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124 혼무(?無)
* * *
'……드디어!'
만상의 주인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마침내 영역에 다다랐다. 세계와 차원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은 달리 없으니까.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도달한 거다.
잃어버린 자들의 마지막 희망은 그들의 염원을 싣고 마침내 초월의 영역에 올랐다……!
목표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소녀는 침을 삼켰다. 아찔한 전율이 전신을 휘감는다. 마침내 종말한 세계에서 붉은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
널리 퍼지는 짐승의 울음.그저 앞만을 바라보는 눈동자.그것에 넋을 잃고 말았다. 진작에 멈췄을 심장이 태엽이라도 감긴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때가 왔다. 만상의 주인은 어느샌가 자신이 주먹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는 한편,
"어떻게……?"
믿기 어렵다는 듯한 말. 눈으로 보고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목소리.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흑린은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
자신의 검은 불길을 먹어치우는 미지의 무언가. 그럴 리 없다는확신을 가지고서 펼쳐진 현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소녀 또한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 자신이 바랐지만 덧없는 바람이었다. 이루어질 리 없는 소망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초월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정말 기적이라도 일어났다는 말인가?
"어떻게 한 거지?"
늑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의지가 이미 기세로 여실히 드러나 있다. 세계를 먹어 치우는 그 힘은 이전에 희망이 다뤘던 것과는 한참이나 격이 달랐다.
소녀는 자신의 눈에 힘을 집중했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 늑대의 본질을 들추고 그 안에 든 것을 보려 했을 때, 아득함에 삼켜지고 말았다.
아니, 이미 삼켜져 있는 거였다. 마치 이 끝을 맺은 세계에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
세계와 공간에 더불어 검은 불길마저 사라져간다.
반쪽짜리 열쇠로 문을 열 수 없듯이 완전해지지 않으면 의미는 없다.
이제야 비로소 완성된 힘.
절대적이라 여겼던 흑린의 검은 불길을 집어삼키며 늑대는 등급 외의 스킬이 가지는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이게…!"
눈을 부라리며 흑린은 검은 불길을 흩뿌렸다. 그러나, 그 전부가 닿기 전에 사그라지고야 말았다. 단순히 불이 꺼진 거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만상의 주인도 흑린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꺼질 만한 불이 아니다. 모든 불꽃의 정점에 있는 것이야말로 검은 도깨비 불, 흑린이었으니.
격하의 능력으로는 설령 천년을 발버둥치더라도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모르나 정말 초월의 영역에… 진리의 바깥에 있는 힘에 손이 닿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 여태 장난감으로 생각했던 것이. 결국 절망해 자신에게 기댈 순간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잘도…"
그 굳건한 의지가 무너지는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힘을 빌려달라고 조아릴 때가 오기를 바랐다.
그때, 늑대는 뭐라고 할까?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 힘을 빌려달라고? 아니면 종말을 보고 좌절해 강해지게 해달라고?어느 쪽이든 좋았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요 근래가 즐거워질 만큼이나.
그런데.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엉망이 돼 버렸다. 흑린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잘도……!"
흑린을 감싼 불꽃이 일그러진다. 혼란한 감정을 드러내며 여태까지의 여유가 사라진 듯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늑대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임을 알아차렸다.
'감정을 먹어치우는 도깨비불.'
즉, 격정에 찬 지금에서야말로 그 진가가 드러날 거라는 뜻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진리의 바깥, 규격 외의 권능이 서로 맞부딪쳤다.
***
여기가 현계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면 대륙의 지도가 변해있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힘의 충돌이었다.
……대마법?
아가일의 검은 장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태웠던 흑린.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영역에 이르렀기에 알 수 있었다. 설령 그게 어떤 마법이었던 간에 하잘것없다는 것을. 공허가 흑린에게 먹혔던 것마저 이해할 수 있다.
공허는 분명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힘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리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흑린은 늑대의 권능을 통찰했다. 한 눈에 보아도 그 힘이 얼마 전의 아지랑이가 권능이 된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진심을 드러낸 흑린은 늑대의 권능을 단숨에 밀어내갔다. 같은 초월자인 만상의 주인조차 자신에게 이렇다할 부상조차 입히지 못했다.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고작 그 정도.권능이라고 다 같은 권능이 아니라는 뜻이다.
"안타깝게 됐네."
금세 여유를 되찾은 흑린은 늑대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이 짧은 시간만에 그만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면 도망쳤어야지. 그랬다면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훗날엔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숙해도 너무 미숙해."
세계마저 먹어치우던 늑대의 힘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야 말았다. 아니, 애초에 그 이전의 문제다.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 힘을 사용하는 데 급급해서였다.권능이라는 건 별격의 힘. 그렇기에 능숙하게 다루는 건 쉽지 않다. 거기에 더해……
"역시, 오르지 못했구나?"
늑대의 미지가 순식간에 불타올라 사라지자 흑린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반쪽짜리."
흑린은 그렇게 비웃었다. 그것은 늑대가 가진 권능에 대해서가 아니라 권능을 사용하는 늑대를 말하는 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권능은 얻었다. 그러나 초월의 영역에는 오르지 못했다.흑린에게 있어 그건 보검을 든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늑대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등급 외의 스킬을 얻었다고 초월의 영역에 오른 게 아니다. 반쪽짜리라는 말은 그런 자신의 모순을 꿰뚫는 말이었다.
"어리석기는."
검은 불이 번져가 혼무를 불태우고야 말았다. 도깨비불이 가득해지자 흑린은 다시 한번 조소했다.
그래. 아주 잠깐 놀라긴 했지만 여기까지다.
"빌어봐. 혹시 모르잖아? 살려줄지도."
