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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78화 (278/407)

〈 278화 〉 #121 산양 vs 반룡 (5)

섬뜩한 참격에 홍유리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흉흉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치는가 싶었지만 그걸 느끼고 있을 여유는 없다.

옆으로 구른 순간, 산양의 발굽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 파편에 직격당한 홍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암담함이나 절망 같은 게 아니라 답답함 때문이었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상황도 사실 그리 좋지는 않다. 놈이 입은 복부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간다. 상처가 나아간다는 것은 점점 본래의 속도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계속해 빨라지는 산양을 상대로 홍유리는 당연히 밀리고 있었지만, 그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쩐지 맞상대할 수 있었다. …산양이 느려서? 아니, 그게 아니다. 자신이 속도에 적응하고 있는 거였다. 눈에 익고 감각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부서진 건물 덕에 사방이 환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이글거리는 연기가 이것도 저것도 전부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을 피했다는 사실이 의문인 걸까. 산양은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산탄총처럼 날아온 파편을 닦아낸 홍유리는 손에 피가 흥건함을 보았다. 불꽃의 장막 안이었기에 금세 진득하게 눌어붙었지만.

"……."

그나저나, 이 십새끼가 얼굴을 노리네? 성큼성큼 다가오는 산양이 두 주먹을 부딪치더니 단단히 낫을 쥐었다. 사선으로 들어 올리고 세차게 휘두르자 홍유리는 먼저 달려들었다.

마법사가 몬스터에게 달려드는 건 금기 중의 금기. 그것도 역량에서 자신을 웃도는 몬스터에게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되레 물러난 건 산양이었다.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난 놈이 깊고 오목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자 홍유리는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여전히 그녀에 손에는 검은 창이 쥐어져 있었다. 광범위한 대마법의 파괴력을 응축 시켜 한데 모은 이 창에는 설령 예리하기로 유명한 처형자의 낫이라 한들 불태워버릴 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

그래서 일단 부딪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눈치채고 맞부딪치지 않는 게 과연 영리하다.

"…하기야."

그야 그렇겠지. 처음 복부에 큰 구멍을 냈던 게 바로 이 창이니까. 머리에 든 게 우동 사리가 아니라면 경계하는 게 당연하겠지. 납득한 홍유리는 한 번 더 달려들었고 산양은 계속해 물러났고 그게 제법 거슬렸다. 이 창을 유지하는 것만 하더라도 제법 마력이 소모되니까.

불의 장막이 둘려 도망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만, 그것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어야 성립되는 말이다. 속도에서 한참이나 웃도니 무작정 달려든다면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홍유리가 손을 뻗자 손바닥에서부터 무수한 사슬이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단숨에 산양을 휘감아갔다. 뻗어진 사슬은 가볍게 잘라냈지만, 빠르게 간격을 좁힌 홍유리가 검은 창을 내밀며 산양을 밀어붙였다.

마법으로 방해하며 마력이 다하기 전에 어떻게든 한 번만 적중시키면 된다. 검은 창으로 놈을 몰아붙이지만, 반대로 이 창이 빗나가거나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패배는 확정되는 거나 마찬가지.

몇 번이고 비슷한 공방이 이어졌다. 거리를 벌리면 참격이 날아오고 좁혀지면 물러나려는 산양. 아까 설명했던 이유처럼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에 창을 맞추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산양은 이미 이겼다는 듯한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게 이미 먹이를 보는 눈이었지 싸우고 있는 적을 보는 게 아니었다. 비웃음과 같은 조소가 아주 잠깐 떠오르자 홍유리의 갈라진 동공이 산양을 꿰뚫듯 보았다.

산양은, 조그마한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 검은 창이 꺼지기 전에 도망치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으리라. 하지만 조그마한 것은 그러지 않고 악에 받치기라도 한 듯 계속해 달려든다.

사실상 승부는 갈렸다. 또 비슷한 공방이 이어지자 산양은 뒤로 훌쩍 물러났고… 실패했다. 홍유리가 아니라 산양이. 왜냐하면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

당황해 뒤를 보았을 땐,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구석으로 내몰린 걸까? 아니, 그게 아니다. 바닥을 본 산양은 그제야 잊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등신."

이죽이는 홍유리가 코웃음 쳤다. 불의 장막은 누가 만든 것이었던가? 마력에서 영창까지 전부 자신이 구현한 마법이었다. 당연히 그 우리를 좁게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침내 창이 닿는 거리까지 바짝 다가간 홍유리는 있는 힘껏 창을 내질렀다.

무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격이었다. 물러날 수 없는 산양은 이 공격을 피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물러났다. 설령 장막에 타오르더라도 저 창에 적중당하는 일만큼은 있어선 안 되니까. 비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마저 쉽지는 않았다. 가장 끔찍한 고통은 화상이라 했던가. 털끝이 타오르고 세포 하나하나에 불이 번져 고기가 익는 듯한 냄새를 풍겼다.

여태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던 산양도 이때만큼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어떻게든 빠져나왔으니까…… 그게 오산이었다.

"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산양은 타오르는 불 속에 당당히 서 있는 조그마한 것을 보고서 마지막 숨을 뱉어야만 했다. 미세한 꿈틀거림이 그의 최후가 되었다.

