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121 산양 vs 반룡 (2)
불길한 회색 마력의 주인. 달리 처형자라고 불리는 바포메트라는 괴물. 구획 보스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 인류 중에서 그들을 단신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는 수준을 넘어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제아무리 스퀘어 마스터라고 한들 마법사라는 한계를 쉽게 넘어설 순 없었으니까. 애당초 마법사는 혼자서 싸우는 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유리는 자신 있었다.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발굽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와중에 홍유리는 마력 감지를 넓게 펼쳤다. 신체 능력이 상승했다지만 눈으로는 절대 처형자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다.
따라서, 마력으로 감지하고 미리 행동을 예측해야 한다.
숨은 것도 아닌데 볼 수 없다니 얼마나 불합리한가. 달그락거리는 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들리지 않게 됐다. 사라진 게 아니다. 단지 뛰어올랐을 뿐. 붉은 구름 위에 뜬 자신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들더니 낫을 휘두른다.
흉흉한 절삭음이 대기를 가르자 잠깐 막아보려 했던 홍유리는 그 생각을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턱 끝으로 잘린 바람이 스쳐 지나가 면도날처럼 예리한 상처를 냈다.
흐르는 피를 닦으며 홍유리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실감했다. 산양이 들고 있는 무기는 절대 평범한 무기가 아니니까. 그 이름도 처형자의 낫. 그 어떤 명검보다도 예리한 날붙이였다.
어느새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산양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죽이지 못했는지 의문이라는 듯이. 겉으론 태연하게 있었지만 홍유리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까의 일격. 판단을 잘못했다면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그러나 이젠 자신의 턴. 이미 놈이 멀어지기 전에 뿌려두었던 불뱀들이 발목에 들러붙어 엉켜있었다.
어떻게든 달라붙어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는 불뱀들. 그에 맞서듯 천천히 벌어진 턱에서 부정한 것들이 쏟아져나왔다.
'부정의 무리.'
벌레나 뱀 같은 것들. 구획 보스에 대한 정보는 잘 알고 있었기에 놈이 가진 사역 스킬도 익히 알고 있었다.
불뱀은 마법일 뿐 정말 살아있는 뱀이 아니다. 즉, 불에 뛰어드는 것과도 같다. 고열에 녹아든 부정의 무리가 순식간에 타오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것처럼 끝도 없이 쏟아낸다.
결국 무리가 가진 독액이 불뱀을 꺼트렸고 발이 가벼워진 산양이 다시 달려들었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멀리서 대낫을 휘둘렀다는 점이 다르다.
단순히 목을 베려고 하는 공격이 아니다. 회색 마력이 가득 담긴 그것은 참격 그 자체를 쏘아내는 것. 즉, 놈의 마력 자체가 날붙이의 연장선이란 뜻이다.
자신의 마력이 예리한 참격에 잘려나가는 걸 보며 홍유리는 숨을 죽였다. 다시 달려드는 산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사실 볼 필요는 없다.
"Stâlp roșu de foc. 이젠 내 차례거든? 이 좆만아."
불기둥이 솟구친다. 홍유리를 중심으로 주문의 주체인 그녀만을 제외하고 불사르는 자비 없는 화염. 대낫을 들어 올렸던 산양은 화들짝 놀라 지면에 내려섰다.
―그 방법. 마력을 발판 삼는 방법은 알파가 애용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혀를 찬 홍유리는 입을 멈추지 않고 주문을 영창해갔다.
마력을 엮고 또 엮는다. 마력이라는 미증유의 힘으로 여러 법칙을 속여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을 있게 만든다.
그것이 마법. 복잡하게 얽힌 손가락과 달싹이는 입술. 곧, 수인으로 마법을 완성한 홍유리는 그것을 조준했다.
의식을 뒤따라 쏘아지는 불꽃의 사슬. 공방 일체인 동시에 속박해 찍어누를 수 있는 마법이기도 하다.
"―Multiplex."
수인으로 맺은 마법에 다중화의 주문이 더해지자 사슬이 복제라도 된 것처럼 늘어났다.
불기둥 안에서 사슬을 조종하는 그녀. 안팎은 불꽃으로 격리돼 있지만 볼 필요 없이 느끼면 된다.
얽히고 얽힌 사슬은 일견하기에 거미줄처럼 복잡한 구조를 이루었다. 커다란 불꽃 그물은 이글거리고 찰그락 거리며 쇄도했으나,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잘려 나갔다.
