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121 산양 vs 반룡 (3)
"……이러기 전에 끝내야 했는데."
가볍게 혀를 찬 홍유리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처형자의 형상일 때 끝냈어야 했다. 머리를 적중시켜야 했는데 맞춘 건 복부. 그 결과, 강신을 사용하고 말았다.
집채만 한 아니 건물보다 커다란 산양이 날뛰기 시작하면 붙잡기 어려워진다.
뒤늦게 물어봐 들었을 때 알파는 강신한 쪽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했지만 그건 알파라 그런 거였다. 모든 능력이 대폭 상승하고 몸집이 커지는데 상대하기 쉬울 리 없다.
"……."
다시 대마법이라도 영창하지 않으면 쓰러뜨리기는 난해할 테고 주변에 피해도 갈 거다. 어차피 네버랜드가 이 꼴이 났으니 용인 시를 포기하는 건 기정사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대피가 끝나지 않았단 것.
일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난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알파가 돌아오면 물어나 봐야지.
홍유리는 다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쉽지 않을 거다. 솔직히 말해서 죽을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났다간 어떻게 될지 뻔하니까. 그리고 아직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아서.
"덤벼. 이 씹새야!"
애써 이죽거려보았다.
***
스노웰이 나타나자 강태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찾을 때는 안 보이더니 저 커다란 덩치가 어디 숨어 있었단 말인가.
"어쩔 텐가?"
"혼자 맡으실 수 있겠습니까?"
실소한 백군태는 가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가 떠나가자마자 아직 쓰러지지 않은 푸른 거인이 깍지 낀 손으로 바닥을 난폭하게 내리찍었다.
파편이 튀며 스틸레톤이 쓰러지는데 그걸 잡아들어 투척한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던져진 금속 덩어리를 인간의 힘으로 맞받을 수 있을 리 없다. 그건 거암의 로드인 백군태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선택으로 옆으로 구르자 충격에 조금 발이 흔들렸다. 해골이 줄지어 밀려들어 옷깃을 붙잡아 찢어지고야 만다. 질긴 가죽제인데 네버랜드의 몬스터들에게 견디기란 어려웠던 모양. 콧김을 뿜어내며 배틀 엑스를 휘둘러 떨쳐낸 백군태는 아주 잠깐 여유가 생긴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양과 백사자. 바포메트와 스노웰. 스노웰은 여명이 붙잡고 있고 저 멀리 산양의 근처에선 붉은 마력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작 네버랜드 공략대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그녀였는데 그 울분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기세에 실소가 나왔다. 하기야, 설마하니 살면서 또 1구획과 2구획의 보스를 동시에 볼 일이 또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던전 바깥에서 말이다.
세상이 요지경이라 앞으로 어찌 돌아갈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분명 자신이 어릴 적에는 몬스터 같은 게 없었는데…
"일단은."
뻐근한 어깨를 돌린 그가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 깊은 곳의 보스들이 나타나기 전에 정리해야만 한다.
특히, 3구획의 보스만큼은 반드시. 이 바깥에서라면 그 어떤 몬스터보다 더한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
네버랜드의 제3구획. 이매망량과 악귀ㆍ원령의 거주지이자 반드시 마법사가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얼마 전 네버랜드의 공략을 추진했던 강태호의 강경에 백군태는 마법사, 스퀘어의 불참을 이유로 들어 던전을 봉쇄하는 데 그치려 했었다.
조그맣고 긴 외길을 따라 정신에 파고드는 혼령들.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 침투해 유혹을 속삭이는 것들. 가보지 못한 5구획을 제외하고 가장 까다로운 구획이라고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존재. 악귀 원령의 우두머리이자 울부짖는 예언자, 밴시(The Banshee).
3구획의 보스인 예언자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밤식으로든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스퀘어 마스터 이상 가는 마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저주에 맞설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된 소수일 뿐이다.
밴시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건 다수의 원정대가 아니라 소수의 정예. 백군태가 공략을 꺼린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밴시를 단신으로 압도할 수 있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높게 울부짖는 죽음을 향한 예언은 덧없는 소리로 공허하게 울려퍼질 뿐. 아무에게도 닿지 않고 휘하의 악귀 원령들조차 격리돼 성불하듯 사라진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지만 덧없는 짓거리. 빛에 휩싸인 밴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서 울었다.
울부짖는 호수의 요정이 마침내 네버랜드 바깥으로 나왔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 누군가에게 억눌려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여왕이 가볍게 누르자 밴시는 바닥에 납작하게 눌어붙었다. 몰락했어도 초월자였던 그녀에게 고작 구획보스 따위가 상대될 리 없다.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진 밴시가 결국 한 줌 빛으로 화하자 여왕은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새로이 얻은 육신의 격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더 이상 종이컵이 불타는 일은 없겠지만 여왕에게 있어서 새로이 얻은 정신체라는 격은 유리컵에 가까웠다. 그것도 얇디 얇은 세공품과도 같은.
정수를 받아들여 조금 상태가 나아졌을 뿐이지 육신의 격이 영혼의 격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일상에는 지장이 없지만 무리하게 되면 상태가 악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대로라면 더 많은 아이들이 희생될 게 분명하니까.
다소 지친 몸을 이끌고 여왕은 다음 보스를 향해 걸었다.
