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0화
#122 도달
별안간 선언한 말과 함께 그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강태준은 쫓으려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몬스터의 무리로 사라지는 그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몬스터와 인류는 양립할 수 없다. 배부른 몬스터를 만나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몬스터들이 아니다.
실체가 없는 계열의 몬스터가 사람과 맞닥뜨리고 싸우지 않았다는 전례는 없다. 아예 압도적인 전력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거라면 모를까.
허나, 설마 그럴 리는 없으리라.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자신과 검을 맞대는 수준이라면 말이다. 그래. 저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치 죽은 사람 같군.'
그들의 동족 같았다. 저번에 심장을 꿰뚫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있는 걸 보고 예상했지만 인간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사람이 아니라 분명 좀 더 다른 무언가였다.
잠깐 침음한 강태준은 혼란한 장내의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마력을 담아 외쳤다.
"일단 몬스터부터 처리합니다!"
스틸레톤을 비롯 2구획의 몬스터까지 아직 다 처리한 건 아니다. 오히려 여명과 거암, 경기도 일대의 클랜들만으로 막는 건 역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클랜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이 사태를 피하려는 이들도 많았다.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최악의 던전에, 하물며 붕괴라는 사태에 있어 함부로 임하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후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약소 클랜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반대로 이걸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약소 클랜임에도 불구하고 발 벗고 나섰다는 명예를 원하는 것이리라.
여명으로서는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기에 듣기 어려운 칭송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걸림돌이었다.
"……."
머잖아 두 동강 난 백군태의 시신을 수습하고 빠르게 물러난 순간, 군의 화력이 집중됐다. 퍼부어지는 포탄과 화약 세례가 무차별적으로 2구획의 짐승들에게 쏟아졌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피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하진 않았겠지만 바로 옆에 가득한 무리. 서로가 서로의 길을 막고 있었기에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몬스터라는 이름답게 쉽게 죽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럽기는 한 건지 어떻게든 물러나려 애쓰고 있다.
그런 반면, 스틸레톤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불바다 속에서도 태연히 걸어오는 금속 병졸의 모습에 헌터들은 아직 남은 스틸레톤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달리던 와중, 최후방에서 강태준은 검으로 건물을 베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잘릴 리가 없겠지만 헌터라는 존재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쿠구구… 불길한 소음에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축이 잘려 건물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자 헌터들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며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
마침내 지면에 쓰러진 건물. 고층 빌딩이 스틸레톤의 군세를 덮쳤고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하게.
그리고 그 무게에 짓눌린 금속의 병졸들은 대부분 부서지고 으스러졌다. 아무리 튼튼해도 그만한 무게와 충격을 견딜 순 없었을 터.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충격을 견뎌야한 건 스틸레톤 뿐만이 아니었지만. 건물이 무너진 여파로 헌터 중에서도 넘어진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파편에 다친 이들은 없었는데 하연의 마법이 시기적절하게 사용됐기 때문이리라.
잠깐 여유가 생긴 사이 재정비하는 군과 헌터를 뒤로하고 강태준은 아까 그가 사라진 곳을 보았다.
…하나씩 처리할 거라고 했던가. 그 말대로 어지간한 헌터들로는 막을 수 없을 거다.
거암의 클랜원들이 믿기 어려워하는 것에 강태준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저번 기회에 그를 쓰러뜨렸어야 했다. 수장을 제외한다면 마지막 남은 탕아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
강태준은 소리 없이 납검했다.
그가 혼란을 틈타 우리를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여야만 한다.
문득, 그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동생도 분명 같은 생각을 했겠구나 하고서.
***
산양을 쓰러뜨린 홍유리는 기진맥진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기기는 했는데 잔여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슬슬 산양의 죽음을 깨닫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몬스터들이 제법 거슬렸다.
자신이 비교적 멀쩡해 보여서 달려들지 않는 모양인데 더 다쳤더라면 분명 승냥이처럼 물어뜯으려 했으리라. 잠깐 고개 돌린 홍유리는 쓰러지는 건물과 치솟아 오르는 먼지와 폭음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백사자의 사체를 보곤 끄덕거렸다.
"이제 둘이니까…"
바포메트는 자신이 잡았고 스노웰은 클랜 차원에서 쓰러뜨렸다. 두 구획 보스가 쓰러졌으니 이제 남은 건 셋. 다만, 그중 하나는 실체조차 확인하지 못했고 나머지 둘은 1, 2구획의 보스들처럼 단순하지 않다.
먼저 울부짖는 예언자 밴시. 놈과 싸우려면 실시간으로 마력을 장벽처럼 둘러야 한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곡 소리를 들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면 옆에 있기만 해도 개죽음이라는 것. 상대하는 입장에선 더없이 부담스럽고 까다롭다.
그리고 거기서 한술 더 뜨는 괴물이 정원의 주인 아우라우네였다. 4구획의 보스이자 여태껏 단 한번도 토벌하지 못한 괴물. 정원이라는 테마의 4구획 전체가 아우라우네와 다름 없었다.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작은 꽃과 풀에서 계속해 부활하고 심지어는 증식한다. 정원의 모든 식물이 그녀에게 복종해 파리지옥에서 마비독과 기생하는 종류까지 무수히 많은 것들이 방해해온다.
"……."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홍유리는 혀를 찼다. 식물의 상극이라면 역시나 불이다. 그렇기에 화공으로 접근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조차 통하지 않았었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모습을 떠올린 홍유리는 다시 끄덕였다.
그래. 지금 저기 지나가는 것처럼 딱 저렇게 생겼었지.
혼자 납득한 홍유리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획 보스가 도망치고 있다? 그 터무니없는 사실에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하얀 사슴에 올라탄 아름다운 은발의 여신이 식물 정원의 주인을 뒤쫓아 몰아붙이고 있었다.
