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 #121 산양 vs 반룡 (4)
어두컴컴하다. 하기야 입을 닫고 있으니 빛이 들어올 리 없겠지.
손가락을 튕긴 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오히려 밝기 조절에 실패해 눈이 부셨을 정도로. 불이 밝혀지자 홍유리는 질색한 표정으로 뛰어올랐다.
뱀 같은 혀가, 끝이 둘로 갈라진 그런 혀가 발밑에 세 개나 자리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혀가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데 까끌까끌 해보이는 돌기가 있는 건 물론이고 그사이에 징그러운 부정의 무리. 쉽게 말해 벌레들이 잔뜩 숨어있었다.
잘 보니 혀에 돋아난 돌기는 고름이었다. 뭐 이딴. 토악질이 치솟아 오르려는 걸 참고 홍유리는 심호흡했다.
마법. 일단 영창부터. 입속에 들어왔다고 마냥 안전한 게 아니니까. 기다란 혀와 몸속에 사역하는 부정의 무리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모아두기라도 했던 건지 타액이 한가득 고여있어 더 역겹게 느껴진다.
악취에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막은 홍유리의 입술만이 빠르게 달싹이고 있었다.
"―――."
마법의 주문을 영창하던 홍유리는 몸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몸을 똑바로 세운 것이다. 사족보행이었던 놈이 뒷다리로 체중을 지탱하고 일어섰을 뿐인데 그 안에 있는 홍유리로서는 중력의 방향이 바뀌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급한 대로 불꽃을 창으로 빚어 벽면― 턱의 살점에 박고 견뎠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타액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쏟아져 내린다.
자꾸만 붉은 구름을 만들려 해봐도 날개를 펼친 벌레와 혀를 막아내는 것만 해도 힘겹다. 결국, 기껏 박아넣은 불의 창을 혀가 꺾어버리자 홍유리는 좁은 목구멍. 목젖과 식도가 있는 곳까지 떨어지고야 말았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대로라면 식도를 지나 위장까지 떨어지고 말리라. 그런 와중에 문득 든 생각은 기껏 날개도 있는데 왜 써먹질 못하느냔 거였다.
진짜 용이 아니기 때문인지 혹은 날개가 커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지. 괜히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날개가 새삼 밉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날아보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펄럭인 순간, 홍유리는 놀란 듯 눈을 떴다.
정말 자신이 떠 있었으니까. 마력으로 만든 구름도 아니고 무언가를 밟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 이게 바로 비행……? 약간의 감동을 품은 홍유리는 어쩐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무언가 들러붙은 감각. 분명히 자신의 등에 무언가 매달려있다. 거기에 더해 파닥파닥 힘차게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자 의문이 강해졌다.
멍하니 고개 들었다가 떨어지는 빛 가루를 맞고서 한참이나 눈을 마주친 다음.
"뀻!"
뀻― 불평이라도 토로하는 정신 차리라는 소리에 위아래로 끄덕였다. 비록 목소리는 다르지만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말. 하지만 아직 지리산에 있을 테고 설마 여기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런데도 자신의 감은 이 존재가 페리가 맞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이제 힘들다는 듯이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눈동자에 홍유리는 뒤늦게 끄덕였다.
"Multiplexare cu glonț de foc!"
각 손가락의 마디 끝에서 불의 총알이 발사됐다. 무리와 혀를 잠깐 밀어낸 순간, 홍유리는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그대로 던져냈다.
혀 하나는 막았지만, 남은 두 개의 혀는 어쩔 수 없다. 위장까지 단숨에 끌려가는 게 당연했겠지만 다음 순간, 홍유리는 이미 바깥에 있었다.
"잘했어."
얼른 구름을 만들어주자 그제야 안심했다며 날갯짓을 멈춘다. 어색하기는 해도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헤헤 웃음 짓자 홍유리는 실소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명 페리일 텐데 외형이 전혀 다르다. 요정용이 아니라 요정에 가까운 모습. 하늘색 머리칼이 허리춤까지 늘어져 있고 등에 달린 아름답던 두 쌍의 날개는 오색빛깔로 색이 더욱 도드라져있다.