바닥에 무릎을 굽힌 산양은 그 탄력을 이용해 골목 벽을 박차며 기동적인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한다.
저렇게 움직인다면 쉽게 따라잡긴 어렵다.
――눈으로 보고 쫓는 거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미리 말했듯이 이 싸움은 눈으로 보고 쫓는 게 아니라 한발 먼저 앞서나가 있어야 한다. 여태까지의 경험과 전투 센스 그리고 안목 스킬이 그걸 가능케 했다.
아무 의심 없이 산양은 최단 거리만을 노렸다. 입체적이나 그 실상은 직선적인 움직임. 그러리라고 예상했던 홍유리는 아니나다를까 원하는 위치. 허공에 떠오른 처형자를 보고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주먹 쥔 손을 끌어당긴 순간, 끊어졌던 그물이 다시 이어지며 사슬 하나하나가 더 빠른 속도로 쇄도해간다.
"Bate vânt puternic!"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눈을 덮치자 산양의 눈꺼풀이 닫혔다. 눈이 가려진 아주 짧은 순간, 홍유리는 마력을 뭉쳐 성질을 변화시켰다.
마법이라고 부르기엔 무안한, 그저 뭉뚱그린 마력을 불로써 승화시켰을 뿐이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불의 공을 힘차게 던진 홍유리는 언뜻 보이는 잔상이 붉게 타오르자, 산양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아귀는 맞춰졌다.
땅에 추락해 마력으로 불타오르는 몸을 덮어 꺼트린 산양은 그 짧은 사이에 새까맣게 타 있었다.
"……."
색색거리며 거친 숨을 뱉는 산양의 몸이 재생하는 게 보인다. 역시나 구획 보스라는 이름이 가벼운 건 아니었는지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신경질이라도 난 건지 표정의 변화 없이 산양의 주먹이 골목의 벽을 강하게 쳤다. 벽과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와중에도 홍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버랜드 제1구획 보스. 처형자 바포메트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반드시 놈을 격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놈이 가진 거짓 불멸이란 스킬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니까. 하지만 네버랜드의 붕괴로 일대의 시민들이 모조리 피난한 지금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놈의 가장 성가신 스킬 중 하나를 봉인한 셈이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거다.
"Se înroșesc."
홍유리의 마력이 더욱 진하게 물들었다. 더없이 붉은 진홍의 마력은 붉다 못해 검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Puterea cuvintelor mele Acoperă lumea."
고개를 흔들고 정신 차린 산양. 몸을 완전히 재생시킨 놈이 두 손으로 낫을 잡아 들어 올리더니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차별적인 일격. 그렇기에 무섭다. 단 한 번의 일격이 자신에게는 치명상일 테니까. 역시 구획 보스라는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러나, 더한 것과도 맞섰던 알파를 떠올리자면 물러날 수 없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놈을 쓰러뜨리면 이 답답한 속도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다.
참격이 닿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민첩이 부족하다. 갈라진 불기둥이 홍유리의 얼굴에 닿았으나 자신의 마력에 다칠 만큼 어설프진 않았다. 불기둥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쳤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섬뜩한 눈에 어떠한 빛이 스치자 홍유리는 눈을 부릅떴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잔상으로 보이는 정도였지 눈으로 좇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Prin urmare, Ceea ce vreau este devenit realitate."
분명 세 번째 영창이었건만, 홍유리의 손에 검은 나선의 창이 떠올랐다. 쥐어진 창을 힘차게 잡고 마력에 감지되는 산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벽이 부서지고 건물이 다소 무너졌다지만 결국엔 골목이라는 외길이다. 높이만 어떻게든 맞출 수 있다면 창을 맞출 수 있다는 소리다.
산양이 난폭하게 달려온다. 바닥을 깨부수며 흩뿌려놓은 불뱀을 짓밟는다.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부정의 무리가 흘러나오고 낫을 휘두르면서.
"Acoperit în foc negru."
네 번째 영창.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쥐어진 비틀린 검은 창은 이미 완성돼있었다. 힘차게 투창한 순간, 산양은 크게 발을 굴렀다.
당연하다는 듯이 허공에 떠올라 피해낸 산양. 뒤늦게 사슬이 뒤쫓지만 공중에서 회전하며 낫을 휘두른 산양이 그 사슬을 전부 끊어냈다.