***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97 → Lv.98]
이제 아주 조금이다. 두 마리 남은 정신체. 어느새 억에 가까워진 요구 경험치량을 올리며 늑대는 가만 생각했다. 역시 진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시스템이 가진 남은 업보다 많은 양을 얻었을 때, 이전의 진화에서부터 그 길은 자신만의 것이 돼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게 됐다.
50%의 업과 50%의 극기. 그리고 이번에 필요한 업의 양은 그 이상이었다. 아마도 1000%에 달하는 업이리라. 따라서 지금의 자신이 진화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깟 것들을 아무리 먹어 치워봤자 전제 조건이 변하지는 않는다. 100레벨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초월의 영역에는 들어설 수 없다는 뜻이다.
게임이나 소설과는 달리 현실은 그렇게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저것 준비된 게 아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남은 업은 도저히 채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쟁취하면 된다. 그래. 부족한 건 업일 뿐이다. 성장의 한계는 다가오고 있다. 그 말인즉, 초월의 영역에 한없이 가까워졌다는 것. 이제 남은 건 고작 두 마리. 늑대는 남은 정신체를 포식해갔다.
***
발굽 모양이 바닥에 깊게 찍힌다. 산양이 투레질하며 머리를 흔들자 이리저리 침이 튀어 닿으려 한다. 질색한 홍유리가 불을 일으켜 증발시켰다. 더러운 것도 더러운 거였지만 그 안에 독액이 섞여 있어 반드시 태워야만 했다.
녹색 안개 너머 회색 마력이 짙어진다. 이것도 강신의 영향일까? 한결 상대하기 껄끄러워졌다. 제법 높이 떠 있는데도 입이 닿으려 한다. 그리고 듣기에는 분명…
산양의 역관절. 그 무릎이 굽혀지는 걸 보며 홍유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뛴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거체가 뛰어오를 수 있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명백하게 노리고 뛴 산양이 단번에 삼키려고 입을 벌렸다.
그런데, 사역하는 부정의 무리가 튀어나온다. 귀찮게 구는 그것들을 전부 태워버리기 위해 불덩이를 던진 홍유리는 생각보다 더 빠른 산양을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슬이건 뭐건 간에 지금 놈의 발을 묶을 방법은 없다. 저 커다란 놈을 묶으려면 마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부족하다. 피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놈은 자신보다 더 빠르니까.
"Iată moartea ta!"
그렇기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 원래라면 통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변하기 전부터, 처형자의 형태에서 입혔던 복부의 상처가 남아있다.
오히려 상처 하나 없는 자신과 달리 피와 내장을 흩뿌리는 산양의 복부에 새하얀 폭발이 일었다. 안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상처가 번져 깊은 곳의 장기에까지 충격이 미친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도달한 산양. 스크롤은 써버려 남아있지 않다. 송두리째 뒤흔들린 산양의 복부에서 연기가 흘러나온다. 아래에서 흐른 연기는 위로 떠 올랐고 벌린 턱에서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충격이 뇌까지 미쳤는지 어설픈 움직임이다. 그런데도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홍유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타고 있는 구름을 움직여 산양의 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 생각이다. 정신 나간 짓거리다.
그러나 홍유리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화산각룡과 싸웠던 알파의 모습.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신처럼 대적할 수 없었던 알파가 순순히 그 거체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쉽다. 콧김이 불길이라거나 용암이라거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고작해야 얼마 남지 않은 부정의 무리가 있을 뿐이니까. 충분해. 할 만한 일이야. 홍유리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좋아…"
그래도 손이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홍유리는 그녀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산양의 입속에 삼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턱이 완전히 닫히기 전, 무언가가 빛을 뿌리며 쏜살처럼 빠르게 뒤따라왔다.
***
스노웰의 앞발이 휘둘러지자 휩쓸린 이들이 수십 미터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치고는 한 줌 핏물로 화해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 가볍게 목숨을 잃어버린 헌터. 옆에서 죽은 이를 보고 이은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조금만 더 집중했다면 받아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몇몇은 구했으니까. 그런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집중해. 어차피 저렇게 맞으면 바로 죽어."
누군가의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색색들이 구현돼가는 마력. 말뚝, 사슬, 가시가 모조리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 의미는 없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마력을 사용하더라도 스노웰의 피부를 뚫는 건 불가능하니까. B등급 바위가죽 스킬을 가진 놈은 단단해도 너무 단단하다.
하지만 상처에 쑤셔 박는 거라면 가능하다.
마침 도착한 클랜장님의 검이 유유히 스노웰을 난도질하고 있었으니까.
앞발을 휘두르는 걸 먼저 본 것처럼 피해내고 바닥을 씹는 턱을 한 걸음 물러나 눈을 꿰뚫는다. 달려드는 거체를 투우사처럼 다루며 몰래 다가온 꼬리에 등을 얻어맞아도 금세 일어나 검을 겨눈다.
"……이거 차라리."
혹시, 그냥 물러나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정말 혼자서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집중력. 검성이라는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게 된 그 실력은 역시나, 가히 비할 데 없는 검의 명수였다.
아니, 그렇기에 검성이리라.
찌르는 곳마다 자신은 뚫지 못했던 바위 가죽을 꿰뚫고 잘라낸다. 깊지는 않아도 분명 상처입히고 있었다.
"준비해."
다시 끄덕인 이은하는 틈을 노리기 위해 집중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조금 먼 곳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갑옷의 괴인이 자신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