***
장막이 거둬지고 머잖아 곧바로 달려든 페리가 부비부비 뺨을 비벼왔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자신보다 훨씬 작았지만. 관성으로 쓰다듬어 주니 좋다고 헤헤거린다. 분명 페리가 맞을 텐데도 모습이 다소 변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냥 그러려니 느껴지기도 했다.
여태껏 해왔던 행동들이 오죽 사람 같았으니까. 이렇게 돼도 이상할 건 없다는 거다.
"……쭉 이렇게 지내는 건지는 몰라도."
역시 말은 이해하지 못하는지 갸웃거리는데, 안긴 채로 배시시 웃으며 올려다보자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던 홍유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별개로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한다.
지금은 이 개 같은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게 더 급하다. 페리를 안아 올린 홍유리는 우선 합류부터 해야힐다고 생각했다.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본래 신이었다던 여왕이 도와주시는 이상, 4구획의 보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정원 자체가 도망치고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겠지.
머잖아 클랜원들이 있는 곳까지 돌아온 홍유리는 거암의 로드가 사망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희생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여기서 죽기엔 아까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우연찮게 시신을 본 홍유리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홍유리. 수고했다."
마침 치하하는 말에 끄덕이며 답하자 강태준은 이어 말했다.
"…아이를 구조한 건가? 아니, 아니군."
페리를 보는 눈살이 좁혀진다. 물빛의, 연한 하늘색의 머리카락만 하더라도 이질적인데 유난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과 같은 날개가 달린 게 그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리라.
"뀨?"
목소리는 달라졌어도 행동은 같다. 탈피에 대해 떠올린 강태준이 잠깐 감탄했다. 품속에서 꺼낸 스퀘어가 만든 물품으로 감정한 순간, 그게 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놀랍군…"
하지만 놀람은 잠시. 그건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다. 페리에 대한 감탄을 접어두고 다른 헌터들의 소란을 무시하고 본론을 꺼냈다. 소란스러운 게 싫었는지 안심되지 않는 건지 페리는 홍유리에게 달라붙은 그대로였다.
"추적하고 싶은 적이 있다. 네가 도와줬음 좋겠군."
정확히는 그녀가 가진 눈. 추적의 마안. 클랜장의 부탁에 잠깐 둘러보던 홍유리는 얼른 끄덕였다. 놀려고 돌아온 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까 백군태의 시신을 보고 느낀 위화감.
두 동강 난 시체는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2구획의 짐승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른 무언가… 그래. 상처 부위에 묘하게 피어있는 얼음 알갱이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직 쓰러뜨리지 못한 마지막 탕아의 간부. 강훈이리라. 덕적도에서 여기까지 지긋지긋한 인연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강태준의 속내를 상황을 읽음으로써 단번에 꿰뚫어 본 홍유리는 두말할 것 없다는 듯 눈을 빛냈다.
"……척살조를 꾸리겠다. 호명하는 인원은 앞으로 나오도록. 이건 강제가 아니니 내키지 않는다면 거부해도 좋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명될 만한 인원 중에 거부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무엇보다도 타 클랜이 아닌 여명 내부에서의 차출이었으니. 곧 이름이 불리게 됐고 하나같이 A클래스 헌터였으며 그들 중에서도 제법 특출난 이들이었다.
까놓고 말해, 강태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휘권을 인계받을 하연을 제외하고는 여명의 팀장급들이 죄다 호출된 거라 봐도 좋았다.
"그럼, 출발하지."
타 클랜의 우려를 뒤로하고 척살조를 꾸린 그는.
"기다려보쇼."
지금 막 천막을 들추고 도착한 거한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갈 거면 나도 같이 가야지. 안 그럼 섭하거든."
능청스레 다가온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잃어버린 자신의 무기가 아닌 스틸 자이언트의 거대한 팔뼈였다.
***
비로소 끝. 전부, 전부 먹어 치웠다. 피와 살 그리고 뼈조차 남지 않게끔 완식한 순간 정말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99 → Lv.100]
100레벨. 그건 여태 단 한 번도 다다르지 못한 영역. 세 자릿수 레벨에 기어코 도달했다는 사실에 감개가 무량하다. 흑린을 먼저 먹어 치울 셈이었지만, 다소 주객이 전도되고야 말았다.
비어있는 성에서 늑대는 자신을 살폈다.
초월의 영역에는 역시 다다르지 못했다. 업이 한참이나 모자란 이상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가.
늑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만복(C)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만복(C) Lv.9 → 만복(C) Lv.10]
[만복(C)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만복(C) Lv.10 → 포화(B)]
더 이상 레벨이 표기되지 않는, 등급이 오르지 않는 포화에 다다른 소화였던 스킬. 이제 와 떠올려보면 그 조건은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먹어 치우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같은 정신체였던 자색의 흑호라면 조건이 충족됐겠지만, 생물 종의 정점이었던 바다의 재앙으로써는 그 강함을 차치하고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거다.
그리하여 멈춰있던 숙련도는 이 성에서 정신체의 괴물들을 먹으며 마침내 다음 등급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작 그걸로 끝이 아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식(B)과 포화(B)가 합쳐져 폭식(A)으로 변합니다]
폭식― 오랜 이전에 늑대가 바랐던 스킬이기도 했다. 일부나마 상대의 힘을 갈취한다는 바라 마지않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늑대는 이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작 A등급 스킬을 새로이 얻었다고 두 초월자의 싸움에 끼어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래.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발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돼있었다.
만복이 포화로 변하며 작은 조각이 맞춰진 순간, 이미 퍼즐은 완성돼 있었다.
[폭식(A)이 공허(A)에 통합되었습니다]
[공허(A)― 격의 상승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