…시야 절반이 검게 물든다. 검은 창이 눈구멍을 통해 자신의 머리를 꿰뚫었으니까.

"이거 내 마법이라고. 등신아."

그러니까, 불에 탈 리가 없다는 거다. 처음부터 이 불의 장막은 홍유리 자신에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홍유리는 자신이 쓰러뜨린 머리가 사라진 산양을 한참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뜨겁게 달아오른 목 뒤의 붉은 비늘을 매만지면서.

약간의 통쾌함과 뿌듯함 속에서 달아오른 비늘이 마치 자신에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부족하다고. 더 마력을 사용해 보라고.

***

밴시는 쓰러졌지만, 악귀ㆍ원령이 사라진 건 아니다. 실체 없는 몬스터를 맞닥뜨린 헌터들은 대부분 난처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신이 없는 이상, 마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면 공격하는 게 어려우니까. 그리고 마력을 써봤자 네버랜드의 몬스터를 상대로 어지간한 정도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괜히 공격했다가 둘러싸여 당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소극적인 방어만이 이어지는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거기에 맞설 수 있었다.

그나마도 침투당하면 몸보다 정신이 먼저 망가져 어쩔 도리도 없어지게 되고 말았지만. 불안에 떠는 건 피난민들만이 아니라 군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런 시가지에선 한계가 있다. 그리고 징집됐을 뿐인 그들이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 리 없다.

최악의 경우, 빙의라도 당해서 아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라도 하면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지리라. 암담한 상황에서 그들은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전방 11시 방향… 몬스터 접근 중입니다!"

그 말소리에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이들이 알린 방향을 쳐다봤고 모두가 절망하고 말았다

그건 초록색의 무리. 가히 군세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많은 식물이 모여들어 있었다. 몬스터 중에는 파리지옥을 닮은 녀석도 있었는데 거기에 파리 대신 붙잡힌 게 무엇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군세가 몰려오자 마음 약한 이들은 이제 다 틀렸다며 포기하고야 말았다. 심지어는 왕관을 쓰고 정원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형상을 보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득한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진 듯하다.

"4구획 보스… 아우라우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침음과 같은 말이 결국 마음을 꺾어버렸다. 차라리 자살을 시도하는 이가 있어 소동이 커졌고 이젠 도무지 수습할 수 없을 만큼이나. 혼란에 빠진 와중, 그들은 식물 정원이 자신들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

"쫓기고 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상황을 이해 못 한 이들이 의아해하고 있다니 멀리서부터 어떤 짐승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2구획의 몬스터들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건 최근에 그 존재가 알려진 이들이자 짐승 아닌 짐승들.

"……!"

바로 환수들이었다. 환수들이 4구획의 식물 정원을 쫓아 몰아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환수들이란 이토록 대단한 존재들이었나? 알파라는 그 마랑만이 예외인 게 아니었나?

의아했지만, 그 의문은 아름다운 빛깔의 은빛 머리색을 가진 여성의 모습에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어떤 증거나 단서도 없지만 그저 그녀의 존재감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것이 누구인가 조심스레 추측해보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하얀 사슴에 올라탄 그녀가 자신들을 지나치며 가볍게 손을 휘젓는가 싶더니 그토록 끈질기던 악귀ㆍ원령이 모조리 사라져 있는 것에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

"……!"

복부를 꿰뚫은 창염에 휩싸인 붉은 칼날. 스틸레톤 사이에 숨어 다가온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백군태는 힘겹게 몸을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담기진 않았다. 안 그래도 적잖은 부상이었는데 치명상이 된 일격.

"네버랜드에선 죽이지 못했지."

아주 담담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주교밖에는."

갑옷의 괴인이 검을 비틀자 백군태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 멍하니 있던 헌터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든 강태준이 그를 향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섬전과 같은 쇄도. 일순간에 좁혀진 거리. 눈으로 좇기도 어려웠는데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강태준의 공격을 받아냈다.

"……!"

쩌렁쩌렁,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충돌음. 그리고 공수의 교환에서 손해를 본 건 명백히 강태준이었다.

"저건……"

이은하는 그를 알고 있었다. 네버랜드에서 한 번 보았으니까. 그리고 그가 가진 검 또한. 커다란 붉은 대검. 그것이 만들어질 때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강태호. 알파가 다듬어준 2팀장님의 검이었다. 쓰러졌다던 2팀장님의 검을 괴인이 가지고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뻔하다.

분명히 적이다. 그런데도 끼어들 수 없다. 당장 지금조차도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공방의 연속이 이어지고 있다. 도와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만약 자신의 구현이 되레 방해되기라도 한다면? 어지럽게 얽힌 둘의 균형을 무너뜨린다면?

스노웰과는 달리 표적은 작고 빠르다. 사람치고는 컸지만, 이은하로서는 도무지 맞출 자신이 없었다. 그건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몬스터와는 다른 의미로 둘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정면에서 싸워줄 생각은 없다."

거센 휘두름에 멀리 날아간 강태준은 건물의 벽을 밟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건물 외벽에 각룡의 뿔을 소재로 만든 검을 박아 넣은 채 지상까지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씩 처리하도록 하지. 너희가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그리고 모여든 빛무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유유히 사라지자 강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헌터들의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가득 내리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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