이럴 때가 아니지만 감탄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떻게… 혹시 말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방긋방긋 웃고만 있는 게 그건 아닌 듯싶었다.
"……덕분에 살았어."
아니, 그래. 일단은 상황부터 정리하고 나서. 페리에게 물러나 있으라고 손짓한 홍유리는 아직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산양을 볼 수 있었다.
복부의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내부는 진탕돼있다. 새하얀 폭발과 마지막에 붉은 총알을 쏟아부었으니까. 그래도 재생 스킬이 있으니 오래가지 않아 회복할 거다.
하지만 거짓 불멸만 막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그것만 아니라면 그 전에 마법을 완성할 수 있다. 시원하게 창공에서 대마법이라도 쏴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훤한 시가지에선 힘들겠지.
대피는 어떻게든 된 모양이지만 헌터와 군이 몬스터를 틀어막느라 애쓰고 있었으니까.
"……."
따라서, 이번에도 대마법의 변형인 나선의 창을 사용해야만 한다.
자신은 있다. 딱 한번만 머리를 노려 맞출 수 있다면 단숨에 뇌를 꿰뚫고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으리라. 홍유리는 계속해 주문을 이어나갔다.
***
페리의 덕에 목숨을 건진 홍유리는 자신의 영창이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몸부림치는 산양은 고통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고통 속이기에 거짓 불멸을 사용하기 위해 마구 날뛰었다.
놈에게 필요한 건 단 한명의 사람이나 몬스터. 그걸 먹어치우기만 하면 모든 상처가 낫게 되리라. 그리고 반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건 주문을 외울 만한 시간이었다.
사실 후자의 조건은 충족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입속으로 뛰쳐들어가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니까. 새삼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으리라. 문제는 발악하는 놈이 헌터들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
원래 내부에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던 만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안에만 들어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겉으로 당황을 숨기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특유의 오연함을 가면으로 집어 든 순간, 자신을 훑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홍유리는 안도할 수 있었다.
다응 순간, 거대한 산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홍유리는 쾌재를 질렀다. 속여넘기는 데 성공했으니까. 상처 입었다고는 해도 만약 저 거대한 덩치로 헌터들이 있는 곳까지 직행했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속였다.
자신으로써는 놈을 막을 방법이 없는데 그치는 정도였지만, 반대로 놈의 입장에서는 입으로 삼키고도 죽이지 못한 거였으니까. 커다란 덩치가 표적이 될 뿐 방해가 된다고 여겼으리라.
다시 처형자의 형상을 취했을 산양. 지금쯤 놈은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을 터. 홍유리는 추적의 마안을 사용해 놈을 뒤쫓았다.
발바닥에 마력을 담아 걸음마다 터뜨려 추진력을 더한다. 원래라면 따라잡기는커녕 이미 상황이 끝나있을 테지만, 이게 가능한 건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놈이 상처입어서였다.
"Acoperit în foc negru."
입으로는 네 번째 주문을 읊어간다. 전력 질주와 병행하는 주문 영창의 소리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머잖아 추적의 마안에 놈의 모습이 담긴 순간, 홍유리는 수인까지 더해 물샐 틈 없이 완전히 틀어막았다.
불의 장벽 안에서, 산양은 가만 발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손을 대어 보인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대기를 진동시키는 마력에 손가락 끝이 불타오르자 얼른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어먹는다.
시험해본 것이리라. 지금 자신에게 장벽을 뚫고 지나갈 만한 체력이 남아 있는지를. 그리고 놈은 그 답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어디선가 꺼내든 낫을 단단히 두 손으로 붙잡음으로써.
결국 서로를 죽여야만 한다. 저 조그마한 것을 쓰러뜨리지 않는 한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직감했다. 산양이 가진 대낫의 새하얀 날붙이가 섬뜩한 빛을 흩뿌렸다.
