가 격돌한 거라면 정말 만약에, 운이 좋다면 동귀어진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둘도 없는 기회를 시체를 먹느라 놓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망설임. 그리고 그 망설임을 끊어놓듯, 검은 마력이 형상을 이루고 그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먹지 그래?"

―――고즈넉한 성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말해온다.

"네가 올 거라 생각해서 준비한 만찬인데."

사양하지 말라며 그녀, 만상의 주인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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