가로막는 붉은 마력조차 예리한 날붙이에 갈라진다. 더 이상 둘 사이에 남아있는 장벽은 없다. 한 줌의 마력조차 없는 상황에서 홍유리는 담담히 영창을 외워갔다.
"Arde în abis și transformă-te…"
그것은 대마법의 주문. 이미 흑창은 빗나갔지만 그건 미리 완성해 보류해둔 것이었다. 영창하고 있던 마법은 완성에 가까워져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늦다.
산양의 낫이 홍유리의 목덜미에 걸리고 있었으니까. 가볍게 당기는 것만으로 숨이 끊어질 터. 산양의 눈에는 이 조그마한 것의 목이 제멋대로 나뒹구는 미래가 보였다.
그래. 미래. 산양이 가진 E등급 간파가 눈에 비치게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홍유리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으니까. 앞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배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산양의 낫이 자른 건 이미 잘려있던 종잇조각이었다. 황급히 몸을 돌리는 것보다 빠르게,
"într-o suliță neagră―!!"
나머지 영창을 완성한 홍유리는 나선의 창을 투창했다.
쏘아진 창은 피할 틈도 없이 적중해 산양을 시꺼멓게 불태우고 관통했다. 당연한 일. 질병의 비늘조차 꿰뚫은 창이다. 재앙에게도 통했던 일격을 '고작' 구획 보스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홍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부를 완전히 불태워 내장을 꿰뚫었으나 놈이 아직 살아있었으니까. 거짓 불멸을 사용할 순 없다고 하나 놈에게는 그보다 더한 스킬이 남아 있다.
산양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한다. 이마의 정중앙을 꿰뚫고 뿔이 솟아오른다. 회색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재빨리 거리를 벌린 홍유리가 다시 영창을 이어나갔다.
빠르게 맺은 수인이 수십 개의 창이 돼 날아가고 손가락 끝에서 붉은 총알이 연속적으로 쏘아졌지만, 그 정도로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불길함을 두르고서 그것의 몸이 비대해져 간다. 자연히 좁아터진 골목을 완전히 쳐부수고 본신을 드러낸 그것. 놈이 가진 A등급 스킬 강신.
"―――!"
네 발로 땅을 짚은 거대한 산양이 뱃속에 든 것을 마구 흩뿌리며 울부짖었다.
***
불길한 기척에 고개 돌린 이은하는 건물을 쳐부수고 나타난 거대한 산양을 보고 전율했다.
이미 보았기에 알고 있다. 그 예전 알파가 단신으로 싸워 이겨냈던 구획 보스라는 괴물. 오히려, 너무나도 머나먼 존재라 실감 나지 않았던 바다의 재앙과는 달리 온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뭐 해? 집중해!"
황급히 끄덕인 이은하는 마력을 집중했다. 손뼉을 치자 폭발이 일어나고 가시가 솟아오른다. 기적과도 같은 구현의 속도. 2구획의 짐승들이 경계하느라 물러난 순간, 몸을 돌린 이은하는 바닥을 짚어 솟아오른 가시를 엮었다.
그물이 스틸레톤의 발목에 걸리나 쓰러지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뒷열이 앞열을 받쳐주었기에. 금속 해골의 군세를 무너뜨리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아직 1, 2구획뿐이다. 3, 4, 5구획의 몬스터들의 무리는 제대로 확인된 바 없다.
"놈들이 나오기 전에 처리한다!"
소리 높인 거암의 로드가 클랜장님과 전장을 누비며 종횡무진 휩쓸고 있었다. 유난히 커다란 스틸 자이언트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당당히 맞서고 있다. 과연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또 다른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 우렁찬 포효를 들었을 때, 한눈팔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털빛이 하얀 거대한 흰 사자가 산양에게도 뒤지지 않는 덩치를 자랑하며 헌터들이 있는 진형. 자신들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마치 지루하던 차에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2구획의 보스, 백사자 스노웰이었다.
그래. 네버랜드의 붕괴는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
깊은 산. 환수와 여왕이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레 정순한 마력이 널리 퍼진 지리산에서 고치가 박동했다. 머잖아 하얀 고치가 찢어지고 속에서 나온 그것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다…… 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휑하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맞아. 없으면 찾아가야 한다. 기억 속의 어렴풋한 길을 떠올리며 심통난 것처럼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처럼 아름다운, 나비의 날개를 닮은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자 빛가루가 뒤를 따르듯 바닥에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