그리고 대조되는 것처럼 홍유리의 손에는 어느샌가 나선의 창이 쥐어져 있었다. 최종장. 양자는 물러나지 않고 양보하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
수많은 말뚝에 박힌 백사자가 지면에 몸을 뉘었다. 결국 그 커다란 덩치가 쓰러졌다는데 안도하면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을 땐 바로 근처에서 또 한 번 무식한 소리가 들려왔다.
높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거둬졌을 땐, 커다란 배틀 엑스에 기대어 기침을 콜록거리는 백군태의 모습이 있었다. 그 뒤로 쓰러진 스틸 자이언트. 과연 그가 일당백의 헌터임을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물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라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두른 가죽 갑옷은 넝마가 돼 있는 데다가 늑골이라도 나갔는지 숨 쉬는 게 힘들어 보였지만.
'…굉장해.'
이은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금속의 거인을 정말 단신으로 쓰러뜨린 거였으니까. 기세를 잃은 스틸레톤의 군세도 머잖아 정리되리라.
"괜찮습니까?"
다가온 강태준의 물음에 어긋난 팔을 억지로 맞추고 있던 백군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나저나…"
오히려, 그런 그야말로 쓰러진 백사자를 보고 놀랐다. 아니, 더 정확히는 쓰러뜨린 요인 중 하나인 수십 개의 말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네버랜드 공략이 끝나고 이제 반년이 다 되어갈 뿐이다. 그런데 웬걸. 그때, 감지 담당으로 목놓아 부르짖던 어린 헌터가 C급 남짓했던 그녀가 어지간한 A급 헌터를 깔아볼 정도로 성장해있었다.
고작 괄목상대라는 표현으로 될 게 아니다. 게다가 여명의 돈을 죄다 쏟아부어 영약이라도 먹인 건지 느껴지는 마력량도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사람이 이리도 달라진단 말인가. 문득, 네버랜드에서 강태호가 탐 나느냐고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순수하게 클랜장의 자리에 있는 이로써, 거암의 로드로써 탐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갈고 닦은 보석이 될 줄 알았더라면 영입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싶어 입맛을 다셨다. 말년에 드는 같잖은 인재 욕심에 그는 아직 자신에게 이런 욕심이 남기는 했구나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물러나시죠. 할 만큼 하셨습니다."
1구획 1구역의 보스를 단신으로 쓰러뜨렸으니까. 1구획 2구역의 지하 마귀는 다른 클랜들이 어찌어찌 상대하고 있었고 2구획의 몬스터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펑펑 터지는 화약 소리. 어느새 시가지 곳곳에서 불과 연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곧 상황은 종료되리라. 가장 문제가 되는 보스만 지금처럼 쓰러뜨린다면 어떻게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지."
무릎을 짚으며 힘겨운 몸을 일으킨 백군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네버랜드 공략 역사상 2구획 이전에 실패한 적은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 말인즉, 정말 껄끄러운 것들은 3구획 이후부터라는 뜻이었다.
통곡하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저주를 받는 예언자 밴시와 공략대가 단 한 번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4구획 보스 식물정원의 주인 아우라우네.
그리고 그 실체조차 확인하지 못한 5구획의 보스. 아니, 네버랜드 자체의 보스가 아직 남아있을 텐데 여기서 자신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게 의무를 짊어진 자의 책임이었다. 압박 붕대를 억지로 동여매 팔을 고정한 그가 빙빙 어깨를 돌려보더니,
"이거면 됐다. 찾아봐야지."
긴 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신경쓰이는 건 어느샌가 타오르고 있는 저 불꽃의 장벽이었다. 본신을 드러냈던 바포메트가 강신을 포기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구역 보스도 아니고 다른 이들과 손잡은 것도 아니고 홀로 구획 보스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뜻하는 의미에 백군태는 새삼스레 혀를 내둘렀다. 과연. 지금의 여명에는 고원의 빈자리를 채울 충분한 여력이 있다. 곧 다른 지역의 헌터들도 몰려오게 되리라. 광명회와 은자의 숲을 비롯해 전쟁의 신전까지도.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분명 이번 사태도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겼다.
―――창염이 타오르는 검이 자신의 복부를 꿰뚫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