순수한 악의와 열망을 담고서 키득거리는 그것.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건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
어느 순간부터 늑대가 가진 미지의 힘은 서서히 밀려나지 않게 됐다. 잠깐 의문을 표했지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흑린은 그렇게 생각했다.여유가 생겨 감정이 가라앉은 거라고. 그래서 다시금 불길을 거세게 키웠건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어느샌가 자신의 권능이 늑대의 미지를 쉽사리 불태우지 못하고 있었다.아니, 그게 아니다. 자신의 권능을 조금씩 빼앗아가고 있는 거였다.
***
지금까지 사용했던 힘은 일부에 불과하다. 혼무(?無)란 폭식과 공허가 뒤섞여 마침내 완성된 힘.공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힘. 그리고 폭식은 먹어치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 말인즉, 흑린에 부딪혔던 힘은 원래 공허였던 부분(無)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폭식이었던 부분(?)이 움직여 마침내 제대로 된 권능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흑린의 힘.'
힘을 빌리기만 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강탈한 그 힘은 자신의 것이 돼 불타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미미하지만 언젠가 혼무는 반드시 흑린의 모든 힘을 강탈하게 될 터.
[겁화(A) 격의 상승 2/3]
그 덕분에 인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게 됐다.
늑대는 걸음을 내디뎠다. 언제까지고 움직이지 않은 채 보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까.움직이기 힘들었던 몸도 혼무라는 힘에 어떻게든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건방지게…!"
격정을 토해낸 흑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권능으로 자신을 죽일 수 없으니 직접 움직이겠다는 심산이리라.
분명 먼저 움직인 건 자신이었는데 흑린은 지척에 당도해있었다.
늑대는 모종의 확신을 얻었다. 만상의 주인이 가진 마력이 그러하듯 흑린의 모든 스테이터스는 네 자릿수의 영역에 다다라 있는 거라고. 감히 심안으로는 엿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좇는 것조차 어려운 속도는 그 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희망(재를 거두는 자) Lv.100]
[EXP 10000000 / 100000000]
[업 166.42%] [영량 65.44km³]
[체장 ] [체고 ] [체중 ]
[힘 901] [민첩 943] [체력 1016] [마력 1058] [극기 71]
네 자릿수에 도달한 스테이터스는 어느덧 둘. 비록 성장은 멈추고 말았지만 근접해있다.흑린의 손짓을 피해낸 늑대는 그걸 다시금 재확인했다.초월하진 못했으나 그에 한없이 가깝다고.
"……!"
가능하면 물어뜯고 싶었지만 흑린은 그 스스로가 검은 불꽃인 존재. 섣불리 물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불살라지고 말리라. 그러는대신 마촉수를 뻗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촉수는 닿기도 전에 불타올라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다. 촉수 끝에서 검은 불길이 역류해 올라오자 재빨리 그것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흑린이라는 힘은 그 존재는 그리 어쭙잖은 게 아니다. 흑린의 시선이 향하자 늑대는 재빨리 빼앗은 불길로 자신을 감쌌다.
"그랬었지."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막을 수 있었던 건 과거, 흑린의 힘을 일시적으로나마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몰랐다면 이걸로 끝이었으리라. 불길을 거둔 늑대는 혼무를 일으켜 그것마저 먹어치워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흑린의 모든 스테이터스는 분명 자신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다. 그러나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격의 차이는 있더라도 불가능하진 않다. 자신과 바다의 재앙이 그러했던 것처럼. 차이는 메울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메울 수 없다. 광폭화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으니까.혼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려 한다.
아무 제한도 없이 흑린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정신 고갈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 힘을 강탈하면 강탈할수록 마치 독처럼 파고들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 무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혼무를 유지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당하고 말리라.
유일하게 흑린의 격에 맞설 수 있는 스킬이었으니까. 조금 더 공방이 이어졌지만, 늑대는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했다. 심안은 아주 먼 곳의 수를 읽고 자신을 미래로 보냈다.
최선의 수를 고르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말리라. 미래에서 이미 짜고 온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싸움. 그리고 늑대는 직감했다. 분명흑린은 자신이 보는 것보다 아득히 먼 곳을 보고 있다고. 길은 점점 좁아져 가고 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수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걸까.
역량과 기량의 모든 면에서 흑린은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패하고 말리라.그렇게 궁지로 내몰려가던 늑대는 별안간 흑린이 거리를 벌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샌가 세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는 자신과 흑린뿐만이 아니다. 초월자의 영역에 있는 또 다른 이. 영원의 권능을 다루는 소녀가 검은 불길을 밀어냈다.
"귀찮게…!"
흑린과 영원의 권능이 맞부딪친다. 찰나를 길게 늘어뜨리는 힘에 의해 시간 속에 녹아든 검은 불길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졌다.
고개 돌린 늑대는 무언가를 마신 듯 입가를 닦은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자신에게 물어온다. 이 상황에서조차 혼자 싸울 셈이냐고. 함께 흑린을 쓰러뜨리자고 말이다.
"……."
설령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타협이다. 늑대에게 있어서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답하기 전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실소는 점점 커지더니 머잖아 광소로 변해간다. 그러더니, 마치 감정의 선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해졌다.
"……이젠 됐어."
이글거리는 흑린의 형상이 조금씩 변해간다. 여인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등 뒤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온 무언가가 깃털 없는 날개. 가시로 만든 듯한 날개를 만들어냈다.
단순한 형태 변화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다.
흑린으로부터 폭발적인 마력이 거칠게 끓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이젠 그냥 전부 다 죽여버릴 테니까…!"
그녀의 손에서 거세게 일어난 불길이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